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非常)한 재주'를 가지고, '비상한 죽음'만 얻다 人生流轉(3)金玉均/'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조선은 적어도 동방의 불란서가 되어야 한다'던 혁명가. 골든타임즈(회원) 金玉均(1851-1894)은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1872년 문과 장원 급제 후 요직을 두루 거쳤고, 개화 사상 확산에 힘쓴 조선 말기의 정치가, 사상가였다.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을 세 차례 다녀왔으며,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계몽 운동에 감명을 받은 사람이다.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조선은 적어도 동방의 불란서가 되어야 한다' 라 하면서, 박영효·홍영식·서재필·서광범 등과 갑신정변(1884.12.4)을 일으켰다. 썩어 문드러진 조선을 개혁하기 위하여,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 불(火)을 질러 政敵들을 제거하고, 김옥균은 스스로 호조참판에 올라 개혁을 공표한다. 하지만 원세개의 청나라軍 1500여 명이 들이닥쳐 겨우 3일 천하로 그쳤다. 이들은 급히 일본으로 도망쳤고, 망명 생활에 들어간다. 이때 정변에 가담한 김옥균의 형제들은 물론 가족들까지 떼죽음을 당했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秋作)'라는 이름을 쓰며 지냈다. 1894년 당시 주일 청국 공사 이경방의 권유에 윤치호 등과 함께 청나라에 갔다. 韓日中 세 나라가 힘을 합쳐 서양의 침략에 맞서자는 '三和주의'를 이홍장에게 설파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김옥균은 회동 약속 하루 전인 3월 28일, 上海 호텔에서 수구당 민영소의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한다. 김옥균의 시신은 거열된 후, 머리만 따로 효수돼 '大逆不道玉均'이라고 쓰여진 천이 붙었다. 이같은 잔인한 짓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컸으며, 일본은 '조선은 희망이 없고 일본이 개화시켜야 할 대상이다'라는 여론이 팽배했다. 나중에 김옥균의 수급은 어느 일본인이 수습해 동경의 한 사찰에 묻어 준다. 신장 155cm 김옥균은 선구적으로 시세를 파악했던 수재였다. 일본에서는 김옥균을 혁명가로 평가한다.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아,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비상한 시대를 만났지만, 비상한 공적도 없이, 비상한 죽음만 얻었도다." |
[ 2022-09-16, 22:5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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