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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 회고록은 검사들의 자부심을 심어줄 것"

작성자睦園.박이환(고10회)|작성시간23.04.01|조회수103 목록 댓글 0
"이인규 회고록은 검사들의 자부심을 심어줄 것"
"검사들이 자부심을 느낄 책이다. 검찰에 대하여 부정적 생각을 가진 이들도 이 책을 읽으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작심을 하고 쓴 결기를 느낄 수 있었다. 실명을 밝힌다는 것은 약점이 없으면 불가능하고 욕을 먹을 용기도 있어야 한다. 국민들도 이 책을 통하여 검찰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았으면 한다."
趙甲濟     


李仁圭 전 대검 중수부장의 최근 저서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는 역사의 진실을 위한 정면승부이다. 그 결과로 노무현의 신화가 무너지고 문재인의 위선이 벗겨져도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지금은 진실과 마주할 시간이고, 사실보다 위대한 진실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결정한 책 제목부터가 진검승부이다.
   그는 책을 쓰면서 실명(實名)을 원칙으로 했다. 동료, 선배를 가리지 않고, 호불호(好不好)를 따지지 않고 사실에 충실했다. 교정과 편집 과정에서 그처럼 철저하게 확인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검사 시절의 그를 만난 적이 없는 나는 책을 만들면서 "아, 이런 검사였겠구나"라고 짐작하면서 대한민국이 그런 검사를 24년간 가졌다는 것은 행운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밤을 새워 읽었다는 국정원 전 간부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독후감을 전했다.
   "검사들이 자부심을 느낄 책이다. 검찰에 대하여 부정적 생각을 가진 이들도 이 책을 읽으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작심을 하고 쓴 결기를 느낄 수 있었다. 실명을 밝힌다는 것은 약점이 없으면 불가능하고 욕을 먹을 용기도 있어야 한다. 국민들도 이 책을 통하여 검찰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았으면 한다."
  
   이인규 검사가 주도한 굵직한 수사들로 해서 이 나라 지도부가 상당히 깨끗해질 수 있었다는 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부패한 정치권력과 돈많은 사람들, 이른바 거악(巨惡)을 수사대상으로 삼는 특수부 검사의 표상이 될 만한 인물이지만 상처가 있다. 이 책은 아직 아물지 않은 그 상처를 덧나게 할 수도 아물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검사생활을 수필류가 아닌 본격적인 기록물로 정리한 이는 이인규 검사가 처음일 것이다. 한국 부패 구조의 저수지 역할을 해온 재벌과 권력의 결탁을 정조준한 수사로 역사적 결과를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긴장감이 넘친다. 단편적 언론보도로는 드러나지 않는 검찰 내부의 수사 비화(秘話)는 드라마적 요소가 있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과 재벌의 유착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는 국가적 과제이기도 했었다. 이인규 검사가 SK 그룹 분식회계 수사를 통하여 단서를 확보, 기획과 실무를 책임졌던 2002년 대선자금 수사는, 선거를 매개로 한 권력과 재벌의 유착을 단절, 한국의 정치부패를 몇 단계 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의 두번째 큰 수사인 노무현 전 대통령 건은 피의자의 자살로 한국의 진로에 큰 영향을 주는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 책은 강골검사가 2000년대의 시대적 고민을 정면돌파하면서 상처 받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권 하에서도 그가 다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약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특수부 검사로 유명하지만 주미 한국 대사관 법무협력관으로 2년 여를 근무하는 등 6년6개월 동안 국제업무에 종사, 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인데 특히 미국 공무원들과 상대하면서 청렴한 공직 자세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이회창을 낙선시킨 검찰의 김대업 비호 수사
  
