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2일 일요일 맑음.
맑고 깨끗한 아침이다. 이제 맘이 좀 편해졌다. 여행의 마지막 나라 우즈벡이다. 아침 7시에 숙소에서 제공해 주는 아침 식사를 했다. 옥상 테라스의 분위기는 좋다. 빵, 치즈, 햄, 요플레, 오물렛, 포도로 갖추어진 아랍식 식탁이다. 맛도 좋고 풍성하다. 오랜만에 잘 먹는 아침이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먹는 식사는 간단히 대충 먹는데 숙소에서 제공해 주는 식사는 우리에게는 성찬이다. 먹는 즐거움도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순서다. 짐을 챙겨 나와 다시 BAHODIR Band B로, 본가로 왔다. 에어컨이 있는 2층 5호실 열쇠를 받았다. 실내에 샤워실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어제 만났던 한국 아가씨(성미양)를 만나서 함께 역으로 간다. 버스 3번을 타고 역을 향했다. 버스는 일제 중고로 35인승이다. 30여분을 달려 사마르칸트역 광장에 내렸다. SAMARQAND VOKZAL 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광장은 넓고 소나무들을 잘 가꾸어 놓았다. 잔디도 좋다. 시계탑에는 10시를 향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광장에는 분수도 있어 시원해 보인다. 한국말을 잘 하는 한국 아주머니를 매표소에서 만났다. 한국 식당에서 5년 동안 일했고, 남편이 지병으로 돌아가셔서 고국으로 왔단다. 김치가 먹고 싶단다. 웃음과 수다스러움이 우리를 편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계산이 엉망이다. 부하라 기차표가 17000에서 21000으로 올라가 있다. 어느 것이 맞는지....... 웃음소리에 우리가 속은 것 일까? 내용을 자세히 묻지 못했다. 일단 표를 구해서 나와 역사로 들어간다. 역에 들어가려면 검문검색이 심하다. 공항 같은 짐 검사를 한다. 실내외가 모두 깔끔하고 멋진 건물이다. 화장실은 지하에 있다. 유료다. 다시 광장에서 3번 버스를 타고 숙소로 왔다.
이제는 사마르칸트를 둘러보자. 중앙아시아에서 실크로드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 우즈벡, 그 중에서도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보여주는 곳이다. 사마르칸트는 많은 별명을 갖고 있다. 지구위의 찬란한 장소, 동방의 로마, 알라가 지켜주는 도시, 지구의 얼굴, 실크로드의 심장, 이슬람 세상의 귀한 진주 등, 뿐만아니라 사마르칸트에 대한 많은 전설과 노래가 전해진다. 사마르칸트라는 단어의 어원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교역지, 사거리의 뜻을 가지고 있는 고대어 사마랴(SAMARYA)라는 단어가 어원일 거라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사마르칸트는 오랜 기간 동안 실크로드의 중요한 교역지였을뿐 아니라 옛날 문명의 중심, 중앙아시아지역의 민족들의 역사, 문화와 조로아스터교, 불교, 기독교 와 이슬람이 지나가던 길이었기 때문이다.
