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나오는 청국(淸國)과 달단(㺚靼)
인조 24년(1646년) 12월 22일(갑오) 1번째 기사
역관 이형남·한상국을 파견하여 왜사를 따라가 대마도주를 위문하게 하다
<번역문(飜譯文)>
역관(譯官) 이형남(李亨男)·한상국(韓相國)을 파견(派遣)하여 왜사(倭使)를 따라가 대마도주(對馬島主)를 위문(慰問)하게 하였다.
【 도주(島主)가 강호(江戶; 에도)에 가서 오래 머물다가 대마도(對馬島)로 돌아왔기 때문에 사신(使臣)을 파견(派遣)하여 그가 먼 길 다녀온 것을 위로(慰勞)하였다.】
당초(當初) 왜사(倭使)가 온 것은 전적(全的)으로 치조(致吊)하기를 바라서인데,【 도주(島主)가 새로 모상(母喪)을 당했기 때문에 이른 것이다.】 조정(朝廷)이 내간상(內艱喪)에는 조문(弔問)한 그전의 규례(規例)가 없고 뒷날의 폐단(弊端)만 있다고 여겨 허락(許諾)하지 않았다.
귤왜(橘倭)가 일찍이 연향(宴享)을 인해서 민응협(閔應協)·임중(任重)에게 묻기를,
“달단(㺚靼)이 벌써 북경(北京)을 차지하고 남경(南京)의 이 장군(李 將軍)이 패배(敗北)하였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 바로 이지성(李志誠)이다.】 그리고 병자년(1636년) 난리에 왕자(王子)가 사로잡혔다고 하던데, 국왕(國王)과 왕자(王子)가 함께 같은 곳에 있습니까? 왕자(王子)는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했습니까? 그리고 사신(使臣)과 폐백(幣帛)의 숫자는 한결같이 명(明)나라를 섬기던 때와 같이 합니까? 달단(㺚靼)이 순치(順治)로 기원(紀元)한다고 하는데 조선(朝鮮)에서는 지금 무슨 연호(年號)를 씁니까?”하였는데,
민응협(閔應協) 등(等)이 말하기를,
“당초(當初) 표류(漂流)했던 왜인(倭人)을 들여보낼 때의 우리 나라 서계(書契) 가운데 청국(淸國)에서 보낸 것이라고 말을 하였소. 회답(回答)하는 서계(書契) 가운데 달단(㺚靼)이란 두 글자가 있어 바야흐로 이상(異常)하게 여겼는데, 이번에 또 달단(㺚靼)에 대하여 물으니, 이른바 달단(㺚靼)이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바이며 어느 나라를 가리켜 말한 것인지 모르겠소”하니,
귤왜(橘倭)가 말하기를,
“명(明)나라를 더러 강남(江南)이라고 일컫기도 하며 조선(朝鮮)을 더러는 고려(高麗)라고 일컫기도 하니, 이것은 역시(亦是) 서로 호칭(號稱)하는 말이오”하므로,
민응협(閔應協)이 말하기를,
“양국(兩國)의 서계(書契)에 더러는 청국(淸國)이라고 쓰고 더러는 달단(㺚靼)이라고 써서 크게 서로 같지 않으니, 모름지기 곧바로 고쳐 쓰는 것이 옳겠소. 그리고 우리 나라의 서계(書契)를 그대들이 늘 고쳐서 써주기를 바라면 조정(朝廷)이 굽혀서 따라주지 않은 적이 없었소. 그런데 그대 나라의 서계(書契)는 어찌하여 두어 글자 고치는 것을 아끼시오”하자,
귤왜(橘倭)가 말하기를,
“서계(書契)는 모두 도춘(道春)의 손에서 나오는데 도주(島主) 역시 한 글자도 고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들이 어떻게 멋대로 고칠 수 있겠소. 귀국(貴國)이 만약(萬若) 받지 않으면 의당(宜當) 가지고 돌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또 서계(書契)를 이미 전한 뒤에는 한 장의 휴지(休紙)가 되는 데 불과(不過)한데 장차(將次) 어느 곳에 보이려고 합니까?”하고,
【 조정(朝廷)이 왜(倭)의 서계(書契)를 북경(北京)에 알리려고 하였기 때문에 임중(任重)이 내려 갈 때에 그로 하여금 타일러서 그 두 글자를 고치도록 하였는데 왜(倭)의 답(答)이 이와 같았다.】
귤왜(橘倭)가 또 말하기를,
“우리는 처음에 달단(㺚靼)을 청국(淸國)의 총칭(總稱)으로 여겼을 뿐인데, 지금(只今) 이 말을 들으니 우리도 또한 청국(淸國)으로 호칭(呼稱)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청국(淸國)이 왕자(王子)를 잡아간 것은 무슨 일 때문입니까?”하니,
민응협(閔應協) 등(等)이 말하기를,
“처음에 화친(和親)을 핑계 대고 왔다가 이런 뜻밖의 거사(巨事)가 있었으며, 그 뒤에 왕자(王子)는 곧바로 돌아오셨고 지금(只今)은 이미 세상(世上)을 떠나셨소.”하였다.
(後略)
<원문(原文)>
甲午/遣譯官李亨男、韓相國, 隨倭使問慰對馬島主。【島主往江戶, 久而還島, 故遣使慰其行役也。】 當初倭使之來, 專請致弔,【島主新遭母喪故云。】 朝廷以爲, 內喪弔問無前規, 有後弊不許。 橘倭嘗因宴享, 問于閔應協、任重曰: “㺚靼旣得北京, 南京、李將軍見敗云, 然耶?【卽李志誠也。】 丙子之亂, 王子被執云, 國王與王子, 同在一處耶? 王子尙今未還耶? 使价、幣帛之數, 一如事大明之時耶? 㺚靼以順治紀元云, 朝鮮今用何年號耶?” 應協等曰: “當初漂倭入送時, 我國書契中, 以淸國所送爲言。 而回答書契中, 有㺚靼二字, 方以爲怪。 今番又問㺚靼, 所謂㺚靼, 曾所未聞, 未知指何國而言乎?” 倭曰: “大明或稱江南, 朝鮮或稱高麗, 此亦互相稱號之語也。” 應協曰: “兩國書契, 或書淸國, 或書㺚靼, 大相不同, 須卽改書可也。 且我國書契, 爾等每請改書, 而朝廷無不曲從。 爾國書契, 何惜數字之改乎?” 倭曰: “書契皆出於道春之手, 島主亦不得改一字。 況俺等何可擅改? 貴國若不受, 則但當持還而已。 且書契旣傳之後, 不過爲一休紙, 將欲示之何處乎?”【朝廷欲以倭書契報知北京, 故任重下去時, 使之開諭, 改其二字, 而倭答如此。】倭又曰: “俺則初以㺚靼爲淸國之摠稱耳。 今聞此言, 俺亦當以淸國稱之。淸國之拘執王子, 未知因何釁耶。” 應協等曰: “初稱和親而來, 有此不意之擧, 其後王子卽還, 今已卒逝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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