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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아베, ‘마지막 사무라이’의 삶과 죽음!(上)

작성자睦園.박이환(고10회)|작성시간22.07.21|조회수100 목록 댓글 0
내가 만난 아베, ‘마지막 사무라이’의 삶과 죽음!(上)
趙甲濟     


내가 만난 아베, ‘마지막 사무라이’의 삶과 죽음!
  -두 차례 심층 인터뷰를 통해 들여다 본 한 운명적 인간의 심연
  
  *자민당, 암살 직후 선거로 개헌선 확보, 죽음으로 표적을 꿰뚫은 사무라이의 일생이었다!
  *그는 간절하게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정말 잘 해보고 싶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큰 일에 정확한 판단을 내린 분."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준 점 사과, 한반도 자유통일 지지."
  *북한인권과 북핵위협을 노무현 문재인보다 더 챙겼지만 한국인들은 그를 김정은보다 더 미워했다.
  *트럼프를 가장 잘 다룬 지도자
  
   趙甲濟(조갑제닷컴/조갑제TV 대표)
  
   라빈, 아베를 암살 전 인터뷰한 기자
  
  나는 40여일간의 유럽 여행을 마무리하고 지난 7월7일 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서 대한항공기(에어버스 300-200)에 탔다. 빈 자리가 하나도 없이 약 250명의 승객들이 마스크 낀 통조림처럼 앉아 영화를 보거나 잠을 잤다. 나는 늘 창가 자리에 앉는다. 우크라이나 전쟁 후 러시아 영공이 막혀 비행기는 흑해까지 남하한 뒤 좌회전하여 중앙아시아-중국-한국으로 직진하는 항로를 잡았다. 전보다 두 시간 정도 늘어져 11시간이 걸린다. 여섯 시간쯤 지나 창을 살짝 밀어올렸더니 대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항로표시판을 보니 카자흐스탄 1만2000미터 상공에서 천산산맥과 나란히 달리고 있는 게 아닌가? 6000~7000m 눈덮인 연봉(連峰)들을 내려다 보면서 한 30분간 날았다.
  
  한국시간으로 8일 오후 4시 인천공항에 도착, 휴대전화를 켜니 "아베 신조(安倍晉三) 전 총리, 피격, 심장정지"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두 가지 장면이 스쳐 갔다. 총리 취임 직후인 2013년 3월2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그를 인터뷰했을 때 신임 박근혜 대통령과 잘해볼 생각이란 포부를 밝히던 그의 간절한 표정, 그리고 1995년 11월5일 김포 공항에 내리자마자 전해들은 암살 소식!
  
  그해 11월3일 오후 텔아비브의 국방장관 집무실에서 라빈 수상을 인터뷰한 뒤 다음날 새벽 5시50분(현지시간)에 출발한 루프트한자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 4시간 만에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착륙, 귀국 비행편을 기다리며 종일 라인강변을 구경한 나는 현지시간 4일 저녁 8시30분에 대한항공기에 올랐다. 약 13시간 만에 김포공항에 착륙, 바깥으로 나와 택시를 탔더니 운전기사가 라빈총리 피살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때처럼 큰 충격을 받은 것은 10·26사건 이후 처음이었이었다. 내가 라빈 총리를 인터뷰한 것은 피격 34시간 전인 3일 오후 1시30분∼2시30분(현지시간) 사이였다. 인터뷰를 마치는 길로 귀국행에 올랐고, 프랑크푸르트를 이륙한 그 순간에도 라빈 총리는 산 사람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기자는 라빈 총리 회견 녹음테이프를 리시버로 들으면서 대화를 정리했기 때문에 바리톤 음성의 느릿한 영어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을 때였다.
  
  이로써 나는 암살된 라빈, 아베 두 대정치인을 생전에 인터뷰한 기자가 되었다. 라빈 수상 회견은 그가 한 언론 마지막 인터뷰였고, 아베 인터뷰는 한국 기자와 한 유일한 단독회견이었다.
  
  김건희 여사의 책임
  
  유럽 여행 마지막 밤을 나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보냈다. 꿈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나타났다. 저승의 박정희가 아니라 환생한 박정희였다. 생전의 그와는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데 꿈에선 친숙한 사람처럼 이야기를 이어갔다. 박정희의 표정이 너무나 편안하여 내가 "그동안 잘 지내셨군요"라고 말한 기억이 꿈에서 깬 뒤에도 생생했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 불길한 꿈을 꾸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정권 교체가 되어서 기분이 좋으신가, 정도로 생각한 것은 나도 정권 교체 후 처음인 이번 유럽 여행에서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그날 인천 공항에서 라빈, 박정희, 다음으로 떠오른 사람은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이었다. 윤석열 후보가 지난 3월8일 마지막 유세를 제주도에서 시작하는 데 대하여 나는 짜증스러워 했다. "표도 적은데 왜 굳이 비행기를 타고 가는지"라는 걱정은 일종의 내 직업병이다. 나는 비행기를 많이 타지만 비행기 사고를 여러 번 취재한 경험에서 나온 지나친 상상력으로 늘 불안을 느낀다. 그날도 윤석열 후보가 제주에서 부산으로 '무사히' 귀환했다는 뉴스를 접할 때까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속으로 집사람이 제주도에 갈 때는 그런 걱정도 안했는데 하면서 웃었다.
  
