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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풍경(1)

작성자睦園.박이환(고10회)|작성시간21.01.28|조회수19 목록 댓글 0

      겨울풍경(1) 지금 처럼 한 겨울이면 유난히도 바람 많이 불고 눈 많이 내리는 소백산 자락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과수원 집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2월 한겨울 밤이면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나무가지를 윙윙 울리고 손바닥 만한 창문으로 떠오른 달도 파랗게 질린 얼굴로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려 추위에 몸 둘 바를 모른다. 바람소리와 문풍지 울리는 소리 창가에 어른 거리는 나무가지 그림자가 무서워 따뜻한 어머님 이불 속으로 들어가 옛날 얘기 해 달라고 조르면 어머님은 피곤에 졸린 눈 억지로 뜨고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면 듣던 얘기 또 듣고, 또 듣다 나도 모르게 잠들고 겨울밤은 깊어 간다. 무섭고 긴 겨울밤이 지나고 머리 맡 창호지 방문으로 환하게 해 뜨면 따뜻한 솜이불 속에서 몸둥이만 살짝 빠져 나와 방문을 열면 나즈막한 초가 처마엔 긴 고드름이 햇볕에 눈부시게 번쩍이며 병정처럼 사열한다. 고드름을 손으로 치고 마당 우물가로 뛰어나가 놋쇠 대야에 번개 같이 고양이 세수하고 다시 방으로 달려와 무쇠 방문고리 잡으면 다섯 손가락이 교대로 쩍쩍 달라붙고 코끝이 찡해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춥다. 어머님은 달아오른 화로 깊숙이 고구마 감자를 묻어 방으로 슬며시 밀어넣고 이어 김치독에서 갓 꺼낸 살얼음이 낀 시뻘건 김치와 동치미, 콩가루 입힌 시레기 국을 아침상으로 내 오신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밖으로 나와 조선 나이키 검정 고무신 거꾸로 신고 언덕 너머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 얼음판으로 직접 설계 제작한 앉은뱅이 썰매 회초리 팽이 자치기를 옆구리에 끼고 달려간다. 저수지엔 여름내내 수박 참외서리로 뭉쳐 다니던 의리의 사나이들 창영이,삼식이,춘식이,복구... 등이 나와 있고 첫사랑 말자씨도 누런 코를 훌쩍거리며 나와 있다. 하루 왼 종일 모여서 바지가랭이 젖어오는 줄 모르고 썰매타다 지치면 팽이치고 피곤하면 자치기 하고 추우면 들판에 모닥불 피워 젖은 바지가랭이 말려가면 얼굴이 깜둥이 될 때까지 감자,고구마를 구어 먹는다. 짧은 겨울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오는 길 언덕에 올라서면 아! 언덕 너머 고즈녁이 자리잡은 조그만 초가집 굴뚝엔 어머님이 지으시는 저녁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라 넘어가는 붉은 낙조 속으로 사라지고 어스름한 마당엔 지난 가을 전지한 과수나무로 겨울 땔감 준비 하시느라 아버님이 부지런히 왔다갔다 하신다. 그 어머님이 계신 집으로 두 눈섶 휘날리며 달려간다. 40여년 전 아버님이 결혼하고서도 변변한 직업도 없이 남매를 데리고 남의 집 문간방에 세들어 살며 일년에도 몇 번씩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아들이 딱해 보였는 지 과수원과 나머지 재산을 모두 정리하시고 서울 중계동 불암산 아래 자그만 한옥을 사서 이주 하시고 그 과수원에서 나오시던 날 왼 종일 말씀 없이 담배만 태우셨다. 이제는 기억에도 희미해져 가는 갈색 사진속에 그리운 아버님이 되셨다. 글/벽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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