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미
안영해
아침 일찍 큰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청원유치원에
다니는 셋째 손자 체육대회란다. 주성전문대에서 10시에
열리니 준비하셔서 같이 가자고 한다. 귀여운 손자의 재롱
잔치만 생각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아무생각 없이 따라나
섰다. 차에서 내리니, 날씨가 추워서 온몸이 기를 펼 수가
없다. 갑자기 추우니까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손자가 염려
되어 눈치를 살피면서도 좋아하는 모습에 마음을 놓는다.
씩씩하게 자라기를 속으로 빌면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추위가 염려되어 몸보다 마음이 더 떨린다.
시작시간이 가까워지니 단상 위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나
며, 단상을 중심으로 바른쪽은 홍군자리 왼쪽은 청군자리
로 지정해 준다. 지시대로 홍군 편에 자리를 마련을 하고,
가능하면은 햇볕을 찾아 자리마련을 하였다. 각 편에 응원
대장이 선두에 서서 기(旗)를 휘두르며 응원을 한다. 젊은
엄마들은 소매 없는 옷을 입고도 추워 보이지 않은데 나는
떨고 있으니 많이도 늙었나보다 청춘인 듯 살았는데 손자
체육대회에 와서 많이 늙은 할미가 되었음을 느낀다. 손자
재롱잔치에 와서 덤으로 나의 늙은 모습이 환하게 비치는
거울 하나를 얻은 셈이다.
일기 탓도 있지만 귀염둥이들은 어미 닭 품속의 병아리
처럼 엄마 품속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듯이 떨어질 줄을
모른다. 어미와 자식 간의 사랑의 탯줄은 영원히 끊어지지
않으리라.
지시자의 말씀에 따라 엄마와 함께 경기가 이루어진다.
홍군편의 유치원생, 반대편의 청군 유치원생이 엄마와 같
이 반환-점을 돌아오는 경기를 하면서 웃음바다가 펼쳐진
다 잘하는가 싶더니 배턴을 떨어뜨려서 어이없는 상황에
서 더 웃고, 환호한다. 이기고 지는 것을 초월하여 부모자
식이 한마음 되는 경기이리라. 웃기도하고, 애석해하면서
다치지 않기를 빌고 있었다.
꿈나무들의 경기를 보면서 나의 유년시절이 생각난다.
운동회 때 달리기를 못해서 등수는 고사하고 꼴찌나 안 했
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먹거리도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
옥수수, 고구마가 간식의 주류를 이루었었다. 그러면서도
주고받는 정은 지금보다 훨씬 돈독했던 것 같다. 나의 어
머니도, 옥수수나 고구마를 머리에 이시고 오셔서, 이웃한
테 항상 후하게 나누어주셨다. 지금은 그 때 보다 더 풍요
롭지만, 내 자식이나 나만 챙기는 풍요 속에 빈곤시대가
아닐는지. 지금이나 옛날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은 자식들
의 행사는 부모역할 전시장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자식에 대한 애착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남 보기도 추워 보였는지, 딸이 가까이 오더니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서 입혀준다. 그리고 목도리도 감아준
다. 이제 보호를 받아야하는 할미가 된 것이 틀림이 없다.
내가 딸을 데리고 다니던 위치에서 손자와 함께 딸의 보호
를 받는 위치임을 확인 받는 날이기도 하다.
딸아이는 너무 허약해서 운동은 못하는 것이려니 했으나
의외로 잘 띈다. 언젠가 딸의 친구가 하는 말이 생각난다.
대학체육대회 때마다 둘이서 계주를 뛰었단다. 나를 닮지
않고, 남편을 닮았나보다. 학부모 달리기에서 앞서 뛰는
딸의 모습이 너무 좋아서 할미노릇을 순간이나마 벗어 던
진 어미로서 신나는 날이기도 하다.
아들 없이 딸만 키웠어도 열 아들 부럽지 않다고 생각했
었는데 할미가 되니 생각의 틈이 생긴다 사랑의 틈이 아
니라 우리문화 우리전통, 남편의 성을 따르는 손자도 있
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끼어 든다. 몸도 늙었지만 마음도
많이 늙었나보다 어미로서 할미로서 추억을 더듬고, 나를
돌아보는 즐겁고, 보람 있는 하루다. 딸과 외손자가 어우
러지는 재롱잔치 한 마당은 내 인생의 잔치이기도 하리라.
새 문화 창조의 역군이 될 손자와 함께 생활하면서 인생의
보람, 사랑의 희열을 맛본다.
2011/ 36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