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또 다른이름은 명.청?
조선이 명,청의 력사와 너무도 닮았다.
고려高麗가 망할때 원元도 망하고 조선이 건국될때 명明도 건국되고 조선이 망할때 청靑도 망한다.
조선이 왕이 바뀌면 명도 청도 바뀐다. 명이 쿠데타가 나면 조선도 나는가?
몇년 사이를 두고 비슷한 행적은 반복이 된다.
중국대륙과 한반도는 거의 닮았다. 왜? 속국이라서? 그래서 같이 바뀌나?
암튼 닮았다.
조선과 명,청.. 또다른 조선이다.
명 멸망때까지 검색해서 대강 적어봤다.
조선의 태조와 명의 주원장, 조선의 정종과 명혜종, 조선의 태종 방원과 명성조..
그리고 우리의 영웅 세종과 명의 인종의 체질..
문종과 명이 짧은 명인종, 그리고 다음에 명이 긴 명선종..
조선의 세종+문종은 명인종+명선종..
선조때 사직이 불타고 인조가 청태종에게 대갈통깨지게 절을한건 나라가 망했기 때문임..
정용석 선생은 적어도 두개의 나라를 합본한것이 조선사라 한다.
그럼 조선은 황제국이고 명청은 지방국이 된다. 즉 제후국..
예전에 祖와 宗의 차이를 적자와 서자의 차이로 알고 있었음.
祖는 국조나 국조의 반렬에 오르는 치적이 제왕에게 썼음.
宗은 뭐 그저그런 평범한 제왕이랄수있음.
태조는 국조, 세조,선조,인조,정조,순조는 국조나 국조의 반렬에 오르는 치적이 있어야함.
|
조선 |
1392-1910 |
명 |
1368-1644 |
제멋대로 비교 |
|
태 조太祖1335∼1408(73세)1392∼1398(6년) |
조선 제1대왕. 선조 리안사(李安社)가 元에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간도지방)에 들어가 지방관이된뒤 기반시작. 리안사의 아들 행리(行里), 손자 춘(椿)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千戶)로 元에 벼슬. 리자춘도 元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로 있었음. 리자춘은 1356년(공민왕 5)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내응, 원의 세력을 축출, 고려의 벼슬을 받음. 리성계는1361년 10월에 독로강만호 (禿魯江萬戶) 박의(朴儀)의 반란을 진압, 홍건적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 이듬해 정월 친병親兵:私兵 2, 000명과 개경에 제일 먼저 입성하여 진압.1364년 최유(崔濡) 가 원제(元帝)에 의하여 고려왕에 봉하여진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원병(元兵) 1만명을 인솔, 평안도 지방에 쳐들어오자, 최영(崔瑩)과 함께 수주(隋州) 달천(獺川)에서 이들을 섬멸. 여진족은 三善, 三介가 동북면에 침범, 함주까지 함락, 이들을 격퇴함으로써 동북면의 안정. 1377년(우왕 3)크게 창궐하던 왜구를 대파하였으며, 1380년에 양광, 전라, 경상도 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바투(阿其拔都: 阿只拔都)가 지휘하던 왜구를 운봉(雲峰)에서 섬멸. 황산대첩(荒山大捷).1382년 여진인 호바투(胡拔都)의 군대를 궤멸. 1384년 이듬해 함주에 쳐들어온 왜구를 대파. 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고, 명의 철령위(鐵嶺衛)설치문제로 정벌군 출정, 위화도회군. 최영,림견미(林堅味), 렴흥방(廉興邦) 주살,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 이듬해 창왕을 폐함. 1390년(공양왕 2)전국의 병권을 장악령삼사사(領三司事)가 됨.1391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고 1392년 7월 공양왕을 원주로 추방, 태조로서 즉위. 즉위초에는 국호를 ‘고려(高麗)’라 칭함. 의장(儀章)과 법제도고려의 고사(故事)를 따름,1393년(태조 2)3월 15일부터 朝鮮으로 씀. 새 수도건설은 한양(漢陽)으로 결정, 1393년 9월에 착공, 1396년 9월에 완공. |
태 조太祖1328~1398(60세)1368-1398(30년) |
제1대는 이름은 주원장(朱元璋), 호주(濠州 ; 安徽省 鳳陽縣)출신 년호를 홍무(洪武)라고 했기 대문에 홍무제, 시호는 태조. 51년 홍건적(紅巾賊)의 란이 일어난 다음해에 호주에서 반기를 든 곽자흥(郭子興)군에 참가. 55년 곽자홍이 죽자 곽군(郭軍)의 지휘권을 장악 홍건적군의 부장(部將) 됨. 이 해에 량자강揚子江을 건너서 태평로(太平路)를 장악, 56년 집경로(集慶路 ; 後의應天府,南京)를 점령. 응천부를 근거지로 주변세력을 확장. 량자강의 남북을 모두 차지. 1368년 응천부에서 황제의 등극, 특히 북방에 서달(徐達) 등 대군을 파견하여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 ; 현재 北京)를 점령. 원나라 순제(順帝)를 몽골고원으로 추방. 후에도 몇 차례 대군을 파견,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정벌, 1388년 중국통일을 완성. 한족의 정통성 유지 및 전제정치를 강화하는 정책을 실시. 홍무제는 처음에는 원나라의 제도를 많이 답습했지만, 1380년 호유용(胡惟庸)의 옥(獄)을 기화로 중서성(中書省)을 폐지하고, 이때부터 재상을 두지 않고 6부를 황제에게 직속. 감찰면에서도 어사대(御史臺)를 폐지하고 도찰원(都察院)을 두어 어사의 지위를 낮춤. 군사면에서도 대도독부(大都督府)를 폐지하고 5군도독부로 분할. 지방의 통치는 행중서성(行中書省)을 폐지하고 포정사(布政司), 안찰사(按察司), 도지휘사(都指揮司) 등 3권으로 분할하고 중앙에 직속. 81년 부역황책(賦役黃冊)을 제정 전국적으로 이갑제(里甲制)를 시행. 중국력사상 가장 혹독한 독재체제를 확립. 빈곤하게 성장한 홍무제는 민중의 도덕규범인 육유(六諭)를 정했으며 교민방문(敎民榜文)을 반포하여 인민이 지켜야 할 본분을 가르쳤고 황제에게 충실하게 복종할 것을 강요. 그러나 호유용의 옥에 이어서 93년 남옥(藍玉)의 옥이 일어나자 많은 공신과 숙장(宿將)들을 없앰. 말년에 시의심(猜疑心)이 생겨서 황태자 표(標)를 잃었고 정신적으로 불안한 가운데 병으로 죽었다. 묘호는 태조(太祖). 효릉(남경) |
태조 1398년 사건 동일 리성계는 양위 주원장은 사망. 암튼 왕질 그만둠. 주원장은 홍건적을 일으키고 리성계는 홍건적을 박살내서 출세. 리성계 조부 남경에서 기반, 주원장도 남경에서 기반. |