사마르칸트는 아미르 티무르가 다스리는 동안 중국에서 이스탄불까지, 인도 북부에서 볼가 강까지 이르는 웅대한 제국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했다. 문화, 학문적으로 빛나는 시기를 맞게 되었다. 티무르는 사마르칸트에 거대한 건물과 아름다운 정원을 만듦으로써 예술과 문화를 꽃피웠고 그의 손자 울르그벡은 당대 최고의 학자와 작가를 불러들여 학문을 널리 융성하게 하여 사마르칸트의 명성을 널리 알렸다. 사마르칸트는 옛날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현재까지도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중심지로써 당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2750년 전 사마르칸트의 구시가지인 아프로시욥 언덕 부근에서 소그드인이 문명을 세우고 소그디아나 라고 칭했다. 예로부터 이 부근은 극히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 살기에 적절한 기후, 천연자원과 깨끗한 물, 사냥감이 풍부한 산과 골짜기, 제라프샨 강의 풍요로운 혜택을 입어 물자가 풍부하고 문화수준도 높았다. 이처럼 좋은 조건 덕분에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 중 하나가 생겼으며 수도는 사마르칸트였다. 이 지역은 타고난 풍부함으로 항상 모두가 노리는 지역이었으며 기원전 6세기 즈음 페르시아 왕조의 왕들이 이곳으로 온 것처럼 많은 왕들이 거주한 곳이 될 수 있었다. BC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이 소그디아를 침공하여 제국의 일부로 삼았다. 1세기에는 유목민이 세운 쿠샨왕조의 지배하에 놓인다. 8세기에 아랍의 침략을 받아 이슬람교도의 강제적 개종을 실시하고 사라센 제국에 병합되었다. 1220년 징기스칸이 침입하면서 도시와 성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14세기에 이르러 몽골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현지 귀족대표인 아미르 티무르가 정치활동에 등장한다. 티무르는 제국을 세운 후 거의 전 생애 적 인 35년 동안 끊임없이 영초 확장에 힘써 거대한 티무르 제국을 건설하였다.
티무르는 사마르칸트를 대제국의 수도로 정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수도를 정하기 위하여 여러 도시들의 생고기를 방치하여 가장 오랫동안 신선하게 보관되는 곳인 사마르칸트를 골랐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사마르칸트의 기후가 서늘하고 좋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마르칸트는 지금의 레기스탄 광장을 중심으로 도시가 재형성되었다. 티무르는 이 도시를 자신의 제국에 어울리는 세계 제일의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원정을 가면 반드시 그 지역의 유명한 건축가나 예술가를 데리고 와서 도시 조성에 참여 시켰다. 티무르는 특히 영원함과 하늘을 대표하는 푸른색을 좋아하며 도시 전체를 온통 신비로운 푸른 돔으로 장식한다. 이렇게 하여 사마르칸트는 티무르가 통치한 아주 짧은 기간 동안 급격하게 소생하였다.
티무르가 제국을 건설했다면 그의 손자 울르그벡은 조부의 땅에서 문화를 융성하게 하며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티무르와 울루그벡의 통치기간을 10~12세기의 르네상스에 이어 두 번째 동방의 르네상스라고 칭한다. 오늘날 도시 안에 산재하는 오래된 건축물의 대부분이 티무르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문화가 발전 되고 상업이 발전됨에 따라서 바자르(시장)와 카라반사라이(대상의 숙소)가 갖추어져 실크로드 교역의 십자로로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티무르 이후 후손들의 내분과 다른 민족들의 침략으로 제국은 분열되고 우즈벡 유목민족에게 정복당한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유목민인 우즈벡 민족이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여 세이바니드 왕국을 세워 수도를 부하라로 정하고 우즈벡을 3개의 지역(한국)으로 나누어 19세기까지 통치하였다. 