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그날 이후로 / 이창기
ㅡ 장석남에게
하루만 지내보면 알겠지만
네가 보고 가라며 붙잡던
창호지에 번진 아침은
잘 굽어보고
네 창가에 그대로 두었다
삐뚜름한 네 집 마당에
제멋대로 키우고 싶다던 수탉의 울음과
그 털북숭이 어린 개가 낳을 새끼는
미리 가져간다 대신
밤새 다 풀지 못한 생각들은
답례 삼아
방 안 가득 어질러놓았다
동틀 무렵의 푸른 밀밭이라는
고흐의 그림이 있는 돌돌 만 한미은행 달력과
기모노를 단정히 차려입은 춘원(春園)은
깜박 잊고 택시에 두고 내렸으니
찾지 말아라
참 그날 이후로
미당(未堂)을 만났다는 사람은 없으니
너무 궁금해하지 말고
속옷 차림으로 목욕물 받듯
목욕물 받다 고운 후배 안부 전화받듯
다정하게 들락거려라
- 이창기,『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문학과지성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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