|
정 종(定宗) 1357∼1419(62년)1399∼1400(1년) |
조선의 제2대왕 본관은 전주(全州)태조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경(日+敬), 초명은 방과(芳果), 자는 광원(光遠)이다. 성품이 순직, 근실하고 지행이 단엄, 방정하면서 무략이 있었다. 일찍부터 관계에 나가 1377년(우왕 3) 5월 이성계(李成桂)를 수행하여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 1388년에 순군부만호(巡軍副萬戶)로서 도만호(都萬戶) 왕안덕(王安德) 등과 함께 국정에 폐해가 많았던 렴흥방(廉興邦)의 옥사를 국문하였으며, 1389년(창왕 1)7월 절제사(節制使) 유만수(柳曼殊)와 함께 해주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하였다. 1390년 6월 자혜윤(慈惠尹)으로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윤사덕(尹師德)과 함께 양광도(楊廣道)에 침입한 왜적을 영주(寧州) 도고산(道高山)아래에서 격파하였고,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삼사우사(三司右使) 등을 역임하였다. 재위시에도 정무보다는 격구(擊毬) 등의 오락에 탐닉하면서 보신책을 삼았다. 1398년 1차 왕자의난에 등극, 1400년 2차 왕자의난에 방원에게 양위.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상왕(仁文恭睿上王)으로 인덕궁(仁德宮)에 거주하면서 격구·사냥·온천·연회 등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으며, 태종의 우애를 받으면서 천명을 다함. 1419년(세종 1)12월 온인공용 순효대왕(溫仁恭勇 順孝大王)의 시호를 받았고, 1420년 4월 중국으로부터 받은 공정(恭靖)의 시호를 더하여 공정온인 순효대왕(恭靖溫仁 順孝大王)으로 개시되었다. 오랫동안 묘호(廟號)가 없이 공정대왕(恭靖大王)으로 불리다가 1681년(숙종 7) 정종(定宗)의 묘호를 받았다. 릉호는 후릉(厚陵)으로 풍덕에 있다. |
혜종(惠帝)1383 ~ 1402(19세)1398-1402(4년) |
제2대는 이름은 주윤문[朱允(火+文)] 이사람은 홍무제의 손자이고 문치주의자. 태조가 죽은 후 16세에 즉위하여 년호(年號)를 건문이라 함. 시호(諡號)는 혜제(惠帝). 선량善良하고 어질어서 문약하다는 평. 방효유(方孝孺)를 등용, 황제권력을 일으키고, 여러 왕의 봉령을 삭감 세력을 억압. 이에 1399년 일부 병권을 쥐고 있던 연왕(燕王)이 정난(靖難)의 변으로 인해서 황제자리를 빼앗기고 어디론가 행방불명. 또는 황제측의 환관이 내통, 금릉(金陵)은 함락되고, 황제는 불에 타 죽음. 1398년 정사(靖社)의변(變)의 변. 1401년 정난(靖難)의변(變), |
정종과 유사. 혜종은 행불, 정종은 천수를 누림. 추방된자의 말로末路? 같은사건을 달리기록하기 위한 기만策? 1차왕자의란=정사의변? 2차왕자의란=정난의변?정종은 묘호없이 공정대왕 명혜종은 행불,또는 火死. '1420년 4월 중국으로부터 받은 공정(恭靖)의 시호를 더하여 공정온인 순효대왕(恭靖溫仁 順孝大王)으로 개시' 는 태종이 하사? |
|
태 종太宗1367∼1422(55세),1401∼1418(17년) |
조선 제3대 왕. 이름은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1383년(우왕 9)에 문과에 급제하고, 1388년(창왕 즉위년)부터 이듬해까지 고려왕실을 보호할 의도에서 감국(監國)요청의 사명을 띠고 명나라에 파견된 정사 문하시중 이색(李穡)의 서장관이 되어 남경(南京)에 다녀왔다.1398년 정도전 일파에 의하여 요동정벌 계획이 적극 추진되면서 자신의 마지막 세력기반인 사병마저 혁파당할 단계에 이르자, 평소의 불만을 폭발시켜 제1차 왕자의 란을 일으키고 정도전과 세자 방석(芳碩) 등을 제거한 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정변 직후에는 여러 사정을 감안하여 세자로의 추대를 사양하였으며, 단지 정안공(靖安公)으로 개봉되면서 의흥삼군부우군절제사와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를 겸하였다. 또한 정사공신(定社功臣)을 논정하여 1등이 되었고, 이어 개국공신 1등에도 추록되었다. 1399년(정종 1)에 새로 설치된 조례상정도감판사(條例詳定都監判事)가 되었으며, 강원도 동북면의 군사를 분령(分領)하였다. 1400년 방간(芳幹)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포(朴苞) 등이 주동이 된 제2차 왕자의 란을 진압한 뒤 세자로 책봉되면서 내외의 군사를 통괄, 세자로 책봉되자 병권장악·중앙집권을 위하여 사병을 혁파하고 내외의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어 정무를 담당하게 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면서 군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어 1400년 11월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등극하였다. 묘호廟號는 태종이며, 릉호는 헌릉獻陵으로 광주廣州 대모산大母山: 현재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
성조成祖1360~1424(64세)1402-1424(22년) |