코칸드 한국(타슈켄트. 페르가나 지역), 히바 한국, 부하라 한국(부하라. 사마르칸트지역)이렇게 3개의 한국은 끊임없이 싸우느라 문화와 경제가 크게 발전하지 못하여 하락세를 타게 된다. 이 후 제국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1868년 중앙아시아는 러시아의 침략을 받았다. 1917년 사마르칸트는 소련에 가입했고, 1924년 인근지역이 모두 소련에 흡수되어 우즈벡 소련 공화국이 탄생했다. 1924년부터 1930년까지 공화국의 수도는 사마르칸트였으며, 전국 제2의 도시였다. 내전의 종식과 함께 소련이 붕괴되고 1991년 9월 우즈베키스탄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이 후 세계관광기구(WTO)는 사마르칸트를 ‘실크로드의 심장’이라 발표했다. 200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특히 2007년 사마르칸트 성립 2750주년을 기념하는 해로서 여러 가지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아내와 숙소를 나와 걸어서 비비-하늠 모스크를 찾아간다. 비비하늠은 가장 높은 귀부인이라는 뜻이다. 인도와 다마스커스등 많은 나라를 원정했던 티무르는 수많은 중후한 사원을 보았다. 이에 자극을 받아 세강에서 가장 위대하고 장대한 사원을 만들도록 지시하고 ‘우리의 훌륭함을 의심한다면 우리가 만든 건물을 보라’라는 슬로건 아래 자신이 직접 건축을 지휘하며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현지 건축가들을 비롯하여 저명한 예술가, 건축가, 벽돌을 만드는 명공들을 인도나 이란 등에서 불러왔다. 인도에서 100여 마리의 코끼리도 데려와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비비하늠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사원이었다. 티무르는 비비하늠의 건설에 온 힘을 기울였다. 티무르는 잦은 원정으로 스스로 공사를 보지 못하여 사원공사 관리자 2명을 임명했다. 사원 앞의 신학교 공사는 그들이 직접 관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원을 신학교보다 크고 웅장하게 짓는 것이 원칙인데, 공사 관리자의 잘못으로 사원보다 신학교의 정문이 높아졌다. 원정에서 돌아온 티무르는 이것을 보고 크게 화를내며 관리자들을 처벌하고 사원의 정문을 높게 다시 지었다. 또한 티무르는 이미 불편해진 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친히 공사 현장을 방문하여 인부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비비하늠은 전체 1500여명의 인부를 동원한 결과 짧은 축조 시간 내에 만들어 졌다. 모스크 양식은 당시 기술을 총 동원했다. 외벽은 윤기가 나도록 유약을 바른 벽돌과 대리석, 정문 앞쪽은 모두 모자이크 기술로 섬세하게 꾸몄다. 사원정문은 코란의 문구와 하늘의 별로 꾸며졌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건물들이 중앙의 뜰을 둘러싸고 있다. 오늘날에는 4개의 건물만이 남아있지만 원래 모습은 돔이 있는 중앙 건물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480여개의 대리석 기둥과 400여개의 작은 돔으로 이루어진 회랑이 있었고 양쪽에 작은 사원도 있었다. 돔이 있는 건물의 아치 넓이는 18m이며 지름 18m의 돔은 구르 아미르와 마찬가지로 내부 돔과 외부 돔의 이중 돔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미나렛(첨탑)은 앞 뒤 쪽에 4개, 사원 구석의 4개로 총 8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 돔의 건물은 오른편에 있는 미나렛 만이 예전 모습 그대로다. 사원에는 7가지 금속으로 만들어진 대문이 있었는데, 문을 열 때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마치 문이 노래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덕분에 무예진(첨탑에 올라가 기도시간을 알리는 사람)이 미나렛에 올라가 시간을 알리기도 전에 문을 여는 소리만으로도 사람들이 기도시간을 알고 사원으로 왔다고 한다.
