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로 이루어진 재미있는 얼굴
…아르침볼도의 〈루돌프 2세〉
정물화는 다른 그림에 비해 좀 단조롭고 밋밋한 느낌이 있습니다.
움직임이 없는 정지된 사물을 그리는 까닭에 재미가 덜한 것도 사실
이지요. 하지만 아르침볼도의 그림을 보면 이런 생각을 싹 날려 버릴
수 있습니다. 갖가지 정물로 만들어 내는 놀라운 형상에 감탄을 금치
못할 테니까요.
그의 작품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재미있다는 거예요. 얼핏 보면 익
살스런 장난 같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화가의 창조적 상상력이 배어
있답니다. 그가 작품 활동을 하던 16세기가 아니라 21세기에 다시 살
아 돌아온다고 해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훌륭한 솜씨지요.
그림의 소재는 꽃이나 과일, 채소 같은 정물입니다. 이 정물들이
전체적으로 어우러지면서 사람의 얼굴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
래서 그림의 제목도 초상화처럼 〈루돌프 2세〉입니다. 루돌프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어요.
그는 예술가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요. 아
르침볼도 역시 그의 후원 덕분에 궁정화가로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
면서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답니다.
이 작품은 자신의 후원자인 루돌프 2세를 그린 초상화입니다. 물
론 보통 초상화와 달리 얼굴 모습은 온갖 채소와 과일 열매들로 뒤덮
여 있습니다. 이마와 가슴팍은 커다란 호박이고, 두 뺨은 복숭아, 귀
는 옥수수, 코는 무화과 열매, 턱은 밤송이, 어깨는 양배추 잎, 머리카
락은 포도와 곡식 이삭입니다. 낱낱이 분리해 살펴보면 하나의 정물
일 따름이지만 이것들이 한데 합쳐져 인물의 초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황제의 초상을 이렇듯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놓았으니, 황제가 크
게 화를 내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았답니다. 이 그림의 원래 제목
은 〈베르툼누스로 그려진 루돌프 2세〉입니다. 베르툼누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계절을 다스리는 신이지요. 그는 과일의 재배를 담당
하는 님프 포모나에게 열렬한 구애 끝에 사랑을 얻은 신으로 유명합
니다.
계절의 변화는 만물이 생장하는 데 아주 중요합니다. 세상 만물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계절의 힘이니까요. 따라서
이 그림은 좀 엉뚱해 보이지만 사실은 베르툼누스의 이미지를 빌려
와 황제의 치세를 은근히 자랑하는 것이랍니다. 황제가 나라를 잘 다
스린 덕분에 온갖 과일과 채소, 곡식이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있다고
말이지요. 아마도 황제는 이 그림을 보면서 흐뭇한 마음을 가졌을 겁
니다.
주세페 아르침볼도(1527~1593년) |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에서 태어
난 풍자화가예요. 처음에는 밀라노 대성당에서 색유리 조각을 맞춰 무늬를 만드는
스테인드글라스 장식공으로 일했으나 프라하로 간 뒤 재능을 인정받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2세와 그의 아들 루돌프 2세의 후원을 받으며 궁정화가로 그림
을 그렸답니다. 그는 같은 시대의 다른 화가들과 구별되는 아주 독특한 그림을 선
보였어요. 꽃이나 과일, 동물, 물고기, 나무 등을 이용하여 매우 익살맞은 인물의
초상을 창조해 냈던 것이지요.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20세
기 들어 살바도르 달리 등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답니다.
정물화
* 별첨 사항: 이 글은 <새콤달콤한 세계명화 갤러리>(길벗어린이)에서 발췌 수록한 것입니다.
글과 도판은 길벗어린이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싣는 것이며, 본 내용은 저작권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