제3대는 이름은 주체, 시호는 성조(成祖)이며 년호는 영락(永樂). 그래서 영락제라고 불림. 조선의 태종과 배경이 비슷. 조선 출신후궁의 아들이란 설도있음. 패륜을 저지르고 즉위를 했지만 정치를 잘함. 태조 홍무제(洪武帝)의 넷째아들. 21세에 북평北平;北京에 연왕(燕王)으로 봉해지면서 두각. 정난(靖難)의 변으로 태조 뒤를 이은 조카 건문제(建文帝)로부터 왕위를 탈취 제위에 오른 뒤 수도를 북경北京 이도. 22년에 걸친 치세는 대외정책의 성공으로 중국 력사상 가장 활기가 넘치던 때. 그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군인제왕이라는 평. 한인(漢人) 황제로는 유일하게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5차례나 몽골을 정벌, 시베리아 고이苦夷(지금의 사할린)까지 령토확장 티베트를 복속, 안남安南 중국령토로 편입, 티무르제국과 접속, 일본에 대해서 일본국왕으로 봉하고 일본을 조공국. 또한 남방의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정화(鄭和)가 거느린 대선단(大船團)을 7차례나 파견, 동남아시아부터 인도양·페르시아만 및 홍해 연안과 아프리카 동해안의 30여 개 나라와 활발한 무역. 그 결과 15세기 초반의 동아시아 세계에는 직접적인 무력제압 혹은 조공관계를 통해 명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적 질서가 성립, 영락제는 그 주재자. 그러나 활발했던 대외정책에 비하면 내정은 《영락대전(永樂大典)》 등 대규모 칙찬서(勅撰書)의 편찬이 이루어진 정도이다. 정난의 변 이후 건문제 주위의 유력자와 그의 일족에게 가한 숙청사건은 후세의 비난을 받았으며, 환관을 중용하는 등 내정적으로는 불안하였다. 영락제는 태조가 다져놓은 재력을 리용하여 활발한 대외활동을 전개, 1427년 7월 몽골 제5차정벌에서 돌아오는 길에 유목천[楡木川;지금의 몽골자치구 多倫縣의 북서쪽]에서 사망. 유체는 베이징 북쪽 40㎞ 떨어진 천수天壽 산기슭(지금의 北京市 昌平區)에 묻혔고 릉은 장릉長陵. 릉 가까이에 영락제 이후 13명의 황제들의 릉묘군陵墓群이 있어 명나라 13릉으로 관광지.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성조成祖. |
태종=성조 또는 태종, 태종은 형을 내몰고 성조는 조카를 내몰고.. 정치안정을 이룩. 그불안한 시기에 성조는 아프리카로 출정? 조선은 혼란? 조선은 정국안정이 안되서 명을 도모 못했나? 선친이 원의 벼슬까지 했는데? 욕심많은 방원이 참았다? |
|
세종世宗1397∼1450년(53세). 1418년~1450(32년) |
조선의 제4대 임금.1397년(태조 6)∼1450년(세종32).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이름은 도, 자는 원정(元正)이다. 태종의 셋째 아들,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비는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1412년 충녕대군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해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세종은 일찍부터 신체상의 각종 질환으로 1437년 벌써 세자(문종)에게 서무(庶務)를 결재하게 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함. 시호는 장헌莊憲, 릉호는 영릉英陵이며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다 |
인종仁宗 1378~1425(47세)1424~1424(1년) |
제4대 이름은 주고치周高熾,영락제(永樂帝)의 맏아들. 시호는 인종(仁宗)이며 년호는 홍희(洪熙)였기대문에 홍희제라고 불림. 홍희제는 대범하고 호탕하고 냉정한 아버지 영락제와는 달리 부드럽고 어진 성격. 어릴 때부터 문무(文武)에 빼어났고 영락제가 황위찬탈전·만주경략·몽골정벌 등 외정(外征)에 치중할 때 정무를 처리. 즉위 후 양영楊榮을 비롯한 삼양三楊을 중용 용관(冗官) 폐지, 중앙 아시아에서의 말의 구입 중지 등으로 재정지출 억제 등 내치(內治)를 회복, 기근구제 및 토호의 횡포를 다스리는 등 민생안정에도 힘썼다. 또한 황위를 빼앗긴 건문제(建文帝) 일파의 사회적 복귀를 실현시켜 국내 감정의 융화에도 힘썼다. 그러나 너무뚱뚱한 비만 체질이러서 걸음도 제대로 못걸었음. 그래서 영락제가 음식조절과 운동을 엄명한 일도있다. 너무 뚱뚱해서 고도비만이원인이되서 황제가 된지 8개월만에 사망. 그 방침은 아들 선덕제(宣德帝)로 이어져 착실히 실천. 인종·선종 두 왕 모두 내치에 힘쓰고 선정(善政)을 베풀어 후에 이를 가리켜 <인선(仁宣)의 치(治)>라 칭하였다. 묘호는 인종(仁宗). |
세종=인종. 세종대왕의 성격과 치적이 유사하고 병명이 나와있고 전후 왕의 재위가 비슷함.세종치세=인선의치? |
|
문 종文宗1414∼1452(38세)1450∼1452(2년) |
조선의 제5대왕. 이름은 향(珦)이고 자는 휘지(輝之). 세종의 장남. 1421년(세종 3)에 왕세자로 책봉, 1450년 37세로 즉위. 학문을 좋아하고 학자(집현전 학사)들을 아꼈다. 부왕인 세종은 일찍부터 신체상의 각종 질환으로 1437년 벌써 세자(문종)에게 서무(庶務)를 결재하게 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함. 세자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하여 앉아서 조회(朝會)를 받게 하고(南面受朝), 모든 관원은 뜰 아래에서 신하로 칭하도록 함,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서무는 모두 세자의 결재를 받으라는 명을 내림. ‘수조당(受朝堂)’을 짓고 세자가 섭정을 하는 데 필요한 체제를 마련, 1445년부터는 세자의 섭정이 시작. 이 섭정은 세종이 죽기까지 계속, 문종은 즉위하기 전에 실제 정치의 경험. 문종은 몸이 허약하여 재위 2년4개월 만에 39세로 병사하고, 나이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함으로써, 계유정난, 세조의 찬위(纂位), 사육신사건 등 정치적으로 불안한 사건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호는 공순(恭順)이며, 릉은 현릉(顯陵)으로 양주에 있다. |
선종宣宗 1398~1435(37세)1425-1435(10년) |
제5대는 이름은 주첨기朱贍基 년호는 선덕(宣德), 묘호는 선종(宣宗). 시호는 장황제(章皇帝). 역시 어질고똑똑하며 대범한 황제라고 알려져있음. 정치를 잘해서 나라를 부강하게하고 안정시킴. 삼촌, 즉 부친 홍희제의 동생인 진왕 주고구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고 주고구를 가마솥에 넣어 삶아서 죽였다고 함. 중국 명(明)나라 제 5 대 황제(1425∼35). 부왕 홍희제(洪熙帝)가 제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죽자 장남으로 제위에 올라 내정중심內政中心 민생안정을 목표로 한 방침을 계승하여 전국의 요지(要地)에 능력 있는 관료를 순무(巡撫)로서 보내고 사회질서와 재정재건에 힘씀. 특히 관전(官田;국유지)의 토지세 부담 과중을 바로잡음. 반면 베트남 지배를 포기하고 몽골족에 대한 방위선을 만리장성 안쪽으로까지 후퇴시키는 등 대외적으로는 활동의 규모를 크게 축소. 조부 영락제(永樂帝)가 실행한 대외 적극정책과 지방관료지주의 횡포에 의해 무너졌던 재정은 다시 튼튼해졌으며 국력은 일단 회복. 시호는 장황제章皇帝. |
