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의 묘비명 - 어떤 임종을 위하여
내 이승을 떠나는 날
별이여 너는 더욱 빛나거라
울음소리는 이미 귀에 들리지 않고
내가 지상에서 조용히 사라질 때
태양이여 너는 어김없이
나의 창문을 다시 찾아오너라
내가 앉았다 간 자리에
찬란한 꽃들 그대로 피고
빈 의자 하나 없는 만원인 땅 위에
바람이여 너는 여전히 정답게
구름을 움직이고 나뭇가지를 흔들어 주어라
삶의 애증은 이미 부질없는 누더기
썩은 육신에 깃들일 나비 한 마리 날지 않거니
내가 흘린 눈물 한 방울 남김 없는 땅 위에
너 찬란한 일월이여 더욱더 오래고 빛나거라
이미 고백은 늦어 버린 때
내 무덤은 하나의 삶의 마침표 길고 긴 어둠이어라
용서받기에도 이미 늦어 버린 때
내 무덤 위엔 꽃 한 송이 새 한 마리 두지 말라.
(문병란·시인, 1935-)
[출처] 묘비명 시 모음|작성자 푸른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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