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왕산 명품숲길
정 금 자
강원도 평창의 발왕산 명품숲길을 다녀왔다. 해발 1,458미터, 푸른 하늘과 맞닿은 그곳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비밀의 정원 같았다. 대 자연의 웅장함과 세월의 깊이가 한데 어울어진 이 길은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길보다 바람과 구름이 먼저 드나들었을 것 같다. 산정상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발왕산으로 오르는 여정은 국내 최장 길이라는 7.4킬로미터의 케이블카를 타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케이블카는 숲 위를 미끄러지듯 날아 정상에 점점 높이 오를수록 세상의 소음은 아래로 멀어진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백두대간의 장엄한 능선이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눈앞에는 낫게 내려앉은 구름이 손에 잡힐 듯 펼쳐진다. 산허리를 감싸고 흐르는 구름은 마치 하늘이 내려준 흰 비단 같았다.
정상에 도착해 첫발을 내딛자 서늘하고 청량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 바람 속에는 도시에서 잊고 지냈던 여유와 평온이 함께 실려 있는 듯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니 가슴속까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자연은 말없이 사람을 위로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발왕산 숲길의 진정한 주인은 천년 주목들이었다. 수령이 천 년에서 많게는 천팔백 년에 이른다는 주목들은 살아 있는 세월의 증인이었다. 굽고 뒤틀린 몸통에는 긴 세월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고, 거센 눈보라와 칼바람을 견뎌낸 나무들은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말처럼 주목은 생명이 다한 뒤에도 오랫동안 자신의 모습을 간직한다. 나는 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백 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의 삶과 비교하면 참으로 아득한 시간이었다. 천 년을 버틴 나무들은 마치 "조급해하지 말라"고, "삶은 견디는 만큼 깊어진다"고 말해 주는 듯했다.
숲길 곳곳에는 이야기가 있는 주목들이 있었다. 듬직한 모습으로 지혜와 부를 부른 다는 거대한 아버지 왕 주목, 포근한 품을 내어주는 어머니 왕 주목,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틈을 내어주며 마음을 위로하는 고해 주목까지 있다. 저마다 사연을 간직한 채 숲속에 서 있는 모습이 살아 숨 쉬는 숲길을 채우고 있었다.
특히 어머니 왕 주목 앞에서는 오래전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평생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주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나무의 넉넉한 품과 겹쳐 보였다. 나이가 들수록 부모의 사랑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살아계실 때는 미처 다 헤아리지 못했던 마음들이 이제야 가슴 깊이 스며든다. 모두의 발걸음을 부드렵개 풀어주는
다정한 길이다.
숲길은 완만하고 부드러웠다. 나무 데크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발걸음보다 마음이 먼저 느려졌다. 젊은 날에는 늘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나 이제는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둘러볼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한 줄기,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까지도 소중하게 다가왔다.
봄에는 연둣빛 새싹과 산목련이 피어나고, 여름에는 에어컨이 필요 없는 시원한 숲 그늘이 펼쳐진다. 가을이면 산 전체가 붉고 노란 단풍으로 물들고, 겨울에는 눈꽃과 상고대가 환상적인 은빛 세상을 만든다고 한다. 계절마다 다른 옷을 갈아입는 발왕산은 언제 찾아도 새로운 감동을 선물해 줄 것만 같다.
그러나 내가 만난 오늘의 발왕산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천 년의 시간을 품은 나무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고, 자연의 품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공간이었다. 욕심과 번잡함을 잠시 내려놓고 비움의 시간을 갖게 하는 곳이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푸른 하늘 아래 숲길을 천천히 걸으며 나는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천년 주목들이 묵묵히 견뎌낸 시간을 생각하며 산을내려오며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었다. 구름과 바람, 그리고 천년 주목이 지키고 있는 그 숲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눈꽃과 상고대가 피어나는 겨울날, 다시 한번 그 길을 걷고 싶다. 그때는 또 어떤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부터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