문종=선종. 明인종의 체질은 세종과 유사하고 明선종의 행적은 세종과 문종의 합하면 비슷, 반란은 세조때 사육신과 유사. |
|
단종端宗1441∼1457(16세)1452∼1455(1년) |
조선 제6대왕 이름은 홍위弘暐, 아버지는 문종,1448년(세종 30) 8세 때 의정부의 청으로 왕세손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 왕세자로 책봉.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경복궁 천추전(千秋殿)에서 죽자 근정전(勤政殿)에서 12세에 즉위 . 의정부와 륙조가 서로 의논하여 시행할 것과, 승정원은 왕명출납을 맡고 있으므로 신하들의 사사일은 보고하지 말도록 교서. 문종의 고명을 받은 령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측근에서 보좌, 집현전학사들이 측근에서 협찬. 역모가 있은후 조신 가운데 상왕도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리유로 서울에서 내쫓자는 주청이 있자, 1457년 6월 로산군魯山君으로 강봉, 강원도 녕월에 류배. 녕월에서 유폐생활을 하는 동안, 매양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에 올라 시를 지어 울적한 회포를 달래기도 함. 이해 9월 경상도 순흥에 류배되었던 로산군의 작은아버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 로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 10월 마침내 죽음을 당함. 1681년(숙종 7)에 로산대군으로 추봉, 1698년 전 현감 신규(申奎)의 상소에 의해 복위.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 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 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릉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함. |
영종英宗 1427~1464(37세)1435-1449(14년) |
6대는 이름은 주기진朱祁鎭 묘호는 영종英宗, 시호는 예황제睿皇帝로 년호는 정통正統. 일단 퇴위후 제8대 황제(1457∼64)로 복위. 부왕 선덕제가38세라는 젊은나이에 세상을 떠났기때문에 자신은 제대로 정치를못하고 환관(내시)인 왕진이라는 자가 정치를 농간하여 나라를 망쳤고 기어이는 북방 민족인 오이라트족과 싸우다가 오이라트족에게 포로가되는 수모를 겪는다. 그래서 오이라트땅에서 살게된다. 정통은 제6대 당시의 년호이고, 제8대 시기는 년호에 따라 천순제天順帝라고 불렀다. 아버지 선덕제(宣德帝)의 통치로 재정을 비롯한 각 방면에서 안정을 되찾은 명조(明朝)였으나 정통제가 9살의 나이로 즉위한 7년 뒤, 할머니인 태황태후(太皇太后) 장씨(張氏)가 죽자 환관(宦官) 왕진(王振)의 전횡(專橫)과 몽골의 침입, 화중華中·화남華南·복건福建·광동廣東 등지의 대규모 민중반란으로 위기에 직면.1449년 왕진에 의해 강행된 대(對)몽골 친정(親征)으로 정통제가 에센에게 사로잡혀 끌려가는 대사건(土木의 變)이 발생. 동생인 성왕 주기옥朱祁鈺이 경태제景泰帝로 즉위, 명관 우겸于謙 등의 필사적 노력에 의해 북변 및 화중·화남의 위기를 극복. 그러나 50년 석방된 정통제가 동생 경태제에 의해 태상황제太上皇帝가 되어 사실상의 유폐생활에 권력중추는 불안정. 57년 무관 석형石亨 등의 쿠데타에 의해 복위復位하여 천순제가 되었고, 60년에 이르기까지 리현李賢 등 진사 출신의 내각등용과 전횡을 일삼은 석형 등의 사형·유형에 의한 처분으로 안정. 황제가 죽은 뒤, 성화제成化帝·홍치제弘治帝가 통치한 15세기 후반, 명왕조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그런대로 평정을 유지. |
어린나이에 즉위. 단종은 상왕, 명영종은 태상왕, 단종은 류배후 금성대군 쿠데타 실패후 사망. 명영종은 태왕이 되어 유폐후 쿠데타 성공 재등극. 세조가 새왕조의 시조라면 단종은 前왕조의 말왕. 영종도 말왕. 즉 동일인. |
|
세조世祖1417∼1468(51세), 1455∼1468(13년) |
조선 제7대왕 이름은 유,자는 수지(粹之)세종의 둘째아들이고 문종의 아우, 처음에 진평대군(晉平大君) 에 봉함, 1445년(세종 27) 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쳐 봉함. 그가 대군으로 있을 때는 세종의 명령을 받들어 궁정 안에 불당을 설치하는 일에 적극 협력, 승려 신미(信眉)의 아우인 김수온(金守溫)과 함께 불서(佛書)의 번역을 감장(監掌), 향악(鄕樂)의 악보(樂譜)도 감장, 정리.1452년(문종 2) 5월에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 1453년(단종 1)10월에 계유정난을 단행. 정국을 전복 군국(軍國)대권을 쥐고 국정을 처리하였다.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 都節制使) 이징옥(李澄玉)마저 주살, 후에 리시애도 주살. 내외의 반대세력을 제거1455년 윤 6월 단종에게 강박하여 왕위를 수선(受禪). 세조 즉위.야인(野人: 女眞族)에게는 장수를 보내어 토벌, 응징. 건주위(建州衛)의 리만주(李滿住)를 참수.1456년 7월에 조선단군(朝鮮檀君)의 신주(神主)를 조선시조단군(朝鮮始祖檀君)의 신위(神位)로 고쳐 정하고, 후조선시조(後朝鮮始祖) 기자(箕子)를 후조선시조 기자의 신위로 고쳐 정하고, 고구려시조를 고구려시조 동명왕의 신위로 고쳐서 정하였다.시호는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묘호는 세조, 릉호는 광릉(光陵). |
대종代宗 1450-1456(6년) |
