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오두미도(五斗米道)
후한 순제(順帝) 때 중국 도교(道敎)의 창시자이며 초대 교주인 장릉(張陵)이 창시한 교로써, 그는 유교(儒敎)에 정통하였으나 만년(晩年)에 이르러 유교는 장생(長生)에 쓸모가 없음을 깨닫고 장생법(長生法)을 배우려고 사천(四川) 지방 곡명산(鵠鳴山)에서 수행하면서 도를 깨치었다. 이때 황제(黃帝)가 선인(仙人)이 되기 위하여 먹었다고 전하는 약을 만드는 방법을 익히고, 또 노자(老子) 이외의 많은 신(神)들로부터 신출정일맹위(新出正一盟威)의 도(道)라는 비술(秘術)을 받았다.
장릉은 이들 교법(敎法)으로 신앙치료사로서 스스로 부서(符書)를 지어 사람의 병을 잘 고치고, 또한 못된 귀신(鬼神)을 쫓는다고 백성들을 홀리는데도 무릇 백성들이 따르니, 수만의 신도를 얻어 종교 교단을 창시하게 되었다. 또 이 교단은 지방 교구를 분령(分領)한 제주(祭酒)라는 직제(職制), 주현(州縣)에까지 분교(分敎)를 두어 신도의 수를 확장하였으며 교에 바치는 성금으로는 쌀, 비단, 기물, 땔나무 등을 받아들이는 제도를 두고 있었다.
신자들에게 치료비나 종교 헌금의 명목으로 매년 정성스럽게 쌀 닷 말을 바치게 하여 이에 오두미도(五斗米道)의 이름이 생겼다. 오두미도의 이름은 바로 쌀 5두(斗)씩을 바치게 한 데서 나오게 된 말이다.
장릉에서 붙여진 천사(天師)라는 존칭은 아들 손자로 계승되고 손자 장로(張魯) 때에는 중부 지방에서는 농민들이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자, 신자들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그는 이런 불만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군대를 만들고 새로운 독립 국가를 세웠으며 여행자를 위한 여관도 만들고, 범법자를 관대히 처분하여 교세의 확장을 꾀했다. 다른 도교 지도자인 장수(張修)와 결합하여 정치 세력을 키워 쓰촨성 전역을 지배했다.
후한 멸망 직전의 약 20년간에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하는(제정일치=祭政一致) 형태를 갖춘 독립 왕국이 건설되었으며, 장로 자신의 사군(師君)이라 칭하여 세력을 펴나갔다.
교법의 중심은 병을 고치는 데에 있었고 그 기초에는 병이란 죄를 범한 자에 대한 신(神)의 벌(罰)이라는 신앙이 있었다.
방법은 천지수(天地水)의 삼관(三官)에서 범한 죄를 고백시키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을 그것을 맹세하는 일종의 증문(證文)을 1통씩 봉헌하여 신의 용서를 받는, 이른바 삼관수서(三官手書)의 법이 있었다. 또 장로는 도덕경(道德經)에 주석(註釋)을 가한 생활 규범을 만들어서 신도들에게 이를 지키도록 설교하였다.
교단 조직은 행정 조직과 일체가 되었다. 교구제(敎區制)를 취하여 지방 교구, 교회를 통괄하는 치두(治頭)를 두었으며 그 아래에 제주(祭酒), 간령(姦令), 귀리(鬼吏), 귀졸(鬼卒) 등의 계급을 만들었다. 또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고 숙박게 하는 의사(義舍) 등의 공공시설을 설치하였다. 이들은 각각 당시의 한나라의 국가 통치 기구를 옮긴 것으로써, 공적(公的) 교통, 통신 시설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오두미도는 장릉이 시작하여 장릉이 죽은 후 장릉의 아들 장형(張衡), 장형의 아들 장로에게 전하여 한중 지방의 세력을 키웠다. 천사도(天師道)라고도하며 조정의 힘을 크게 약화했다. 장로와 장수 두 지도자 사이에 불화가 있어 장로가 장수를 죽이고, 손자인 장로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장로에 의해서 대성 되었다.
215년에 장로는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침공을 받아 항복하였으며 이로써 교단은 정치적 성격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교인들은 오두미도에서 떠나지는 않았다.
장로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장성(張盛)은 강서성의 용호산을 본산(本山)으로 하여 교법을 전하였다. 이후 장릉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장천사(張天師) 자리에 올라가 많은 변천을 거듭하면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