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흘러만 가지는 않는다. 제가 있을 곳을 찾아 머물러 있기도 한다. 다만 미지의 어디에 머물러 있을 터인데, 거긴 이화梨花나 도화桃花의 꽃잎이 날리고 벚꽃이 풍장風葬의 의식을 맞이하는 곳일 수도 있다. 더러 깊이가 가늠 되지 않는 늪일 때도 있다. 머무르고 있는 그 곳에 다가가는 것은 내 몫일 진데,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으니 선뜻 들어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찌하다가 다가서게 되면, 머문 시간은 내 냄새를 묻히고 더러는 비벼지고 뭉개져 뒤로 주춤거리며 자리를 물릴 뿐, 흘러가지 않고 쌓여 머물고 있을 때가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겉으로 들어나 보이는 내 몸의 늙어감이 내 시간이 괸 곳에 머물러 있는 형상이 아닐는지.
머무른다는 것은 어느 방향을 향해 가다가 멈춰서 있다는 것을 말함일 것이다. 나그네가 길을 걷다 멈춰, 어느 곳에 머무를 수도 있고, 물이 흐르다 어느 지점에 괴어 머무르고 있을 수도 있다. 만질 수 없는 무형의 바람이 제 길을 가다 소리가 잦아들며 잠잠해질 때, 바람이 ‘머물다’라고도 하고 ‘잠자다’라고도 한다. 그렇기는 하거니와 무형의 시간이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관념일 뿐 실존적 모양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우기면 관념에 묻혀버린 지나친 유추일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거 같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耳順을 느낄 새도 없이 훌쩍 뛰어넘었다. 이순 다음의 고개가 몇 걸음 앞이다. 내 몸을 스치고, 할퀴며 더러 내가 밟으며 지나왔을 시간은 다 흘러가 무화武火되어 없어지고 마는 것인가. 흐르는 시간의 일정 부분을 덜어냈을 때, 덜어낸 시간이 내 것만으로 구분되어지는 건 아닐 테지만 내가 그 일정의 시간에 묻혀있어 오롯이 그 시간은 내가 임자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
흔히 추억이라고 하는 것은 지났다고 생각하는 시간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은 다양해 풍경으로, 냄새로, 소리 등으로 남아있다. 더러는 서로가 포개져 앞의 것과 뒤의 것을 구분할 수 없을 때도 있다. 더 흐르지 않는 시간은 겹쳐있고 펼쳐 보이는 풍경 안에 시간이 괴어 있다. 괴어있는 시간에 뒤따라온 시간이 포개지기도 하는데 그 시간의 풍경 안에 소리도, 냄새도 섞이게 된다. 그러면서 쌓여 머무는 것이다. 다만 더 많은 시간이 흘러들어 멀어지고 흐려질 뿐이다.
뒤에 쌓여 있는 시간이 흘러가지 않고 있다고 잡아당겨 지금의 시간과 겹칠 수 없고, 앞서 있는 시간 역시 당겨 미리 가볼 수는 없다. 내가 지나왔던 시간도 그렇거니와 내게 올 시간도 어떤 형체를 띠고 올는지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다만 머물러 괴어 있는 시간에 들어가 내 몸짓을 살펴볼 뿐이다. 물리物理를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지만 명료한 말을 이어가지 못하니 내 글에 연민을 얹는다.
어릴 적부터 뛰며 놀았던 산등성이에 앉아 달뜬 노을에 마음을 빼앗기고 바라보던 별, 달, 그리고 내가 이름 붙여준 들꽃, 그들과 만나던 들녘이었다. 하지만 내게 소중했던 이런 것들이 부모님에게는 무용한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삶의 끈이 질기게 얽혀 있던 선산과 산의 꼬리처럼 붙어있는 밭들이 개발될지는 주변 아무도 몰랐다. 불쑥 찾아온 첫새벽 손님처럼 느닷없고, 그렇다고 내가 싫으니 내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나라에서 하는 일이려니 하며 엉거주춤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웃도, 이웃 마을도 모두 그랬다.
어쩔 수 없이 선산 양지에 편히 누워 볕을 받고 계실 아버지를 깨워야 했다. 짐작컨대 아직 살도 다 덜어내지 않았을 아버지의 주검을 마주해야 하는 일은 참담했다. ‘잠깐 일어나시면 누울 자리를 다시 봐드리겠습니다.’ 하고 전할 몫은 오롯이 내 차지였다.