7대는 주기옥 년호는 경태(景泰)로 정통제의 이복동생. 오이라트에게 형인 정통제가 잡혀가자 황제가됨. 형을 납치한 북방민족과 강화회담을 하느라 시간다보내고 그다음에는 조카를 태자자리에서 폐위시키고 자기아들을 태자로삼았는데 그후에 병으로 눕는다. 후에 정통제가 돌아와서 경태제를 몰아내고 다시 황제가 됩니다. 정통제가 쓸모없다고 생각한 오이라트는, 후에 조건없이 그를 명나라로 송환해버리고, 정통제는 태상황제로서 남궁(南宮)에 유폐되었다. 하지만 경태제가 깊은 병에 걸린 사이, 정통제는 황위를 되찾고 8대 황제인 천순제로 다시 즉위한다. (즉, 명의 6대 황제와 8대 황제는 같은 인물) 유폐상태에 있던 정통제가 다시 천순제로 복위하면서 경태제의 무덤을 북경 금산에 쓴다. |
계유정난=정통제 쿠데타?. 세조는 새로운 왕조의 시조? 영종=단종이 말왕? 세조가 조서,고려의 시조를 다시 정해 모셨다? |
|
예종睿宗1450∼1469(19세),1468∼1469(1년)엠파스검색(1441~1469,28세) |
조선 제8대왕재위 이름은 황(晃광晄) 자는 명조(明照)초자(初字)는 평보(平甫)세조가 위독하자 1468년 9월 7일 수강궁(壽康宮)에서 즉위하였으나 재위 14개월 (1년 2개월)만에 19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즉위초에는 세조의 유명을 따라 한명회, 신숙주(申叔舟) 등 대신을 원상(院相)으로 삼고, 이들로 하여금 서무를 의결, 1468년(예종 즉위년)에는 직전수조법(職田收租法)을 제정. 이해에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반역을 도모 복주(伏誅)되었다.9월에 상정소제조(詳定所提調) 최항(崔恒) 등이 《경국대전》을 찬진하였으나 반포를 보지 못하고 승하. 예종은 18세에 즉위세조 비 윤씨가 수렴청정, 신숙주·구치관(具致寬) 등이 원상으로서 서정을 의결하였으므로 왕권은 약화된 시기.예종이 세자로 있을 때인 1466년부터 승명대리(承命代理)로 정치의 경험, 세조의 정치방법에 영향, 언관(言官)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 언관에 대한 좌천·파직 등의 기사를 볼수있음.1457년(세조 3) 왕세자로 책봉. 재위중 직전수조법(職田收祖去)을 제정, 둔전에 대한 일반 농민의 경작을 허락하였다. 또한 관제를 개혁하였으며, 《천하도(天下圖)》 《무정보감(武定寶鑑)》이 만들어졌고,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진하게 하였다. 한편 남이(南怡)의 옥(獄)이 일어났으며, 69년 4월에는 민수사옥(閔粹史獄)이 일어났다. 능은 경기도 고양(高陽)에 있는 창릉(昌陵)이다. 시호는 소효(昭孝). 시호 양도(襄悼). |
영종英宗 1427~1464(37세)1457-1464(7년) |
8대는 天順 영종英宗 복위. 우겸 살해됨. 오이라트족에게 잡혀갔던 정통제가 돌아와 황제가 재등극. 새로이 년호를 천순(天順)이라고 정함. 복위한후 기강을 확립하고 법을 엄격히적용하여 천순년간은 정통시절보다 안정되었다. 6대와동일 이름은 주기진朱祁鎭 묘호는 영종英宗, 시호는 예황제睿皇帝로 년호는 천순天順. |
예종=예황제? 황제를 재등극하면 전에 왕조를 계승 아니면 또다른 세조계열의 왕조가 새출발? 예종의 생년이 두가지임. 1441년 생이면 예종이 성년이라 수렴청정이 안됨. 1450년생이면 세자 책봉이 8세임. 예종은 세조가 34세에 출생. 차남이지만 너무 늦음. 즉 대종의 경태년과 영종의천순년은 세조의 년대와 겹침. 예종과 대종은 행적이 불확실하며 끼워넣은듯한 느낌을 지울수없음. |
|
성종成宗1457년∼1494 (37세),재위 1469∼1494(25년) |
조선 9대왕, 이름은 혈()이고, 1461년(세조 7)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가 1468년 잘산군(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못되어 덕종이 죽자 세조가 궁중에서 키웠는데, 천품(天稟)이 뛰어났으며 도량이 넓고 사예(射藝)와 서화(書畵)에도 능하여 특히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 세조의 손자이고, 덕종의 둘째아들이다. 85년 세조 때부터 편찬하여 오던 《경국대전》을 완성, 반포. 이어 92년 《대전속록(大典續錄)》을 완성하여 법제를 완성. 1470년에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 국가에서 경작자로부터 직접 조(租)를 받아들여 관리들에게 현물 녹봉을 지급하였다어느날 뢰우(雷雨)가 몰아쳐 옆에 있던 환관(宦官)이 벼락을 맞아 죽자 모두 정신을 잃었으나, 그의 얼굴빛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고 세조는 그가 태조를 닮았다고 하였다.1469년(예종 1)에 예종이 죽고 그 아들이 아직 어리자, 정희대비(貞熹大妃:世祖妃)가 한명회·신숙주(申叔舟) 등 대신들과 의논하여 형 월산군(月山君)의 몸이 허약하므로 그를 왕위에 계승하게 하였다. 1469년 예종이 죽자 13세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 뒤 7년 동안 정희대비(貞熹大妃;세조의 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76년(성종 7) 비로소 친정(親政)을 실시. 37에 붕어. 릉은 선릉(宣陵)이다. 시호는 강정(康靖). |
헌종憲宗 1464-1487(23년) |
제9대는 주견심 년호는 성화(成化) 시호는 헌종(憲宗). 귀빈민씨와 환관내시들에게 빠져서 헤롱거린 나머지 정치를 망쳤다고 함. 23년동안 기록이 많이없음. |
성종의 형 덕종 세종의 장자. 덕종=명헌종. |
|
효종孝宗 1470~1505(35세)1487-1505(18년) |
제10대는 이름은 주우탱, 우당. 년호는 弘治, 시호는 효종(孝宗). 재위는 18년. 어린 시절은 어려움이 많았으나 영민하여 18세에 즉위. 명나라 전체에서 가장황금기를 맞앗던시기이고 마지막 황금기. 홍치가 현명하고 정치를 잘했기때문에 명나라는 태평성대. 홍치제는 칫솔의 발명자로도 알려짐. 홍치제가 동물뼈에 솔을박아 이를 닦은게 칫솔의 기원.36세의 젊은나이에 운명. 전대(前代)의 유신(遺臣)·환관(宦官)의 개입을 물리치고 서부(徐溥)·유건(劉健)·마문승·유대하(劉大夏) 등의 명현(名賢)을 기용, 강기숙정(綱紀肅正)을 단행. 《대명률(大明律)》을 개정하여 《문형조례(問刑條例)》를 반포하였고 《대명회전(大明會典)》을 편찬하는 등 법규를 정비하여 내정에 치적. 북방민족의 침입도 없었으며 외정(外政)에도 성공을 거두어 명나라 중흥의 영주(英主)가 되었다. 시호는 경황제(敬皇帝). 묘호는 효종(孝宗). |
