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를 먹으며
정혜옥
감자를 삶았다. 여섯 개의 감자는 뜨거운 불 위에서 익어가고 나는 감자의 맛을 생각하며 창가에 앉아 있다. 왜 감자가 먹고 싶었던 것일까.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빈집을 지키고 있다. 처음에는 혼자 있는 고요함이 참 좋았다. 앞산을 올려다보다가 마당을 내다보다가 책을 읽다가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차츰 따분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다물고 있는 입이 심심하였다. 누구와 말을 하고 싶기도 하고 입을 움직이며 먹고 싶기도 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상상해 보았다. 흰밥과 고기반찬, 새콤달콤한 미역무침, 아니면 찬물에 말은 물밥과 새로 담근 게장, 모두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기름진 고기며 자극적인 초고추장과 게장의 짠맛 등이 싫었다. 따뜻하고 담백한 맛. 그런 것이 먹고 싶었다.
감자를 먹었다. 단맛도 짠맛도 없는 무미건조한 맛이었다. 그러나 실증이 나지 않았다. 문득 어떤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넘치는 정겨움도 감칠맛 나는 말솜씨도 없는, 그러나 언제나 변덕이 없는 그의 둥근 얼굴이 생각났다.
그와 함께 있으면 항상 마음이 푸근하였다. 그가 씩하고 웃으면 나도 따라 웃고 내가 "이 꽃 참 예쁘지." 하면 "그래그래." "하늘이 참 파랗네." 하고 내가 말하면 "그렇군." 하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던 친구. 검은 무명 치마에 마른 풀잎을 자주 묻히던 친구, 그는 지금 어디 있을까.
내가 무언가를 붙들기 위해 안달을 부리며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개성이니 재능이미 하며 세상을 편협하게 살고 있는 동안, 그는 타작마당 위의 넓은 멍석과도 같은 자리를 만들며 살고 있었을까. 무감동, 무개성의 참뜻을 실천하며 모든 것을 수용하고 또 모든 것을 내어주는 그런 존재가 되어 있을까.
비가 그쳤다. 산정에 뭉쳐있던 안개 떼가 흩어진다. 움직이는 안개 사이로 앞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구름이 몰려오면 구름 속에 숨어있고 안개 떼가 희롱을 하면 그대로 모든 것을 내맡기고 비바람이 불어 닥치면 거친 세력 앞에 온몸이 젖어버리는, 그러나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며 말이 없는 산, 아무런 변덕이 없는 앞산의 모습은 나의 옛 친구와 닳아있다. 감자의 담담한 맛과 닮아있다. 그런 앞산을 나도 닮고 싶다.
정혜옥
(1935―2025). 경남 진주 출생, 수필가
수필집 :《대숲에는 바람소리가》,《이 세상 한가운데 서있는 소나무》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