   이인규 검사는 이 책에서 노무현 당선에 기여한 검찰의 수사 비화(秘話) 하나를 소개한다. 2002년 대선 국면에서 김대중 정권 검찰 내 특정 인맥이 사기꾼 김대업 관련 수사로 이회창 후보의 낙선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일종의 폭로이다. 그해 7월 김대중 대통령은 고향이 같은(전남 신안) 김정길(金正吉) 전 법무장관을 다시 법무장관으로 임명했다. 민주화 이후 같은 정권에서 두 번 기용된 이는 처음이라고 한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병풍(兵風) 공작을 위한 인사라고 비판했다. 저자(著者)는 법무부 검찰 1과장으로서 인사실무를 맡고 있었다. 김대업 사건 담당 박영관 서울지검 특수1부장은 신안 출신으로 '검찰 호남 인맥의 핵심 중 한 사람'이었다.
   박 부장은 2001년 6월경부터 2002년 2월경까지 사기죄로 복역 중인 김대업을 검찰청으로 불러 수사보조요원으로 병역 비리 수사에 활용했다. 김대업이 병무 비리 수법 등을 잘 알고 있어 수사에 아무리 필요하다고 해도 정도(正道)가 아니었다. 김대업은 병역 비리 수사를 보조하면서 수사관 행세를 하기도 했고, 검사실 컴퓨터를 이용해 인터넷 동호회 게시판에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해 8월 검찰 인사를 앞두고 이인규 검사는 그런 박 부장이 대통령 선거라는 민감한 시기에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을 수사하는 것은 공정성을 의심받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장윤석(張倫碩) 검찰국장과 상의했는데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 검사는, 박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이 계속해서 병역 비리 수사를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논란거리가 될 뿐 아니라 선배님에게도 좋지 않으니 이번 인사에서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박 부장은 “나도 수사에 지쳐 지방에서 좀 쉬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내일 아침 일찍 기자실에 가서, 이번 인사에서 떠나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선배님에 대한 인사가 기정사실화될 것이고, 이번 인사에서 고향 근처에 있는 큰 규모의 지청장으로 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 박 부장이 전화를 걸어 왔다.
  “이 과장, 미안하게 되었는데, 윗사람하고 상의해 보았더니 너 혼자 살겠다는 것이냐고 핀잔만 들었다.”
   “제가 선배님께 기자실에 가서 이동 사실을 말해 달라고 했지 윗분들과 상의해서 하라고 했습니까?”
   “미안하다. 없던 일로 하자.”
   이 검사와 김각영 차관은 야당이 박영관 부장을 지목, 공세를 펼치고 있으니 인사발표를 하루 늦추자고 김정길 장관에게 건의했다. 일단 승락했던 장관은 밤 늦게 청사로 돌아와 인사발표를 지시했다. 박영관 특수1부장은 유임되었고, 그는 쉽게 결론을 낼 수 있는 김대업의 황당한 주장을 수사하는 데 시간을 끌었고 결과 발표도 문제였다.
  
   역사에 큰 오점 남긴 ‘병풍’ 수사
  
   2002년 10월25일 서울지검 정현태(鄭現太) 3차장검사는 김대업이 제기한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에 대해 이를 사실로 인정할 근거와 증거가 없다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수사의 출발점이 된 1·2차 녹음테이프에 대한 감정 결과, “성문(聲紋) 분석을 했으나 판독 불능이며, 편집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대업은 1999년 3~4월경 녹음테이프에 이회창 후보 아들 이정연에 관한 병역 비리 진술을 옮겨 담았다고 주장했는데, 그 녹음테이프는 1999년 5월12일과 2001년 10월10일 태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전과자가 제기한 근거 없는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엄청난 수사력을 낭비한 것이다.
   검찰은, 병풍 의혹에 대해 무혐의로 결론을 내리면서도 김대업을 감쌌다. 한나라당과 김대업 간 맞고소·고발 사건에 대해선 판단을 유보했으며, 김대업의 사법처리도 추후 결정하기로 했다.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에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특히 발표 과정에서 “이정연이 당시 체중을 고의로 감량한 증거는 없지만 병무청 직원 등과 접촉하면서 체중으로 병역 면제를 받기 위해 노력했을 가능성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 것은 문제였다.>
   증거는 없는데 가능성은 있다? 수사 결과 ‘혐의 없음’으로 결론을 내리면서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왜 하는가? 저자는 <이는 검찰이 예단(豫斷)을 가지고 수사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고 비판했다.
   수사 결과가 발표된 후에도 한나라당은 ‘병풍 공작’의 배후를 밝혀야 한다고 추가 수사를 요구하고 나섰고, 민주당은 특검제 도입과 ‘1000만인 서명운동’ 재개 방침을 밝히는 등 정치권의 공방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검찰이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대업의 허위 병역 비리 의혹 제기 및 KBS, MBC 등 언론의 대대적 보도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지지율이 10%p 이상 추락해 2002년 12월19일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약 2.3%p 차이로 낙선했다. 이 검사는, <김대업의 의혹 제기는 허위 사실로 국민의 정당한 투표권 행사를 침해한 사건이었고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켰다>면서 <박영관 특수1부장은 본인의 검사 경력은 물론 대한민국 역사에도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고 했다.
   그때 박 부장을 교체하고 다른 검사로 하여금 불편부당하게 수사하게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검사는 <대통령 선거가 김대업의 허위 주장에 영향을 받는 일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고 했는데 당락이 바뀔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2002년 대선 자금 수사는 한국 정치부패의 뿌리를 잘랐다
  
