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매관매직(賣官賣職)
소년 황제 영제는 원래 장사꾼을 지망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모든 벼슬에 정가를 붙이고, 심지어 외상 구매까지 장려하는 등 엄청나게 매관매직(賣官賣職)을 벌였다. 그 관직에 따라 정가는 다음과 같았다.
직책 정가
태수 20,000,000전
삼공 10,000,000전
현령 4,000,000전
이 때문에 자질이 모자라는(함량미달=含量未達) 관리가 대거 임명되어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 삼보의 난으로 나라를 망하는 연쇄 붕괴를 일으키며 후한을 파탄하게 말아먹었다. 심지어는 기존의 관리들이 다른 관직(노른자위)으로 옮겨 갈 때도 돈을 상납하도록 강요했다.
게다가 그 관리가 스스로 더 뜯어먹을 수 있는 관직을 요구해서도 아니고 그냥 명령에 따라 자리를 옮길 때도 이랬다.
양심 때문에 백성을 수탈하지 않던 관리들은 차라리 관직을 버리길 원했으나 이것도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는 셈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그때 태수의 자리를 산 사람 중 조조(曹操) 아버지 조숭(曹嵩)이었다.
얼마나 심했냐면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당시 사마직(司馬直)이라는 관리에게 거록(鉅鹿) 지역의 태수로 임명하면서 그가 청렴하다며 상납금에서 특별히 300만 전을 깎아주자,
”사마직은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오히려 백성의 재물을 갈라내라니 참을 수 없다.“라며 병을 핑계로 사직하려 했다. 그러나 이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마직은 임지로 가다가 맹진(孟津)이라는 곳에서 세상을 비판하는 편지를 남긴 채 자결했다.
거액을 바치고 관직에 출사하면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영제에게 거액의 상납금을 바치고, 고위 관료들에게도 뇌물을 바치고 자신들도 본전을 뽑고 한몫 잡기 위해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수탈했다.
환관, 왕보(王甫)의 양자 왕길(王吉)은 패국상으로 재임하던 기간 중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 넘는 1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이는 왕길이 제 욕심을 충족시키고자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과 요역을 부과했고, 이를 제때 이행하지 못하는 백성들은 모조리 잡아들여 매질해 죽인 것이다. 이러다 보니 굶어 죽거나 맞아 죽지 않은 백성들은 착취를 견디지 못해 고향을 버리고 유랑하는 유랑민이 되거나! 나중에는 아예 도적이 되었다.
매관매직은 황제에게 직접 돈을 주는 게 아니라 유력 호족에게 돈을 주고 그 호족에게 관직을 사서 관직을 달고 난 뒤 관직을 준 호족이 황제에게 해당 관직을 천거하는 형식인데 후한의 관직 임용 체계는 천거(薦擧)가 매우 성행했기에 가능한 짓이다.
대표적인 게 효렴(孝廉)으로 효렴은 아예 오직 천거로만 등용되는 관직이었다. 그래서 원소(袁紹)는 안량(顔良)과 문추(文醜)에게 원술(袁術)은 손견(孫堅)에게 각각 임시로 관직을 주기도 했다.
영제가 즉위했을 때, 구렁이가 궁전 안에 나타나고 암탉이 수탉이 되는 등 흉흉한 일이 계속 발생하자, 의랑인 채옹(蔡邕) 등이 흉사가 계속되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십상시(十常侍) 때문이라고 상소를 올렸다. 그 당시 궁궐 안의 권력을 쥐고 있던, 환관 십상시들은 그들을 파직시켰다.
십상시는 같은 내시를 중용하고 민중들에게 무거운 부역을 부담하게 하여, 민심은 완전하게 떠나게 되었다. 황건적의 난의 결과는, 황제 권력이 쇠퇴 해지고, 지방 호족의 힘이 강대해져, 삼국시대의 전 단계가 만들어졌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십상시들이 영제의 귀와 눈을 막고 국정을 임의로 처리하여, 곳곳에서 반란의 조짐이 보였다.
영제가 죽자 후계자를 명확하게 정하지 않고 후에 유변(劉辯)과 유협(劉協) 사이에서의 황위 계승 싸움이 일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