대륙조선의 서울 한성을 찾아서 <사마르칸트>
1. 개요
대륙조선의 서울이자 황도를 한성, 또는 한양이라고 한다. 그런데 대륙에 있었던 조선이기에 그 위치가 궁금해진다. 대륙조선의 서울 한성을 찾아서 그 첫번째 순서로 카자흐스탄의 사마르칸트를 가보기로 하자. 사마르칸트는 대륙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몽골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활동한 지역이고, 그 황조를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을 입장으로 한것이다. 즉 동시대에 세워졌던 티무르제국이 조선제국과 다르지 않다는 설이다.
아래그림은 사마르칸트에 수도를 두었던 티무르제국의 이슬람사원 비비하눔모스크모습이다.

출처: 무역을 통하여 세계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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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재의 알려진 역사: 전설과 역사가 숨쉬는 古都
이 이름도 이쁜 비비 하눔 사원에는 왕조의 슬픈 야사가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티무르가 총애한 왕비 비비 하눔이 인도 원정 중인 남편 티무르를 놀라키게 하려고 이 거대한 사원을 축조시켰다 한다. 그러나 티무르가 개선하기 전까지에는 완공에 무리가 있었는데, 왕비를 사모한 건축가가 만약에 자신의 소원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공사를 중단하겠다고 하며 왕비에게 키스(입맞춤)를 청원하였다. 어쩔 수 없이 청원을 받아들여 볼을 내밀었는데, 운명의 장난인가.
왕비의 볼에 그만 키스 마크가 남아버린 것이다. 사마르칸트에 개선한 티무르는 완성된 사원을 보고 기쁘하지만, 왕비의 볼에 남은 키스 마크에 대한 사연을 듣고는 건축가를 사형시켜버렸다. 왕비에겐 두번다시 다른 남자를 유혹할 수 없도록 이 이후 차틀을 쓸 것을 명령했다고 전해진다. 왕비는 완성된 탑(미나레트) 위에서 스스로 뛰어내려 자결한 것으로도 전해지고 있지만, 비비 하눔이라는 이름의 왕비가 실존하지 않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어느 왕조의 야사에나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벌여지는 드라마 같은 전설이 많은 전해지는 것도 역사의 주인공들이 인간들임에 연유한 것 같다. 이 비비 하눔 사원 정면에 아담한 건축물이 하나 있는데, 전설의 여주인공인 비비 하눔이 잠들어 있는 사원이다. 전설 얘기가 나온김에 사마르칸트를 생각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전설을 하나 더 소개할까 한다. 레지스탄 광장에서 남쪽으로 500m가량을 걷다보면 구리 아미르 묘(Guri Amir Mausoleum)란 사원 건축물이 공원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최성기의 티무르제국을 통치한 티무르(Timur)와 그의 손자, 우루그벡 등 3대 제왕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이 건축물은 1404년 티무르가 전사(戰死)한 손자인 무함메드 슐탄(Muhammad Sultan)을 위해 만들었다 한다. 거대한 푸른색 돔(지붕)으로 된 건축물로 돔 위에 다시 돔을 형성한 이중 돔 형태의 건축 양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이 티무르의 묘석과는 또 하나 믿어지지 않는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1941년에 소련의 고고학자에 의해 티무르의 묘가 열리어졌다. 이 때에 전해져오던 이야기대로, 티무르의 오른쪽 손발이 부자유스러웠던 것과, 우루그벡이 목이 잘려 살해된 것 등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묘에는 "어느 누구라도 이 묘를 여는 자는 나보다 더 무서운 자에 의해 쓰려지게 될 것이다."라는 저주을 담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 티무르의 묘가 열린 다음 날이 1941년 6월22일 히틀러는 독소(獨蘇)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히틀러의 공격과 티무르의 묘에 얽힌 전설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는 알 수 없으나 역사의 미스테리의 하나임엔 분명하다. 사마르칸트의 유적지 견학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그곳은 다름아닌 일명 "중앙아시아 왕가의 계곡"이라 불리는 샤히 진다(Shahi Zinda) 즉 "살아 있는 왕"으로 불리는 묘가 있는 곳이다. 이곳엔 130m의 거리에 남북의 좁은 통로을 따라 양쪽으로 20여개에 가까운 묘를 안치한 건축물들이 건립되어 있다. "살아 있는 왕"의 전설을 가진 쿠삼-분-앗바스와 티무르 일족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징기스칸은 잔악무도하고 항복을 거부하는 성(城)은 완전히 초토화를 시켜 남녀노소를 가리지않고 모두 죽인 걸로 알려져있다. 