   요사이 대기업 간부들을 만나 보면 이인규 검사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인정하는 게 있다. "그때는 대선자금 수사로 혼이 났지만 그 뒤 돈 달라는 정치인이 없어져 편하다"는 것이다. 2003년 이인규 검사가 대선자금을 준 대기업 수사를 처음으로 밀어붙일 때 "이렇게 하면 경제가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던 이들도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한국의 정치부패는 한 고비를 넘긴 것이다. 그 6년 뒤의 노무현 수사는 대통령의 부패에 대하여 한국 사회의 눈높이가 그 사이 달라진 것과도 관계가 있다.
   하지만 2003년 대선 자금수사의 가장 큰 수혜자는 '우리가 받은 돈이 한나라당 불법자금의 10%를 넘기면 사퇴한다'고 승부수를 던졌던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두번째 만남에선 그런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이인규 검사는 서울중앙지검 형사9부장이던 2002년 12월 YTN 뉴스를 보다가 힌트를 얻어 SK 부당거래 수사를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SK가 2002년 대선 때 여야(與野)에 불법자금을 준 단서를 잡았다. 그는 SK 수사를 반대하는 노무현 정권 및 검찰 수뇌부와 맞서는데 송광수 신임 검찰총장의 결단으로 대선자금 수사를 SK, LG, 삼성, 현대차 등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그는 원주지청장으로 있으면서 대검 중앙수사부 기업수사팀장으로 파견되어 삼성 등 10개 대기업 의 불법대선 자금제공 사실을 밝혀냈다).
   SK 수사는 검찰 역사상 최초의 재벌 내부 부당거래에 대한 수사였으며, 기업 회계의 투명성을 높이고 장기적으로 우리나라 기업과 국가의 신인도를 제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주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재벌의 경영 행태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검찰은 2004년 5월21일 불법 대선자금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자금은 823억 원이었고, 민주당은 119억 원이었다. 기소된 인원은 한나라당 8명(구속 6명), 노 대통령 진영 13명(구속 6명)이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받은 불법 정치자금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받은 불법 정치자금의 10분의 1이 넘을 경우 사임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자신들의 계산 방식은 다르다고 하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여의도 당사를 팔고 천안에 있는 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함으로써 불법 대선자금 823억 원을 해결했다. 새천년민주당은 국가에 변제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그 뒤의 열린우리당 분당 사태 등으로 흐지부지되었다.
   대선자금 수사 결과 발표 후 회식 자리에서 안대희 중수부장이 기업수사팀장 직함의 저자에게 “이 수사는 당신이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고 한다. 2003년 2월 SK 부당 내부거래 사건에서 비롯된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내 손으로 끝마친 것"이란 감회와 함께 아쉬운 점도 남았다.
  
   최후의 勝者는 노무현
  
   여야를 불문한 2002년 대선 불법자금 수사를 통해 검찰은 노무현 대통령의 약점을 많이 알게 되어 정치적 중립성 및 수사의 독립성을 지킬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검찰 수사에 간섭하려고 했다면, 검찰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쳐 파국을 맞이했을지 모른다. 물론 대통령의 절대적 권력을 고려하면 이판사판 검찰 수사에 개입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이용해 내 생살을 도려내 주고 정적(政敵)의 목을 칠 요량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불법 대선자금 수사는 노무현 대통령보다는 야당인 한나라당에 더 큰 타격을 주었다. 2004년 4월15일 제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50.83퍼센트를 얻어 156석으로 원내 제1당이 되었다.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덮어쓴 한나라당은 40.46퍼센트로 121석을 얻는 데 그쳤다. 이로써 노무현 정권은 안정적인 국정 운영의 기반을 마련했다. 대법관 출신으로 국민에게 대쪽 이미지로 알려졌던 이회창 후보는 부패한 정치인으로 낙인찍혀 재기불능이 되었다. 노 대통령 자신도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검찰에 약점을 잡힌 셈이 되어 검찰에 이래라저래라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영(令)이 안 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정적을 죽이기 위해 나의 팔다리를 하나쯤 내어준 것에 불과했다. 바둑으로 치면 「위기십결(圍棋十訣)」 중 ‘사소취대(捨小取大)’에 해당한다.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라는 전장(戰場)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승자는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이 검사는, 노 대통령은 재직 중 내란·외환죄를 제외하고는 기소당하지 않는 특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회창 후보는 기소해야 했었다고 생각한다. 불법 자금 수수 액수가 더 많은 李후보의 불기소는 盧대통령을 의식한 것으로, 그 순간 노 대통령의 처벌도 (퇴임후에도) 물 건너간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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