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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刊朝鮮의 탈북자 수기 "아버지, 아~하세요" 읽고 통곡

작성자睦園.박이환(고10회)|작성시간23.07.12|조회수21 목록 댓글 0

 

月刊朝鮮의 탈북자 수기 "아버지, 아~하세요" 읽고 통곡
나는 왜 탈북하여 통일운동에 나름 매진하게 되었을까.
이민복(대북 풍선단장)     


  탈북 시도는 1990년도 남조선 삐라 본 후의 확신 행동이었다.
  잡혀 북송되면 끝인데 하루 천하 그게 현실로 되어 억장이 무너졌다.
  하지만 그 하루 천하가 나를 살리는 역사가 일어났다.
  오래 있다 잡혀왔으면 의심과 죄가 커져 살아날 수가 없다.
  아무튼 광활한 중국, 러시아를 거쳐 5년 만인 1995년 서울에 도착하였다.
  -
  새로 태어나듯 시작하는 남한 생활!
  자유와 풍요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 없이 좋지만
  한편 이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나를 보기도 한다.
  개인주의와 돈이 중심인 사회이다.
  쉽게 말해서 나를 위해서 돈을 벌어야 장땡인 것이다.
  통일 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월급 받는 곳들은 넘사벽이었다.
  뜻을 실현하려면 봉사 정신으로 해야 했다.
  그런데 이기적 인간으로서 이게 그렇게 쉬운 선택이 아니다.
  그런 약한 존재인 나이지만 자석처럼 봉사의 길로 끌어가게 만든 사건들이 있다.
  -
  1997년 서해안으로 탈북한 김원형과 안선국 두 가족의 증언이다.
  지금 북한에서는 수없이 굶어 죽어 나간다는 것이다.
  사전에 이런 뉴스를 듣기는 했지만 믿어지지 않았었다.
  왜냐면 배급이라는 국가 시스템이 갖추어진 북한이기에
  밥이 안되면 죽을 먹게 골고루 나누어 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 명색이 인민 국가인데 그 인민을 굶겨 죽이겠나?!
  이는 6년 전까지 북한에서 산 경험의 판단이었기에 확신적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옛말이라고 생생히 증언하는 것이다.
  
   KBS 일요 스페셜 <북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고 또 충격이었다.
  북한에 몰래 들어가 촬영해 온 생생한 영상들이었다.
  당시 평택 나사렛 대학에 강의차 갔을 때 김대호 탈북인과 함께 보았는데
  그도 나도 머리가 아파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1997년 폴러첸 독일 의사가 북한에서 가져온 사진들에서도 충격이었다.
  의료 봉사자로서 자기 살을 베어 이식하는 헌신에
  북한 당국의 신뢰를 받아 전 지역을 다니며 찍어온 사진들이다.
  우연히 길가에서 본 젖가슴이 없어질 정도의 뼈만 남은 여인과 아이 사진,
  잠시 후 여인은 죽었다고 한다.
  -
  1999년 월간조선(月刊朝鮮)에 난 <아버지, 아~하세요> 탈북자 수기를 보고 통곡하였다.
  내가 있던 순천과 신성천, 또 그리도 많이 거쳐갔던 고원 역에서
  굶어 죽은 두 딸 아이를 묻는 실화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살아야 자기들이 산다며 자기 먹을 것을 아빠에게 주는
  이제 열 살 좌우의 착한 딸들을 차례차례 땅에 묻는 아빠의 마음.
  -
  눈물을 훔치며…
  나 혼자 잘 살자고 <통일>을 모르는 체하며 살 수가 도무지 없었다.
  참 다행인 것은 월급 없이 <통일운동>해도 굶어 죽지 않는 남한이었다.
  그래! 굶어 죽지 않는데 해보자! 누가 보든 말든 하늘을 우러러!
  돈은 쓰지 않으면 되고, 필수품은 공짜인 중고품들을 쓰면 되지.
  그래도 북한의 중앙당 간부보단 더 잘 산다면서….
  -
  이런 정신이 없었다면 대북 풍선도 개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 대북풍선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지만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서도 꽃이 핀다는 경험을 직접 한 것이다.
  민간인으로서 탈북자로서 처음으로 대북풍선 특허증과 자격증 소유자이다.
  대북 전단이 주요 북한 문제로 자리잡게 만든 이른바
  <대북전단 원조>가 된 것이다.
  이것은 내가 잘났다는 개인 자랑이 아니다.
  위에서 말한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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