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선의 주자가 되고 싶었고,기호학파의 거두였으며,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그리고 그는 주자(朱子)를 닮고자
는 마음에 주자대전을 모방해 송자대전을 남겼다.조선의 후기 대성리학자 였다는 우암(尤庵) 송시열은 조선의
청주(淸州) 화양동(華陽洞) 지역에 은거하며 제자들과 함께 서인들이자 노론들의 분신을 양성하는 '화양서원'을
세웠다고 한다.처음의 시작은 자신이 공부하던 암서제로 부터 시작한다.송시열을 배향했던 조선의 서원이 44곳
이상이나 되었다는 서원사들의 기록에 의한다면,조선 후기의 대단한 권력가(실력자) 송시열 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그는 유학의 최고봉인 산림(山林:수령)이기도 했다.여기서 화양을 따르는 동(洞)이 의미하는 것에는 '고을(지역)
이름 또는 동굴' 이라는 두가지 뜻을 지니고 있어 화양이란 지명에 따라오는 접미사 수준으로 보면 된다.주체는
화양에 있다.대체로 지명은 보통명사에서 시작하여 고유명사로 남는다는 것에서 부터 시작을 한다.
2, 조선사 역사지명에서 청주(淸州)란 의미는 청(淸)이나 명(明)나라의 쓰임이 동국의 다른 표현 이듯이,청주란
지명도 반도 조선의 조그만 고을인 충북의 청주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역사의 청주에는 조선의 수많은 군(郡)과
현(縣)이 소속되어 있었다.반도의 청주(조치원 배후도시)나 대전은 1904년 경부선이 건설되면서 배후 도시로
새로 생겨난 경우의 고을 이름이지 역사 조선의 청주를 이어 받은 역사 지명은 아니다.역사의 청주란 지명도
조선의 다른 표현인 '동주(東州)이자 동국' 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반도의 현 청주란 고을에 송시열의 호를 딴
'우암산' 이란 산명을 지정해 놓았다고 해서 지금의 충북 청주가 송자대전의 주인공인 송시열과 연계된 화양의
청주가 되는것은 아니다.반도에서 조차 우암의 화양동은 괴산에 있지 않은가? 역사의 청주와 괴산은 다르고
그곳이 반도의 괴산이 조선의 괴산도 아니였다.조선사의 괴산은 지금의 절강성 선평(宣平)이란 대평야 지대에
있었다.
3, 문제는 여기서 화양(華陽)이란 명칭이다.화양이란 명칭의 최초 사용도 반도의 광진구 화양동도 충북 괴산의
화양동 계곡과도 인연이 없다.화양은 지금의 중국 남경이자 금릉(金陵)지역에 도읍을 정하고 있었던 동진시대
(317년~418년)의 역사학자 상거(常據)가 남경 중심의 장강 일대(파,촉)의 역사를 '화양국(華陽國)'으로 지정
하면서 생겨난 역사 지명이자 국명이다.지금의 남경인 금릉을 중심으로 건국됐던 동진(東晉)이란 나라의 이면성
도 '동국,동주,신라'와 다르지 않다.또한 당시 국명이 의미하는 범위는 도시국가 정도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여기서 말하는 '화양국(화양동)'이란 것은 지금의 남경(南京)의 정치권력의 통치가 미치는 지역 일대를 말하는
것이 되는데,역사의 화양을 지금의 소성 경부에 대한 이칭으로 보면 무난하다.이곳은 시대에 따라 많은 변천이
있었는데,'금릉->건도->건업->승주(昇州)->강녕부->응천부(應天府)->천경(天京)->남경' 등 많은 이칭을
지니고 변천을 다.
4, 따라서 조선의 송자였던 송시열과 조선국 노론들의 본거지인 화양서원이 있었던 곳은 화양이란 지역에 있었던
것이 자명한 것이다.바로 그곳의 화양서원에 그 유명한 친명 사대의 상징이자 송시열의 유언으로 제자 권상하가
세운 '만동묘 (萬東廟)'도 당연히 있었고 또 있어야 한다.그러나 송시열과 권상하는 반도의 청주나 괴산에 온적이
없다고 스스로의 문적들에서 밝히고 있다.그것도 '거대한 제실과 수많은 학당(강당),서제는 물론 문하생들의 숙소와
배후 마을' 까지 갖춘 도시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당시가 농본주의 사회였고 서원에는 서원전답(書院田畓)이
있었다.이곳은 불교의 사전처럼 수많은 농지가 배속되어 있었다.그러다 불의의 전란과 병란으로 소실됐다고 핑게를
삼는다면 깨진 주출돌이라도 많이 나와야 한다.반도 괴산의 청천면에 강제된 화양동 계곡(골짜기)에 '암서제란
작은 집과 비례부동(非禮不動)이란 글자' 를 바위에 새겨 놓았다고 해서 이곳을 18세기초 조선의 송시열과 그후예
들인 기호학파들(노론)이 세운 아지트이자 화양서원의 옛자리라고 말한다면 그건 웃기는 애기다.왕권을 능가했던
당시의 기호학파및 조선 노론의 본거지를 너무 가볍게 보는 처사다.또한 숙종에게 정면으로 대들다 사약받고 죽은
송자이자 조선의 주자였던 송시열을 너무 초라하게 보는 실수가 된다.
