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진 밭
이두희
부대 옆 철조망과 바로 인접한 곳에는 산소가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고 그 사이에 비탈진 조그만 밭이 하나 있다.
좀 더 아래쪽에는 평평하고 큰 밭도 많이 있지만 유독 작
고 비탈진 밭을 내가 주목하게 된 것은 밭을 일구는 할머
니의 모습이 농사꾼의 아들인 나에게 예사롭지 않게 보였
기 때문이다. 비탈진 밭은 빗물에 흙이 자꾸 쓸려 내려가
기 때문에 돌들이 많고 척박해 질 수 밖에 없는데 손바닥
만 한 작은 밭을 가꾸기 위해 봄볕이 따가워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거의 매일 출근을 하신다. 무심코 철조망 옆을 지
나가다 보면 '사각사각'하는 호미질 소리와 이따금 호미 날
끝에 부딪치는 작은 돌의 마찰음이 할머니의 고달픈 삶을
이야기하는 듯 가냘프게 들린다. 저만치 밭의 둔덕에는 낡
은 우산하나가 반쯤 펴진 채 서서 할머니의 굽은 등을 지
켜보고 있고 그 밑엔 새참이라도 들어있는지 바구니 하나
가 할머니 허리 펼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 흔한 햇볕가
리개 모자도 없이 머리엔 낡은 수건을 두른 채 엎드려 김
을 매시는 모습이 시골의 어머니 모습과 겹쳐져서 나의 눈
길이 자꾸 멈추어 선다.
밭에는 주로 콩과 들깨를 심으셨는데 밭 언저리를 돌아
가며 파수꾼처럼 옥수수가 자라고 귀퉁이 후미진 곳에는
호박넝쿨이 뻗어가고 있어 좁고 비탈진 곳에서도 소담스럽
게 자라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콩은 영양분이 높고 맛도 좋지만 그만큼 손이 많이 가는
농작물이다. 봄에 심어 한여름에 자라기 때문에 싹이 올라
온 후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콩밭은 잡초 밭이 되어버리기
쉽고, 적당히 북을 돋우어 주어야 습기를 타지 않아 잘 자
란다. 또 시기를 잘 맞추어 베야하고 말린 뒤 타작을 해보
면 콩깍지와 콩을 분리하는 작업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
다. 그렇게 수확을 하여 자루에 담아 놓으면 콩만큼 예쁜
곡식도 드물다. 노랗고 동글동글한 콩알은 살짝 감은 모습
의 씨눈을 달고 있어 앙큼하기까지 하다. 아마 할머니는
도회지 자식들에게 보낼 메주콩을 생각하시면서 한여름 땡
볕을 마다않고 콩밭을 매고 계신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장마가 주
춤한 사이 웃자란 콩들을 돌보러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밭에
올라오신 할머니는 평소와는 달리 허리를 펴고 밭을 멍하
니 쳐다보고 계시었다 "할머니 더우시죠?" 하고 말을 건넸
더니 할머니께서는 대답대신 콩밭을 가리키셨다 자세히
보니 간밤에 고라니가 내려와서 애지중지 키워 놓은 콩 이
파리를 사정없이 뜯어먹어 버려 앙상한 줄기와 찢어진 잎
만 몇 개씩 달려 있었다. 그 순진무구하게 생긴 동물이 어
찌하여 밭 주변에 그렇게 좋아하는 칡 나무 새순들이 지천
으로 있건만 애지중지 길러 놓은 콩잎을 골라 ‘오독 오독'
뜯어먹어 버렸을까? '이걸 어쩌나!' 하고 바라보고 있자니
나마저 화가 나기 시작하였다. 황당하기도 하고 애처롭기
도 하여 '무슨 말을 해드려야 할까?' 생각 중인데 오히려
할머니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콩 대신 고라니가 잘 안 먹
는 들깨모종을 더 심어야겠다고 말씀하신다. 그 동안 흘린
땀과 정성을 생각하면 덫을 놓거나 콩 잎에 독약이라도 발
라두고 싶으실 텐데 이것 또한 ‘자연현상의 일부분'이라고
여기시는 할머니의 달관된 생각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
다.
요즘 젊은이들은 내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해 남이야 어떻
든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참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순간적인 충동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조금 더 생각해보고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방법
을 찾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분풀이를 하던가, 아니면 스
스로를 해치고 마는 어리석음이 쉽게 행해지고 있다. 이번
과 같은 경우에도 젊은 사람이라면 콩 값의 몇 배가 들더
라도 고라니를 잡으려 하든지, 밭 주위에 높은 그물을 쳐
서 접근을 막으려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요즘 농사짓는 사람들에게는 힘들고 화나는
일들이 많다. 농사가 잘 되면 값이 폭락하여 인건비도 건
지기 어려워지고 멧돼지 고라니, 까치와 같은 야생조수가
농사를 망치는가 하면 병충해는 왜 그리 많은지 농약을 치
지 않으면 제대로 남아있는 농작물이 없을 정도이다. 오죽
하면 애지중지 키운 농작물을 트랙터로 갈아엎거나, 거두
어들인 곡식을 불로 태워버릴까?
오늘 아침 할머니의 그 담담한 미소는 어처구니가 없어
자포자기(自暴自棄)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살아오시며
몸으로 터득하신 지혜인지도 모른다. 그 상황에서 '아까운
콩이지만 다시 들깨를 심어 키우고, 콩은 이웃과 바꾸어
먹으면 되지'라고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옛말에 화는 화(禍)를 부른다'고 했다. 점점 팍팍해져 가
는 요즘 세상에서 화를 줄이려면 내 몫을 모두 찾으려하기
보다 조금 손해보고 약간 느리게 살려고 하는 자세가 필요
한 것 같다. 오늘 아침 할머니께서는 나에게 삶의 지혜'를
한 수 가르쳐 주셨다. 공짜로…
2022/36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