일설에는 그 중에서도 기술직에 종사했던 기능공들은 죽이지않고 몽고로 데리고 간 것으로 알려진다. 징기스칸의 공격은 무조건적인 공격이 아니라, 사전에 철두철미한 정보를 수집한 후에 공격하는 성격의 소유자임을 그의 원정 기록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살아 있는 왕"의 묘소의 전설을 접하고는 공격을 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고대 때부터 사막의 대상들과 스텝지역의 유목민들의 이동의 길잡이는 별자리였다. 고대 이집트와 인도의 천문학, 마야와 잉카문명 발상지 등에서도 고도로 발달된 천문기술과 천문대를 가지고 있었던 걸로 알려지고 있다. 인도의 경우, 자이풀과 델리에 있는 천문대가 그러하고 또 베다(Veda) 구성에 천문학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했을 정도로 천체의 움직임에 대한 연구는 고대사회 사람들과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때부터 동서양의 문명이 전해지던 실크로드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기후적인 관계로 무더운 낮 시간보다 이동이 가능한 밤시간대를 이용해야 했던 환경속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이 천문술 특히 별자리의 움직임 파악이었다.
사마르칸트 지역에 설치되었던 우루그벡 천문대(Ulughbek Observatory)는 설치 당시인 1420년에 세계 최고의 수준을 가지고 있었던 걸로 전해진다. 천문대의 이름에서 알 수있듯이, 티무르의 손자인 우루그벡(1393-1449)이 만든 것이다. 그는 제국을 통치하는 것 보다 학문과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란(페르시아)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고명한 학자들을 초청해 학문발전에 기여한 걸로 알려지는 인물이다. 그 결과 자신의 아들에게 목이 잘려 살해되는 비극적인 운명의 길을 걷게되지만, 천문학자로서 역사에 남을 연구를 이룩한 인물이기도 하다. 레지스탄 광장에서 동북방향으로 4km가량 떨어진 곳에 높이 30m에 직경 46m의 3단으로 지어진 이 천문대는 일년간의 길이를 현재와 그의 오차 없이 측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 여행자가 사마르칸트 유적지 중에서 가장 관심을 가지는 곳이 사마르칸트 역사박물관이다. 이 곳에는 7세기 때 영주의 집에서 발견된 벽화가 보관되어 있다. 이 벽화는 무슬림 아랍제국 세력이 침입하기 이전의 당시의 번성했던 생활상이 그려져 있다. 제관식에 초청받은 각지의 사신들의 행렬이 그려져 있다. 흰 코끼리를 탄 인도에서 온 사절단, 낙타를 탄 사절단, 하얀 학의 모습과 중국에서 사절단과 함께 온 공주의 모습 등이 있다.
여기에 중국 사절단 행렬 뒤쪽에 머리에 깃틀을 꼽은 통일신라의 화랑도 모습을 한 두명의 신라로부터의 사절단의 모습도 있다. 벽면의 색이 거의 떨어져나가서 색깔 구분은 불가능 하지만, 그 형태는 주의 깊게 보면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다. 고려 초기에 색목인(色目人, 눈이 푸른 사람-페르시아 계통의 민족)이 낙타를 타고 개성에 입성한 기록이 남아 있는 만큼, 당나라를 통해 古都 사마르칸트 왕국과도 교류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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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성지순례
주인장 연락처 E-Mail : namo80@freechal.com
3. 사마르칸트의 시장사람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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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hoto.naver.com/view/2008030223393350967
출처:NAVER 포토갤러리
4. 사마르칸트 시외의 풍경

출처 : Desperado
http://web2.c2.cyworld.com/myhompy/main.php?home_id=a0448128
5. 결론
티무르 제국의 역사는 짧지만, 티무르의 이슬람교(회교)의 영향으로 중원대륙에 회교사원이 많이 퍼진것 같다. 현재 녕하회교자치구를 중심으로 대륙 전국적으로 회교사원이 많다. 태조이성계 황조는 외세의 접근을 잠시 피해 중원내로 이동한 것으로 보이고, 단군조선의 후예로서 중원에서 찬란한 조선의 문화를 꽃피우게 된것으로 사료된다. 앞으로 더 많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연구검토가 필요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