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은 앞으로 김일성 남침도 민감사안으로 지정할 듯! 趙甲濟 국민의힘 3·8전당대회 선거관리위원회는 ‘제주4·3사건이 북한 김일성 지시에 의해 일어났다’고 발언한 태영호 의원에게 발언주의를 요청했다. 선관위는 제주도당에서 태 의원 발언에 대해 엄중한 주의조치를 요청하는 공문을 접수받았고, 내부 논의를 거쳐 태 의원 측에 구두로 ‘지역 민심과 국민 정서에 반하는 언행은 삼가달라’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했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나름대로 발제하는 것을 가급적 자제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주의를 내린 것으로 안다”고 했다. 김일성의 남침도 앞으로 민감사안으로 지정될지 모르겠다. 영혼 없는 국민의힘이다. 김일성주의자들이 국민의힘에도 있는 모양이다. 역사적 진실 앞에서 왜 민심 이야기가 나오나. 정 위원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국민의힘은 마지막 한 분의 희생자가 명예 회복을 하는 그날까지 역사적 진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윤석열 대통령은 작년 4·3추념식에 참석해 4·3의 아픔을 치유하고 상흔을 돌보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며, 화해와 상생,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대한민국의 몫이라고 국가 책임을 강조했다. 저도 특별법과 윤 대통령의 뜻에 깊이 공감한다’고 했다. 태영호 의원은 4.3 사건이 김일성이 지령한 무장폭동이라고 이야기했었다. 그게 사실과 부합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정 위원장은 또 ‘4·3특별법’을 인용,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제주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한편 정부가 2003년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는 4·3의 발발 원인에 대해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경찰의 발포로 양민 6명이 사망한 이후 공권력의 부당한 민중 탄압, 친일 경찰의 재등용, 5·10단독 선거 반대 등 여러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김일성의 지령이나 북한의 개입으로 4·3의 촉발됐다는 내용은 없으며, 당시 역사적 시기와 상황을 볼 때 이 같은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 김일성에게 면죄부를 주는 듯한 왜곡이다. 아래 첨부하는 태영호 의원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 제주 4·3사건 김일성 지시설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 내가 '제주 4·3 사건은 북한 김일성 지시로 촉발됐다'고 주장하자 14일 민주당은 나를 국회 윤리위에 제소하겠다고 밝혔다. 어불성설이다. 오늘 아침 언론 보도를 보니 어떤 분은 ‘제주 4·3사건을 김일성이? ’, ‘3·1 운동도 김일성이 했다고 주장할 거냐’는 식으로 나의 주장을 호도했다. 우리 정부 진상 보고서에는 ‘1947년 3·1절 경찰이 시위 군중에게 발포해 6명 사망, 8명 중상을 입힌 사건이 4·3 사건을 촉발했다고 돼 있다. 보고서 어디에도 '김일성 지시로 4·3 사건이 촉발됐다'는 내용은 없다. "남로당 제주도당이 조직적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다"면서도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보고서의 이 부분을 보면 무장 폭동이라는 단어가 없고 마치 그 무슨 민중 인권 활동처럼 읽혀진다. 김대중 대통령도 공산주의자들의 무장폭동이라고 했고 노무현 정부 때 진상 조사에서도 남로당 제주도당의 폭동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주도당이 왜 무장폭동을 일으켰느냐이고 결국 제주 4·3사건의 진실규명에서 가장 먼저 해명해야 할 문제는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느냐이다. 당시 박헌영 등 남로당 지도자들은 미 군정의 체포를 피해 평양으로 들어간 상태이고 소련공산당의 지시로 남로당에 대한 직접적인 지휘권은 김일성의 평양 중앙으로 이관된 상태였다. 김일성은 남북총선거와 5·10 단독선거 반대를 당 결정으로 채택하고 평양 라디오 방송은 매일 거국적인 투쟁에 나서라고 선동했다. 따라서 남로당 중앙의 직접적인 지시가 없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4·3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결정으로 일어났다. 다음으로 공산당의 운영방식을 보아도 김일성의 지시는 명백하다. 공산당은 중앙당 유일관리제로 운영된다. 유일관리제란 중앙당 결정을 거부해도 처벌받고 중앙당이 결정하지 않은 문제를 자의대로 결정해도 처벌받는 강철 같은 당 운영 방식이다. 당시 제주도당의 일부 지도자들이 무장폭동을 주장했다고 해도 후에 김일성의 허가를 받지 못했다면 즉시 중단하고 배를 타고 북으로 도주했어야 했다. 무고한 주민들의 인명 피해가 생길 것이 뻔한 무장폭동을 평양 중앙의 지시나 허가 없이 도당의 결정으로 밀어붙였다는 것은 공산당의 작동 원리에 맞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4·3사건에 대한 김일성의 평가이다. 4·3사건은 당시 평양 중앙에서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에 보이지 않는 권력투쟁이 일어나고 있던 때에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박헌영은 스탈린에게 남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저항은 자기가 지휘하고 있는 것이지 김일성이 지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서 당 중앙의 지휘권을 자기에게 넘겨달라는 비밀편지를 계속 보냈다. 문제는 스탈린이 박헌영이 보낸 비밀편지를 모두 김일성에게 다 알려 주었다. 이렇게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의 갈등은 6·25 전부터 시작되었고 김일성은 박헌영과 남로당 지도자들을 숙청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남로당의 무장투쟁에 대해서 북한 노동당 역사에서 크게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제주 4·3사건만은 유별나다. 남로당의 다른 지도자들은 박헌영과 함께 처형되거나 숙청되었지만, 김달삼·고진희 등 무장폭동 주모자들은 북한으로 올라갔고 영웅으로 대접받고 후에 애국열사릉에 매장되었다. 남로당의 무장폭동을 잘 다루어주지 않는 김일성이지만 다부작 드라마 ‘한나의 메아리’를 만들어 김씨 일가에 대한 충실성 교양에까지 이용했다. 4·3사건은 남로당의 무장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낸 현대사의 비극이다. 지금은 좌우이념 무력 충돌 과정에서 억울한 희생을 당한 분들의 넋을 기리고 희생자분들과 유가족들의 아픔을 치유해야 할 때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되며 그러자면 역사적 진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도 부인하고 오직 자기만의 주장을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의 주장을 ‘극우 색깔론’으로 악마화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에 대한 지성적인 고찰이 아니다. 역사의 진실은 그 무엇으로도 덮어 버릴 수 없다. |
[ 2023-02-16, 20:5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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