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
박상천
뿌리 자르고 이파리 끝부분도 자르고
껍질까지 한 번 더 벗겨
깨끗하게 손질한 대파,
하얗고 매끈한 그 대파를 냉장고에 넣었다가
며칠 후에 꺼내 보면
뿌리 쪽 잘라낸 곳에서
그는 속대를 쑤욱 밀어 올리고 있다.
아, 살아있었음.
잘라낼 거 잘라내고
한 꺼풀 껍질까지 벗겨
보기 좋게 손질해놓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사람들을 만나고
실실 웃으며 TV를 보고
자판을 두드리며 일을 하는 사이,
그는 날카로운 칼질을 비웃으며
슬금슬금 속대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
자기애 또는 내면의 외로움이라는 꽃말을 가진
수선화과의 대파는 그렇게 살아있다.
시집 『어느 시골 정류장에 앉아 있겠다』 2026.6
박상천|1955년 전남 여수 출생. 198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사랑을 찾기까지』『말없이 보낸 겨울 하루』『5679는 나를 불안케 한다』『낮술 한잔을 권하다』『그녀를 그리다』 등. 현재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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