성종=효종. 성종과 헌종의 재위기간 유사하고 명효종과는 치적이 비슷함. 즉위년령이 성종은13세,명효종은 18세. 성종과 명효종의 년령도 유사. 명헌종의 기록이 많이 없는걸 보면 성종의 형 덕종과 겹쳐짐. 경국대전반포=문형조례반포,대전속록완성=대명회전편찬. | ||
|
연산군燕山君 1476~1506(30세)1494∼1506(12년) |
조선 제10대왕으로 휘는 '융'. 성종의 아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 중종이 있었으나 1483년(성종 14)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에 중종은 출생전이라 그의 무도함에도 세자로 삼았다 한다. 1494년 12월에 성종의 승하와 즉위, 재위 12년 동안 너무도 무도한 짓을 많이 하였으므로 폐위.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두 사람의 폐주 (廢主) 가운데 한 사람이며, 따라서 《선원계보 璿源系譜》에도 묘호와 릉호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 그리고 그의 재위기간의 실록 역시 《연산군일기》로 통칭된다. 즉위 후 록도(鹿島)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고 건주야인(建州野人)들을 회유, 토벌하는 등 국방에 주력하였다. 또한 사창(社倉)·상평창(常平倉)·진제장(賑濟場)의 설치, 빈민의 구제, 사가독서(賜暇讀書)의 부활, 《경상우도지도(慶尙右道地圖)》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명가집(東國名歌集)》의 간행과 《속국조보감》 《역대제왕시문잡저(歷代帝王詩文雜著)》 《여지승람(輿地勝覽)》의 완성. 4년째부터는 드디어 패악한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구실로 무오사화(戊午士禍), 사림파(士林派)를 대량으로 숙청. 갑자사화(甲子士禍), 후궁들과 김굉필(金宏弼) 등 제신들을 학살. 1506년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이 쿠데타, 성종의 2남 진성대군(晉城大君;중종)을 옹립 중종반정(中宗反正), 군(君)으로 강봉되어 강화(江華) 교동(喬桐)에 유배, 그해 11월에 붕. |
무종武宗 1491~1521(30세)1505∼1521(16년) |
제11대는 이름은 주후조厚照 년호는 정덕(正德)이고 묘호는 무종(武宗). 홍치제(弘治帝)의 장남으로, 14세에 즉위한 뒤 정치는 환관, 특히 악명 높은 유근(劉瑾)을 신뢰하여 그에게 맡기고 자신은 여색을 즐기는 등 상궤(常軌)를 벗어난 행위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라마교에 빠져 자신의 호를 <대경법왕(大慶法王)>이라고까지 했다. 그 뒤 정치적 실권은 유근이 쥐었고, 정의파는 쫓겨났다. 압정에 백성들은 각처에서 봉기했고, 황족들의 난도 일어났다. 해외에서는 포르투갈사람들이 건너오기 시작하는 등 명나라는 안팎으로 중대한 사태를 맞이했다. 호수에서 물놀이 낚시를 즐기다가 잘못하여 호수에 빠졌는데, 그것이 원인이 되어 이듬해에 죽었다. 시호는 의황제(毅皇帝). |
연산군은 무도, 명무종은 실정. 둘다 선대의 영광을 까먹음. 연산군은 18세에 등극, 명무종은 14세 등극. 연사군은 강화교동에 류배.명무종은 물에서 사망. 연산군은 쿠데타로 실각 무종은 황족의난으로 위태. |
|
중종中宗1488∼1544(56세),재위 1506∼1544(38년) |
조선 제11대왕. 재위 1506∼1544. 이름은 역. 자는 락천(樂天). 성종의 차남.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반정공신의 위훈삭제문제(僞勳削除問題)를 계기로 기묘사화를 일으켜 신진사림세력을 숙청. 그 후 정치적인 혼란과 옥사 등이 계속. 21년 송사련(宋祀連)의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安處謙) 등의 사림파가 숙청되고 24년 권신 김안로가 파직,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의 전주. 25년 유세창(柳世昌)의 모역사건, 27년 작서(灼鼠)의 변이 일어나 경빈박씨(敬嬪朴氏) 폐위 등 훈구파 상호간의 정권쟁탈전으로 정국은 더욱 혼란해졌다. 훈구세력과 신진사림세력의 갈등, 남왜북로(南倭北虜)에 시달렸다.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일대는 막대한 피해.북방 국경지대의 야인(野人)의 침구도 빈번. 1512년 야인이 갑산(甲山)·창성(昌城) 등지에 침입 인마를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의 침입. 릉은 경기도 광주(廣州) 정릉(靖陵)이다. |
세종世宗 1507~1566(59세)1521∼1566(45년) |
제12대는 주후총 년호는 가정(嘉靖) 묘호는 세종(世宗). 미신을 지나치게 믿었다고 전해짐. 가정제는 홍치제의 동생 흥헌왕(興獻王)의 맏아들로 부친의 뒤를 이어 호북湖北 안륙주安陸州의 번왕藩王, 무종(武宗)이 후사없이 죽자 선위. 즉위초 열의를 가지고 전대(前代)의 폐정(弊政)을 일신하려 했으나 <대례(大禮)의 의(義)>가 발생하자 중신들과 대립하여 정치에 대한 의욕을 상실. <대례의 의>란 황제가 누구의 뒤를 잇는 것이냐는 문제와 관련하여 아버지 흥헌왕의 예우할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예제상(禮制上)의 론의였다. 홍치제의 후대이기 때문에 생부를 황숙이라고 칭해야 한다 아니다 그건 인륜에반하는 행위라며 싸우다가 결국 부친이라고 칭하는쪽이 승리. 이 론쟁은 황제가 대권(大權)을 발동, 반대파를 탄압하여 종결, 많은 관료가 희생되고 황제의 뜻을 따르는 자만이 발탁되는 등 관계(官界)질서가 문란해지고 정국을 불안정. 북로남왜의 화라고 해서 북방의 이민족들과 왜놈 해적들이 명 해안을 노략질. 특히 북방 이민족들이 침입하고 반란, 나라가 혼란. 이때 이름을 날린사람이 척계광이라고해서 복건과 절강에서 날뛰는 원숭이 왜구들을 무찌르는데 큰공을 세웠습니다.특히 1541년(가정 20) 이후 황제는 서원(西苑)의 만수궁(萬壽宮)으로 옮겨가 대신들을 접견하지도 않았으며 도교에 빠져 정무를 전혀 돌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대학사(大學士) 엄숭(嚴嵩)이 독단으로 정치를 하여 환관들의 전횡(專橫)을 허락하였으며 국세는 차츰 기울어졌다. 이와 같은 그의 치세에 정치는 문란해지고 사회불만은 증대했으며 사풍(士風)도 퇴폐했으나, 문화적으로는 문학에 리반룡(李攀龍)·왕세정(王世貞), 서화에 문징명(文徵明)·동기창(董其昌) 등이 나타난 일종의 황금시대였다. 또한 이 시대부터 만력년간(萬曆年間;1573∼1619)에 걸쳐서는 사회적 변화가 커서 사회와 경제의 전환기로 생각되어 연구가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가정제는 어이없게도 어떤 도사가 준 어떤약을 먹고 죽습니다. 일설에서는 후궁의 칼에맞아 죽었다는 소리도있다. |