  이번 아베 전 총리 암살도 결국은 동선 노출이 주된 원인이었다. 범인은 고인(故人)이 나라에서 지원유세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현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동선 노출 자체가 가장 큰 암살동기를 제공한 것이다. 암살자에게 요인의 동선이 노출되면 쇠파이프로 만든 허술한 사제총에도 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꼭 알아야 할 사람은 김건희 여사일 것이다. 5년간 남편이 하루에 두 번 같은 동선을 따라 출퇴근하도록 격려한 책임을 지게 되는 사태는 나라의 불행이다. 안보, 안보 하지만 최고의 안보는 국군통수권자와 국가원수직을 겸하고 있는 대통령의 안전이다.
  
  아베 암살은 1981년의 레이건 대통령 암살 기도와 닮은 점들이 있다. 그해 3월 28일 미국 청년 존 힝클리는 워싱턴에 들렀다가 이틀 뒤에 레이건 대통령이 힐튼 호텔에 가서 미국 노동계 인사들에게 연설을 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게 되었다. 성적 망상장애를 앓던 그는 영화 '텍시 드라이버'에서 소녀 창녀로 나온 여배우 조디 포스터를 일방적으로 좋아하며 편지를 써보내고 있었는데 대통령을 쏘면 냉담한 포스터가 자신에게 관심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3월30일 오후 그는 호텔 앞에서 레이건을 기다렸다. 연설을 마치고 나온 레이건이 대기중인 리무진으로 다가가는데 힝클리 5m 앞을 지나갔다. 그를 향해서 권총 여섯 발을 쏘았는데 측근들이 피격당하고 레이건은 직접 맞지는 않았다. 경호원들이 대통령을 자동차 안으로 밀어넣는 쪽을 향해 쏜 총탄이 차체(車體)를 맞고 튕겨서 레이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피해가 레이건은 수술을 받고 회복했다. 동선(動線)노출이 힝클리의 암살 욕망을 유발(誘發)한 것이다.
  
  부드러운 '강철의 심'
  
  나는 아베 전 총리를 두 차례 인터뷰했고 북한인권 관련 행사장에서 몇 차례 더 만났다. 그가 일본 역사상 최장기 재임 총리가 되어 역사적 인물이 된 데는 보수 본류의 집안 출신이란 배경 다음으론 북한인권 문제가 큰 역할을 했다. 2002년 관방副장관 시절부터 북한정권이 자행한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자신의 브랜드로 삼은 것이 그를 총리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북한인권 문제에 대하여 냉담한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비판적이었고 한국의 보수인사들, 특히 북한 인권운동가들이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아베 덕분에 자민당 정부는 일본인 납치자 문제뿐 아니라 한국인 납북자 문제도 같이 제기하여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한일연대가 이뤄진 시기가 있었다.
  
  그런 때이던 2005년 3월24일 오전 나는 일본 도쿄 시내 자민당 당사로 가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간사장 대리를 인터뷰했다. 후리후리한 키에 부드럽고 순박한 인상은 그때 벌써 한국에서 굳어지던 극우(極右) 이미지와는 너무 멀었다. 말은 빨랐으나 문법적으로 정확했고 중복이 거의 없었다. 일본 언론은 ‘아베 신조의 등뼈에는 헌법개정이라는 강철의 심이 박혀 있다’라고 평하면서 차기 총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는 관방副장관이던 2002년 9월17일 고이즈미 총리가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회담할 때 동행했다. 김정일은 일북(日北) 수교 회담을 진척시키기 위해 놀라운 고백을 했다. “우리 대남(對南) 공작 기관이 열세 명의 일본인을 납치하였는데, 여덟 명은 죽었고 다섯 명이 살아 있다”고 한 것이다. 김정일은 이렇게 솔직하게 나오면 고이즈미의 결단으로 수교가 이뤄지고 배상금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계산했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여론과 언론을 이해하지 못한 오판이었다. 김정일의 자백에 분노한 여론에 일본 정부도 강경책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노선 전환의 중심에 아베 신조가 있었다.
  
