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영화를 하루 종일 보여주니 저절로 反日감정이… 여행 중 만난 사람들 89 – 대화를 통해 본 세계 속 영어의 실체 5 bestkorea(회원)
(English version is below.) *영어는 나에게 창이자 방패였다. *중국 여행 이야기:(불쾌한 경험) 1) 중국엔 미국 이민 생활을 접고 되돌아와 사는 자들이 꽤 많았다(2007). 2000년대 중반부터 중국이 급성장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물론 이들은 영어에 능했다. ‘란저우’(蘭州) 시내 구경을 하다 국내 여행만 하는 여행사를 발견했다. 다른 나라(인도, 미국, 남아공, 터키, 볼리비아 등)의 국내 여행 상품을 이용해본 경험은 있었지만, 중국에선 없었다(약간의 긴장은 되지만 도전할 만함. 그 나라의 총체적 문화 수준을 보는 데 큰 도움.) 어쨌든 내가 중국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순(純) 중국인 집단 속 경험이어서 내심 흥분과 기대로 참가했다. 가이드와 점심 포함, ‘시안’(西安)을 다녀오는 것. 버스에 올랐다. 대형버스에 가득찬 중국인들, 난 맨 뒤 좌석에 앉았다. 여행에 들뜬 분위기, 그들 특유의 큰 목소리, 버스가 출발해도 계속 시끌벅적, 잠시 후 버스의 대형 모니터에서 영화가 시작되면서 조~용. 마치 기계들이 시끄럽게 돌아가는 공장에 전원 스위치를 끄면 동시에 조용해지듯이. 영화 내용은 국공(國共)합작으로 일본과 싸운 중·일(中·日) 전쟁. 2시간 불량의 이것을 하루 내내 반복 틀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건(아마 2~3분마다) 시뻘건 오성홍기(五星红旗), 낫과 망치(공산당 기호) 그리고 모택동 얼굴이었다. 끔찍했다. 집단 세뇌(洗腦)의 현장을 보는 듯했다. 문제는 점심 때 일어났다. 중국 특유의 원형 식탁, 이곳에 5명이 빙 둘러앉아 가운데 식판을 돌려가며 음식을 골라 먹는다. 식사 중, 내 앞의 50대쯤 보이는 여성이 나에게 영어로 미국 비난을 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를 맹비난했다.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다음 발언이었다.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 없었다면 오늘의 조선 즉 대한민국은 이미 사라졌다는 것. (그들이 말하는 조선의 의미는 한국을 포함한다고 봄.)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꾹 참고 듣고 있는데 그녀는 내가 더 이상 참을 수는 말을 했다. “조선은 중국에 감사해야 한다.”라고. 난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조선에 대한민국이 포함된다면 난 당신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당신들은 우리가 거의 다 이뤄놓은 한반도의 통일을 망쳐놓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날 계속 주시(注視)할 뿐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주변의 분위기는 조~용. 영어를 모르니까. 정말 내겐 끔찍했지만, 중공의 실체를 생생히 몸으로 체험한 순간이었다. 2) 광저우(广州)에서 상하이를 갈 때다(1993. 강택민 정권). 기차는 여전히 만원(滿員). 마주 앉은 50대로 보이는 두 남자들, 내가 그들에게 먼저 말했다. 항상 하는 방법대로. 상대측이 자부심을 느끼거나 자랑할 만한 인물이나 사건을 말하는 식으로. “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秦始皇帝)를 좋아합니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이들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진시황제’ 발음을 또박또박했지만 여전했다. 정말 못 알아들었다. 필담(筆談)을 시도했다. ‘秦始皇是第一個統一中國的人’ 내가 쓴 글을 본 이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었다. 더 놀란 건 나였다. 이들이 내게 한 말이 그랬다. 아니 글이었다. 劉邦(유방)이었다. 그들에게 ‘진시황제’란 존재는 없었다. 난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마, 혹시 하는 마음으로 다른 중국인들에게도 물어봤다. 결과는 같았다. 그들에게 중국의 본류(本流)는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이며 그만이 진짜 한족의 혈통이었다. 진시황제(秦始皇帝)는 그저 북방의 오랑캐에 불과했다. 그랬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 중국인 구성원 중 92%는 한족(漢族)이며 나머지는 55개의 소수민족에 불과하다. 정말 놀라운 그들 한족 중심의 역사관이었다. 사실, 중국 역대(歷代) 왕조를 통틀어 중국 전체를 지배한 민족과 기간은 대부분 비한족(非漢族)인 북방민족이었다. 또한 한족 왕조가 지배한 기간은 반의반도 안 된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사실을 그들에게 말해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3) 이번 이야기도 기차 안에서 중국인과 나눈 얘기이다(1994). 이 시기 역시 강택민(江澤民) 정권 때다. 그는 등소평(鄧小平)이 개혁개방을 표방하고 흑묘백묘론(黑猫白描論)으로 자본주의 일부를 수용한 정책을 이어받은 지도자였다. 그런데도 정치적 자유는커녕 정치적 발언조차 철저히 통제됐다. 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역시 기차 내에서였다(북경-청도). 보통 내가 마주 앉은 중국인과 간단한 인사를 한 뒤 담소(談笑)를 나누면 그들도 좋아했다. 단, 내가 몰랐던 금지된 발언이 있었다. 적어도 그땐 그랬다. 즉, 그들에게 정치인의 이름은 물론 어떤 정치적 발언을 하거나 물으면 안 된다는 것. 난 그때, 이를 알지 못하고 ‘등소평’과 ‘강택민’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물었던 것.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의 표정과 눈빛은 긴장과 불안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들은 고개를 돌린 뒤 함구(緘口)로 일관했다. 난 그때 그들의 공포에 질린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이도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중국은 이미 그런 나라였다. <계속>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