중종과 명세종의 생몰년대 유사. 전왕대가 그러함. 중종은 반정으로 명세종은 숙부인황제가 후사가없어 즉위, 중종은 각종사화로 관료 희생 대례의 의로 관료희생. 종종 남왜북로=북로남왜 국경혼란. 사회혼란의 전환기로 연구대상이라는 건 후에 의종을 말제로 명 멸망.1510년 삼포왜란=녕하寧夏의 안화왕(安化王), 란. 유근 살해.1519기묘사화 조광조 사사=왕수인(王守仁), 녕왕(寧王)의 란 평정,1527년작서(灼鼠)의 변=왕수인, 양광만(兩廣蠻) 평정 |
|
인종仁宗1515∼1545(30년),1544∼1545(1년) |
조선 제12대왕. 이름은 호. 자는 천윤(天胤). 중종 장남.1520년(중종 15) 세자로 책봉되어 25년간 세자의 자리에 있다가 1544년 즉위하여, 이듬해 기묘사화로 파방된 현량과(賢良科)를 복구하고, 조광조(趙光祖) 등의 기묘명현을 신원. 자는 천윤(天胤). 이름은 호(岵). 어머니는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 3살 때부터 글을 읽었으며, 근검한 생활. 형제간에 우애가 깊어 27년 서형(庶兄)인 복성군(福城君) 미(嵋)가 그의 어머니 경빈(敬嬪) 박씨(朴氏)의 교만으로 모자가 귀양을 가자 석방을 청하는 소를 올림. 또한 효심이 깊어 중종의 병이 중해지자 친히 간병. 45년 병으로 위독해지자 8개월만에 붕. 아우인 경원대군(慶源大君) 환(뒤의 明宗)에게 전위, 자녀가 없음. 외사촌인 윤흥인(尹興仁)·윤흥의(尹興義)에게 장사를 감호(監護). 계모인 문정황후가 독이든 떡을 먹여 죽었다는 야사가 있다. 릉은 효릉(孝陵). |
인종은 명세종의 년대 | ||
|
명종明宗 1534~1567(33세)1545∼1567(22년) |
조선 제13대왕. 이름은 환, 자는 대양(對陽).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당시에 12세였던 명종이 즉위.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이 득세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윤임일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견제하고 왕권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리량(李樑) 부자를 기용, 오히려 파벌을 조장하여 정치적 혼란과 당쟁은 더욱 심화. 결국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실각할 때까지 명종은 외척의 전횡 속에서 불안정된 세력기반. 1567년 34세로 죽었다. 명종의 재위기간에는 을사사화, 도적 임꺽정[林巨正] 일당의 창궐, 55년의 을묘왜변(乙卯倭變)과 여진족의 침입. 이에 1510년(중종 10) 설치된 비변사를 상설기구로 승격 군사문제를 총괄. 수차(水車)가 제조 간행사업이 실시.《속무정보감(續武定寶鑑)》 《경국대전(經國大典)》 원전과 속전이 간행. 릉은 경기도 양주의 강릉(康陵)에 예장되었다. 시호는 공헌(恭憲). |
목종穆宗재위 1566∼1572(6년) |
제13대는 이름은 주재후 시호는 목종(穆宗) 년호는 륭경(隆慶), 릉은 소릉(昭陵), 북방 이민족의 지도자인 알단칸과의 화의를맺어 일단 북로즉 북방오랑캐들의 남침을 막는데 성공. |
즉위년도 비슷. 세종년대부터 남왜북로에 시달림. 명종의 년대는 내우외환으로 난세. 목종의 기록은 빈약하고 북로를 막는데 전력. 왕조의 말기현상. |
|
선조宣祖 1552 ~ 1608(56세)1567∼1608(41년) |
조선 제14대왕. 초명은 균(釣), 뒤에 공으로 개명.1552년 11월 11일 한성(漢城) 인달방(仁達坊)에서 출생. 중종의 손자,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초13)의 삼남,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16세에 즉위,1575년(선조 8)에 이르러 김효원(金孝元)·심의겸(沈義謙) 당쟁이 시작 동인(東人)·서인(西人)으로 분당, 1591년 세자책봉문제로 집권한 동인도 서인들에 대한 논죄문제로 남북으로 다시 분열, 국력쇠약.1583년과 1587년 2회에 걸쳐서 니탕개(尼蕩介)가 주동이 된 야인(野人)들 반란,경원부 함락. 온성부사 신립(申砬),첨사 신상절(申尙節) 등 소탕. 임진년 왜군이 보름 만에 수성(守城)의 포기, 개성으로 퇴각. 왜가 한강을 도강, 다시 평양 퇴각. 다시 의주로 피난. 1593년 10월 환도. 정유재란1597년 왜란중에 3궁(三宮)이 소진, 춘추관(春秋館)소실, 운각(芸閣)에 보관. 임진왜란 중에 군공軍功을 세운 자나 납속納粟한 자는 론공할 때 공명첩空名帖이나 실직實)을 수여, 조선 후기 신분변화의 계기. 왜란후 흉년이 거듭되고 동인·서인의 당쟁이 격심. 릉은 목릉穆陵. 전殿은 영모전永慕殿. 시호는 소경昭敬. |
신종神宗 1563 ~ 1620(57세)1572∼1620(48년) |
제14대는 주익균朱翊鈞 시호는 신종(神宗), 년호는 만력(萬歷). 임진왜란때 원군파병.13대 륭경제(隆慶帝)의 삼남으로 1568년 황태자, 륭경제가 급사한 뒤 10세의 나이로 즉위. 그 때문에 선제(先帝)의 부탁을 받아들여서 대학사(大學士) 장거정(張居正)이 수보(首輔)가 되어 정무 전반을 집행. 장거정은 성격이 강직, 정책수완도 명나라를 대표하는 명재상(名宰相), 신종에게는 엄격한 스승. 1582년에 그가 죽자 황제는 향락 사치에 빠짐. 환관을 전국에 파견 은광(銀鑛) 등을 개척, 또 상세(商稅)를 더 늘려서 징수. 소주蘇州와 산동山東의 림청臨淸 등에 민변(民變)이 계속, 이에 앞서 1592년에는 오르도스의 보바이鄂爾多斯 懘拜가 반란, 1597년에는 귀주貴州,파주播州의 토관土官 양응룡楊應龍이 반란. 豊臣秀吉이 임진왜란을 일으키자 거기에 구원군을 파견. 이들을 가리켜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이라고 함. 군비조달 위해 임시 증세增稅를 단행, 광세鑛稅 문제,황태자 책립문제 등으로 동림파(東林派)와 비동림파(非東林派)의 당쟁이 격화, 정치공백이 생겨서 명은 단숨에 쇠운. 릉묘는 정릉定陵, 1956∼57년에 걸쳐서 발굴, 지하궁전으로 알려져 있음. 시호는 현황제顯皇帝. |
