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의 비애
윤 현 수(가을들녘)
유난히 긴 장마였던 올 여름 각자 다른 길을 걸어 온
여고 동창 셋이서 진도로 여름휴가를 갔다. 나는 결혼과
함께 전업주부로 한 친구는 30년간의 교사 생활을 과감하
게 던지고 행복해 하는 퇴직 교사였다 또 한 친구는 불가
에 귀의한 스님이다.
우리는 여고시절 수학여행 때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하였
다 차창 밖에 보이는 나뭇잎들은 늦여름을 얘기하듯 한층
녹음이 짙어 있었고 총각 선생님과 선배와의 로맨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건강히 재미있게 살자며 '신비
의 바닷길'로 유명한 진도로 향했다 중간에 빛고을 광주
를 들러 해가 저물어서야 우리가 머무르고자하는 "자영의
뜰"에 도착했다.
입구에 둥글 넙적 큼지막한 돌에 까만 글씨로 “자영의
뜰"이라 새겨져 있고, 정원에는 잔디를 심어놓았고 주변에
키 큰 야자수 나무가 시원스럽게 군데군데 자리하고, 한쪽
으로는 고추, 상추, 가지 등 갖가지를 기르는 채마밭도 있
었다.
건물은 통나무 기둥을 세운 황토집으로 지어져 있었고
안으로 들어서니 큰 방 안에는 커다란 통유리로 만든 작은
방이 하나 꾸며져 있어 밖에서도 안처럼 안에서도 밖에 있
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식탁 옆에 자리한 책꽂이는 벽돌
을 세워놓고 그 위에 나무 널빤지를 올려놓은 곳에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있어 손때가 느껴지며 어딘가 정감이 갔다.
벽면에는 같은 사람으로 보이는 액자가 사방에 걸려있
고, 책 위에도 세워져 있는 사진 속의 여인은 우리의 시선
을 멈추게 했다 단정한 생머리에 입가에 모나리자의 미소
를 머금고 있었다 궁금하다. 누굴까, 딸인가. 젊어서 저
여인의 모습일까?
사진의 주인공은 오빠 딸인 자영이란다. 조카딸은 서울
대치대를 졸업하고 개원의로 지내다 마음 공부 길로 들어
섰다가 10여 년 전에 암 진단을 받고 수술 후 휴양 차진
도에 와 있다가 이곳이 너무 좋아서 집을 지었다고 한다.
자영이는 지인들과 토론하기를 좋아하여 이곳은 조카딸의
토론장이었던 곳이란다.
집주인은 가장 무도회라는 책 한 권을 주었다. 표지에는
자영이가 합장하고 빙그레 웃는 모습 밑에 '기자영 시집'
이라 적혀있다 자영이의 정신세계를 많은 사람에게 알리
고 싶어 발간한 책이라며, “태어날 때 이미 모든 것을 받
았으니 우리가 이제 할 일은 도로 내어드리는 것밖에 없다
는 생각에 동의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겁니다."라며, 모든
책들은 무료를 원칙으로 한단다. 먼저 간 조카딸이 항상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 한다며, 마치 자신을 보호
해주는 수호천사로 생각하는 듯 생과 사를 둘이 아닌 하나
로 여기는 것 같았다.
우리는 밤이 깊도록 차를 마시며 인생의 삶과 죽음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동안 무심하게 살아온
나에게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였다 지천명에 이른 나
의 인생은 무엇을 향하여 살아가는 것인가.
주인은 많이 편찮으신 분의 병문안을 가서는 “할머니 얼
른 가셔. 빛을 쫓아서 가시면 아프지도 않고 얼마나 편안
하고 좋아. 남은 우리가 할머니 보고파서 그립고 괴롭지.
걱정 말고 편안히 가셔." 라며 손을 잡는단다 이 말을 듣
는 순간 깜짝 놀랐다 어떻게 저런 말을 쉽게 할까.
아무리 힘들어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하는데 한편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겠다 싶어지면서
이것은 아마도 자신이 조카딸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홀로 쌓인 고독을 뱉어내는 것은 아닐는지 저세상도 같이
하고 싶었던 자신의 애달픔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 같아 안
쓰러운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밤이 깊어지자 창가로 이부자리를 깔아 주며 창밖을 보
란다. 네 사람은 창 쪽으로 머리를 대고 누워서 밖을 보는
데 별들이 나에게로 쏟아져 들어오는 듯 하고 풀벌레의 합
창과 신선하고 상쾌한 공기에 취하여 별빛을 쫓아서 밤하
늘 세계를 유람하였다.
2011/ 36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