5, 조선의 정사서나 서원의 역사에 의존한다면 송시열의 화양서원은 청주의 화양동에 세워졌다고 했다.그러면
그 서원은 반도에 있어서는 안되는 서원이라고 노론 스스로가 밝혔다.그러면 송시열과 그 제자 권상하의 화양
서원은 어디에 있어야 하나?
그곳은 다름아닌 지금의 "강소성 진강시 '구용현(句容縣)' "에 있다. 이곳에는 지금도 화양서원이란 서원의 터와
서원이 있고,화양동이란 마을과 동굴도 있으며 구곡산(대모산) 아래의 명승지로 남아있다.이곳의 구용이란 명칭은
구곡산(句曲山)이란 경치좋은 산명에서 유래했는데,이곳의 산세와 산형이 '기(己)' 자형으로 고을 전체를 포근히
아늑하게 둘러싸고 있어서 생겨난 역사 화양의 지명이 생겨난 곳이다.
이곳은 천연 경승지이자 도화원기 같은 심처 요새지로 자랑하고 있는 대모산(大茅山:구곡산) 동쪽 아래 조용하고
한가한 평지에 화양서원을 세웠던 것이다.이곳에 있었던 기호파들의 화양서원 이기에 명나라 사람보다 더 친명
행세를 하는 기득의 조선인들이 나올수 있었고,명의 신종과 의종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도 구용의 화양고을이자
서원내에 세울수 있었던 것이다.
6, 지금도 이곳의 화양동 마을과 동굴은 유명한 명승지로 중국 전체에 알려져 있다.이곳이 바로 옛날 조선(동국=
청주)의 '구용'이며,지금의 남경에서 약간 떨어진 동쪽에 있다.바로 이러한 남경부 지역에 있던 송시열과 그제자
들 이었기에 그들을 보고 '기호학파(畿湖學派)'라고 했던 것이다.남경부 지역을 기(畿)로 불렀고, 그 남서 지역에
동정호및 수많은 호수로 연결된 호북과 호남지역을 호(湖)로 칭했던 것이다.송시열의 출생지였다는 옥천(沃川)도
반도가 아닌 절강성 소흥 남쪽의 '신창(新昌)'을 말하는 것이고,그가 27살때 이사해 살았다는 회덕(懷德)도 지금의
대전시 유성구 지역이 아닌 남경 서쪽이자 장강 건너 '강포(江浦)' 지역을 말한다.이곳은 한때 충주(忠州=中原=
中州=江都)로 도 불렸던 곳이다.이곳의 기호지역에서 율곡 이이의 후학들로서 명성을 이어갔던 기호학파들을
보면,'김장생,김집,송시열,송준길,조헌,권상하'등이 있었고, 반대의 '윤선거,윤문거,정엽,이경석'등도 있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조금가면 그 유명한 이율곡의 어머니가 살았고 친정이었다는 호북의 장강 연변의 강릉(江陵)땅이
나온다.반도의 강릉은 강이없어 강언덕 고을이란 뜻의 강릉이란 지명이 처음부터 생겨날수가 없는 곳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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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상선거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11.29 도움이 되셨다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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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영취산 작성시간 15.11.30 대단하십니다. 할 말이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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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상선거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11.30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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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수영 작성시간 18.01.24 10세기 이전의 국가들은 도시국가 수준이었다는 말씀에 매우 공감합니다. 그런데 신사임당의 강릉과 형주라 불렸던 강릉은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의문점이 아닐런지요... 강릉도 당연히 여러곳에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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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흑괭이 작성시간 23.04.20 상선거사님, 이 글 스크랩해서 제 네이버 블로그에도 올리려고 하네요. 대륙 강릉에 대한 고증 자료가 있으면 도움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