  2002년 10월15일, 납북되었던 일본인 다섯 명이 10일 뒤에 북한으로 돌아간다는 조건하에 귀국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던 아베 신조는, 귀환 일본인들을 북한에 돌려보내야 한다는 외무관료들의 주장을 꺾고 ‘정부 방침으로써 송환 불가(不可)’를 결단했다. 결국 이 강경책은 북한을 굴복시켰다. 일본은 2년 뒤 귀환 납치자의 재북(在北) 가족도 돌려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베 신조의 인기는 올라갔다. 2003년 총선을 앞두고 고이즈미 총리는 당시 49세이던 아베 신조 의원을 자민당의 간사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보수적 이념을 신념화한 정치가였다. 일본 좌파(左派)의 논리적 근거를 제공해 온 아사히(朝日) 신문에 대해서도 직설적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아사히 신문은) 납치 문제에 대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수치를 감추기 위해서 (납치자 구출을 위해 일해 온)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 같다.” (2004년 2월1일 TV 대담)
  
  남북한 좌익의 公敵이 된 이유
  
  아베 전 총리는 문재인 정권 시절의 여론조사에선 김정은보다 비호감으로 나올 정도였는데 그 출발점은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그의 강경노선이 한반도의 공산당 세력을 자극한 것과 관계 있다. 남북한 좌익이 그를 공격하고 순진한 일부 보수도 덩달아 반일종족주의 선동에 넘어가 아베를 공격한 결과일 것이다.
  
  17년 전 그날 아베 간사장 대리는 당시 노무현 정부가 새삼 세기한 독도 문제는 가볍게 보고 있었다. 내가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여 분쟁거리를 만들기 전까지는 한일(韓日) 양국관계가 매우 좋았다"고 했더니 “양국 사이에 분쟁이 있더라도 이를 확대시키지 않도록 언론과 정치가 사전에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번 문제도 일본의 한 지방의회의 결의를 한국 언론이 너무 크게 취급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노무현 정부의 대북(對北) 유화 정책엔 비판적이었다.
  
  "북한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한국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유화정책이 북한에 이용되고 있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한국의 성의 있는 지원에 대해서 선의(善意)로써 보답하지 않고, 가져갈 것은 다 가져가면서 줄 것은 주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은 그런 식으로 해도 먹혀든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유화정책은 북한의 정책을 변화시키는 데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아버지 아베 신타로 모두 박정희 대통령과 친밀했었는데 고인(故人)도 비슷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의 안전을 확보한 다음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발전을 성공시킴으로써 한국의 번영에 큰 공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한일(韓日) 국교정상화라는 매우 어려운 결단을 내렸고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한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치인이란 존재는 중대사안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느냐 못 내리느냐에 의해서 평가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큰일에 정확한 판단을 내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정치인으로서 마음에 새기고 계시는 말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저의 고향은 야마구치현, 도쿠가와 시절엔 조슈번(長州藩)입니다만 메이지유신의 지사(志士)들을 많이 길러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란 선생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인용한 맹자(孟子)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성의(誠意)를 다하면 움직이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至誠而不動者未之有也)’는 말씀입니다.”
  
  내가 짓궃게 물었다.
  
  "아베 간사장 대리께서 출생하신 야마구치현 유야초라는 곳은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혹시 선조가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渡來人)이 아닙니까."
  
  “야마구치 지역은 옛날부터 한반도와 교류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그곳 사람들은 피가 서로 많이 섞였을 것입니다.”
  
  "좌익 입장에선 우경화"
  
  아베 필생의 목표는 일본의 정상국가화였고 그 핵심은 개헌을 통하여 자위대를 군대로 공식화하는 것이었다. 차분하게 답하던 그는 이 대목에선 열을 냈다.
  
  “한국 기자들이 ‘아베 신조가 일본의 우경화, 그 선두에 서 있다’고 해서, ‘그냥 우경화라고 말하면 곤란하니까 구체적인 정책을 들어서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지적해 달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 60년간의 안보정책 분야에서는 제대로 된 논의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논의가 나오면 우익적이라는 비판이 쏟아집니다. 자위대에 대해서는 법률적으로 확실하게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법의 지배 원칙에 비추어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헌법의 자위대에 대한 규정에 모순이 있다고 한다면 이를 바로잡자는 것입니다. 자위대는 군대가 아니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만약 교전상태가 벌어져 자위대원이 포로가 되었을 경우에는 군대가 아니기 때문에 살해될 수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대비해서 (헌법개정으로) 법률적으로 확실하게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미지 조작으로써 (저를) 우경화라고 몰아붙인 점이 많습니다. 무엇이 우경화인지 실체가 없어요. 좌익의 입장에서 본다면야 모든 것이 우경화이겠지요.”
  
  2006년 10월11일 오전 일본 국회 예산위원회에선 아베 총리를 상대로 한 질의응답이 있었다. 50代의 아베 총리가 의원들의 질문에 대해서 구체적인 사례를 적시하면서 속사포식으로, 그러나 낮은 목소리로 답변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는 그 며칠 전 만난 중국 총리에게 "미리 가져간 중국어로 된 납치문제 팸플릿을 건네주면서 이 문제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니 꼭 읽어봐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서도 "일본인 납치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니 한국 정부와 공동으로 대처하면서 정보를 교환하자"는 요청을 했다고 증언했다. 그가 진짜 인권(人權)운동가처럼 보였다.
[ 2022-07-19, 0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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