아버지가 잠든 그 곳에서, 머물러 괴어있는 아버지와 나의 시간을 보았다. 내가 안을 수 있는, 나와 아버지만이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무더기 무더기로 아버지 몸에 붙은 시간은, 덮여있던 포장을 걷어낸 유형의 물체처럼 보였다. 흘러간다고만 믿었던 시간이 거기 머물고 있어 맞닥뜨린 생소한 체험이다.
변변하게 내세울 것 없는 일가의 대주로서 식솔을 먹여 살려야하는 책임이 아버지의 어깨에 메인 지게 끈에 달려 있었다. 끈이 메여 있던 어깨가 삭지 않고 시간과 버무려져 거기 있었다. 무더기로 괴어 있는 시간을 지금으로 퍼 올릴 때 무참했다. 수백 수천 번의 팽팽한 지게 끈을 받아냈을 아버지의 어깨에, 지나갔어야할 시간이 거기 머물고 있는 듯했다. 무형의 시간은 유형의 어깨뼈에 덕지덕지 들러붙어 유형의 시간으로 머무르고 있었다. 몸이 으스러질 만큼의 지게 짐을 지고 일어서는 순간마다 두 어깨는 짐을 받아냈으리라. 그 두 어깨가 살을 덜어내고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버지의 두 어깨가 땅 속에 머문 시간은 동정녀가 보낸 시간처럼 순결한 시간으로 느껴졌다. 다만 뼈와 뼈 사이는 느슨해졌고 땀이 흐르던 이마는 백골이 되었다. 그렇다고 시간이 무화된 것 같지는 않았다. 노동의 무게를 삶의 순결함으로 환치하던 표정은 이제 읽을 수 없다. 시간만이 온 몸에 내려 앉아 머무르고 있었다.
만질 수 없는 시간은 바닷가 단애의 주상절리처럼 쌓여 있는 것 같았다. 살이 삭고 뼈가 느슨해진다고 팽팽했던 시간이 헐거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거기서 보았다.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고 말하기도하고, 간다고도 한다. 흐르는 물처럼 시간이 흐른다는 뜻일 것이다. 허지만 내가 맞닥뜨렸던 시간은 흐르지 않고 머물러 쌓여 있었다. 헐렁해지지도, 느슨해지지도 않은 무형의 시간이 주는 질감을 느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팽팽한 질감은 팽팽한 대로의 그 때 그 시간으로 내게 닿을 수 있는 듯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덜어낸 살과 뼈가 내 몸에 지금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리라.
시간이 나를 지나서 사뭇 흐르기만 한다면 지나간 풍경은 기억의 풍경일 뿐 되살릴 수 있는 풍경은 아닐 것이다. 또 그것은 세월의 흐름에 가뭇없이 지워질 것이다. 앞에 있는 시간이 다가오든, 거기에 머물러 있어 내가 다가가든, 내가 살아가는 동안은 만지고 스치며 포개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스쳐 지나갔고, 흘러서 멀어지는 것만은 아닌듯하다. 어느 한 순간의 시간은 어디쯤의 구비에서 괴고, 쌓여 머물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 믿고 싶은 것일 게다. 아버지와 나만이 공유된 시간이기에.
나는 내 앞에 놓인 시간을 어떻게 당겨 내 뒤에 쌓을지 알지 못한다. 당길 수 없으니 지금 내 앞에 놓인 시간만 만질 뿐이다. 그러다 내가 앞서가든 시간이 뒤로 물러가든 내 몸에 와 닿은 시간은 뒤에 쌓여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이다. 음습한 땅속에서 아버지가 시간을 매어놓고 있었듯이 내 뒤로 물러난 아버지와의 시간도 거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살면서 겪는 모든 부침도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고 느슨해진다. 그 틈이 헐렁하지 않고 촘촘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내가 만든 풍경 안에 시간이 괴어 있길 바란다. 그건, 지나갔지만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시간인 것 같다. 잡고 매달려도 다만 스치고 지나간 시간이었다면 애당초 내 시간은 아니다. 스친 시간 속에 배어 있는 내 삶의 흔적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공유할 수 없다면 그 시간들은 무화 돼버린 덧없는 시간이지 않을까
그렇기는 하거니와 이럴 때, 그 건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었나, 그저 흐르는 세월의 한 부분인 건가.
(김정태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