춘추관소실은 력사가 종료됨을 의미함. 선조는 명종의 후사가없어 16세에 등극, 명신종은 륭경제가 급사후 10세에 즉위. 즉 조선세조후 왕조가 몰락함. 명신종이 은광을 개척하고 상세 즉 법인세를 올린건 재정부족 때문. 망쪼가 들면 재정부터 고갈됨. 동인,서인=동림파,비동림파, 당쟁으로 국은 쇠약. 애신각라 노이합적 중원 장악. 선조는 명신종과 짬뽕, 광해군은 비운의 황제 명희종. |
|
광해군光海君 1575(선조 8)~1641(인조 19)(66세)1608∼1623(15년) |
조선 15대왕.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피난지 평양平壤에서 세자에 책봉된 후 분조分朝를 설치하고 함경도·전라도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군량미의 조달 등으로 난의 수습을 위해 힘썼다. 1616년 후금(後金)을 건국. 그 강성에 대비 대포를 주조, 평안감사에 박엽(朴燁), 만포첨사에 정충신(鄭忠臣)을 임명, 국방을 강화 명나라의 원병요청에 따라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여명을 주어 명과 련합, 부차(富車)싸움에서 패한 뒤 후금에 투항. 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광해군으로 강봉 강화에 류배되었다가 제주濟州에 이배되어 붕. |
광종光宗 1605∼1620()1619~1619(1달) |
제15대는 주상락 시호는 광종(光宗) 년호는 태창(泰昌) 황제에 오르고나서 한달만에 사망. |
광해군=광종=희종, 살이호는 안휘성 회수의 지류 |
|
희종熹宗 1605~1627(22세)1620∼1627(7년) |
제16대 주유교朱由校 시호는 희종(熹宗) 년호는 천계(天啓), 만력제의 손자. 간사한 내시 위충현을 총애, 위충현의 세도와 전횡으로 나라가 기움. 위충현에게 만세대신 구천세를 외치게했다한다. 명은 이로서 멸망의 길을 걷는다. 살이호薩爾滸 전투. 명군 대패. 제15대 태창제(泰昌帝)의 아들. 즉위 전후에 일어난 정격(挺擊;1615년 황태자, 즉 후일의 태창제 암살미수사건), 홍환(紅丸;태창제가 붉은 환약을 먹고 죽은 일), 이궁(移宮;천계제를 양육하고 있던 이선시를 귀비로 승격시켰으나 반대하는 관료가 그녀를 별궁으로 옮긴 일) 등의 3사건을 둘러싸고 동림(東林)과 비동림의 당쟁이 격화 국론이 분분하였다. 황제는 목공(木工)과 칠공(漆工) 등의 재미에 빠져 정치를 측근 환관 위충현(魏忠賢)에게 맡겨 환관의 전횡으로 동림당에 대한 대탄압이 자행되었다. 재위중 료동遼]의 만주족, 산동山東의 백련교도白蓮敎徒 서홍유徐鴻儒, 사천四川의 소수민족 사씨奢氏 등의 반란이 계속 일어났다. 시호는 철황제哲皇帝. |
강호립이 투항한건 광해군=명희종의 장수였으나 강홍립은 신세력 청에 귀부했다. 청태조 누르하치 즉 조선의 인조?는 강홍립을 후사했고 조선아니 명은 몰락하고 말았다. 광해군의 행적은 명의 행적이며 광해는 불운의 왕이 되고말았다. 광해군이 류배지에서 사망한거와 희종이 죽는것은 말왕의 비애이자 동일인의 행적이다. | ||
|
영창대군 1606(선조 39)~1614(광해군 6)(8세) |
선조의 아들. 이름은 의懿. 1613년(광해군 5) 서양갑(徐羊甲)·박응서(朴應犀) 등의<칠서(七庶)의 옥(獄)>이 발생, 대북파 리이첨(李爾贍) 등은 이들에게 영창대군 추대음모를 조작하여 고변(告變)하도록 사주(使嗾)하였다.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 강화(江華)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이듬해 대북파의 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증살(蒸殺). 23년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
의종毅宗 1610~1644(34세)1628∼44(16년) |
숭정제를 마지막으로 명나라는 멸망. 리자성이 북경을 점령하자마자 후금(청)나라가 쳐들어와서 북경을 함락, 리자성을 멸망. 숭정제는 왕자들을 녀자분장시켜서 피난시키고 자신은 자살. 뒤에 남명으로 개칭. 명나라의 잔당들이 남쪽에 나라를 세우지만 청에게 멸망. |
겨우겨우 버티던 명이 멸망했다. 명은 조선 세조이후의 또다른 명일수 있다. 1616년 누르하치는 후금의 황제로 등극한다. 다음해 강홍립이 항복한다. 그리고 23년 인조반정을 있다. 누르하치가 명실공히 조선의 황제가 된것이다 또 다른 조선 청靑?. 인조는 누르하치?. 그리고 3년뒤 누르하치는 사망한다. |
|
강홍립이 항복하던 1619년 명은 두명의 왕이 교체가 된다. 신종,광종이 죽고 희종이 즉위한다. 광해군이 축출된 4년뒤 말왕 崇禎제 의종(毅宗)이 즉위한다. 이해가 1627년 정묘호란이 있던해다. 누르하치가 허새비 왕을 교체한거다. 말기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명에서는 위충현(魏忠賢) 처형되고 각지에서 농민반란 발생했다. 그래서 명의 왕들이 그해 두번이나 바뀌었다. 조선은 1936년 병자호란으로 종말을 고한다. 즉 또다른 조선, 明이 끝나는 해이다.
누르하치는 애신각라 노아합적 愛新覺羅 奴兒哈赤이다. '아이신지료 누르하치'인데, '아이신愛新'은 '금(金)'을, '지료覺羅'는 '겨레(族)'를 뜻한다. 금족이 아니라 김족이다. 즉 김씨의 나라란 말이다. 청靑이 후금後金이다. 김씨의 후손이란 말이다. 애신각라..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말라는 말이다. 천년 신라제국을 계승한다는 말이다.
이 누르하치가 임진왜란때 조선의 선조에게 왜구소탕을 자청한다. 그러나 선조는 거절한다. 왜그랬을까? 왜군이 한성을 불태우고 선조를 쫓아 비내리는날도 쪽팔리게 도망을 했던 선조다. 그런 선조가 군사지원을 거절한다.
그후 아들 광해군은 제왕의 칭호도없이 력사속으로 사라진다. 또다른 조선, 명은 그렇게 몰락하고 또다른 조선 청의 황제 누르하치가 등극한다. 김함보의 8대손, 고려인 김극수의 아들 금金태조 완안 아골타(完顔 阿骨打)가 금태조. 누르하치는 아골타의 16대손이다. 누르하치가 완안에서 애신각라로 성을 바꾼다. 먼가 약속을 어긴듯하다. #$%&*? 성을 갈았으니... | ||||
출처 :한겨레참역사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