비비하늠의 아름다움은 바로 중앙에 있는 모스크의 크고 둥근 푸른 돔이다. 돔 지지대에는 알라에 대한 찬사의 글귀가 세겨져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돔의 높이(41m)가 정문(36m)보다 높은데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돔이 잘 보이지만 입구에 들어와서는 돔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비비하늠이 자랑하는 푸른 돔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레기스탄의 오른쪽(초르수)에서 이어지는 작은 길로 걸어와야 한다. 사원이 세워졌을 당시에는 뜰에서 예배를 드리며 코란을 읽었다고 한다. 뜰의 중앙에는 울르그벡이 세운 코란 경대(1434년)가 남아 있다. 경대는 원래 사원안에 있었지만 19세기에 뜰로 옮겼다. 경대에는 당시 세계에 단 4권 뿐이었다는 사슴가죽에 필사한 7세기의 코란 초본이 놓여있었다. 19세기에 러시아가 상트 페테스부르크로 코란을 옮겨갔고, 현재는 타쉬켄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코란 경대를 3번 돌면 아이를 얻을 수 있다는 민간신앙 때문에 기도하며 경대를 도는 여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비비하늠 사원의 건너편은 원래 사원과 함께 만들어진 신학교였다. 신학교의 뜰에는 비비하늠이 자신의 어머니의 영묘를 만들었고, 후에 자신도 그곳에 함께 안장되었다. 이곳에는 그 외에 몇 명의 무명 여인도 안장되었다고 한다. 신학교는 16세기에 무너졌지만 영묘는 그 모습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20세기 초에 이르러 비비하늠 건물은 많이 망가졌다. 입구 아치 옆에는 높이 50여m의 미나렛이 있었지만 지금은 반쯤 무너졌으며 푸른색을 기조로 했던 칠보타일은 벗겨져 떨어져 나갔다. 비비하늠 사원은 1920~30년대부터 서서히 복구를 시작했으며 독립 이후에 빠른 속도로 복구하여 현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비하늠은 9명의 아내 중 티무르가 가장 사랑했던 왕비 이름이다. 때문에 비비하늠과 티무르, 그리고 모스크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티무르가 인도 원정을 나간사이 비비하늠은 사랑하는 대왕에게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 원정 개선에 맞추어 당대의 저명한 건축가를 모아서 공사를 진행시켰다. 그러나 한 젊은 건축가가 비비하늠을 남몰래 연모하여 사랑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왕비는 거절했지만 건축가는 왕비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줄 때 까지 모스크 건설을 중단하겠다고 한다. 왕빈ㄴ 어쩔 수 없이 뺨에 얹은 손위로 단 한 번의 키스를 허락한다. 그러나 그 강렬한 키스여파는 손을 통과하여 뺨에 반점을 남겼다. 이런 과정 끝에 티무르의 개선전에 모스크는 아름답고 웅대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원정에서 돌아온 티무르는 모스크 모습에 매우 놀라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달려간다. 그러나 기쁨의 순간도 잠시 뿐, 아내의 뺨에 생긴 반점을 보고 곧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티무르는 복수에 불타올라 건축가를 사형시키고 왕비는 모스크 첨탑에서 내던져 죽게 된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건축가는 세상의 건축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모스크를 만든 능력을 지녔기에 하늘이 도와 이란의 하늘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왕비는 티무르의 명령에 따라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려 그 유혹적인 용모는 두 번 다시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한다.
성미양으로 부터 3일간 유효하다는 입장표를 얻어 잘 구경했다. 내부 보다는 외관이 더욱 멋지다. 초록색과 흰색셔틀 미니버스가 비비하늠 앞을 왔다 갔다 한다. 10여명이 내리고 또 탄다. 현대식 모습이다. 길은 타일로 깔끔하게 만들어져 있다. 나무 그늘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보다가 옆에 있는 재래시장으로 갔다. 이 시장의 이름은 시욥 바자르 이다. 비비하늠보다 더 재미있다. 견과류를 파는 곳에서는 한국말을 잘 하는 중년 남성도 만났다. 건포도가 여러 종류로 나뉘어 자루에 나란히 담겨있다. 가격이 모두 다르다. 생산 년도 별, 종류별로 나뉜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모두 같아 보인다. 포도꼭지에 붙어있는 줄기를 보고 뭐라고 설명해 주는데 알 수 없다. 오디 쥬스를 한 잔 사서 마셨다. 생각보다 시다. 공짜로 맛을 보라는 무화과는 익힌 것 인데 무척 달고 부드럽다. 무엇보다도 딘야가 제일 좋다. 일종의 긴 메론인데 우리나라에도 개인이 2개까지 반입이 허락된단다. 외국인들도 제법 많다. 채소를 파는 곳은 온통 채소들이다. 정육, 공산품 등 모두 종류별로 시장이 분류되어 있다. 시장은 살아있어, 언제 방문해도, 어떤 시장을 가도 즐겁다.
시장을 나와 하즈라트 히즈르 모스크로 갔다. 시욥 바자르에서 아프로 시욥 언덕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높이 지어져 있는 사원이다. 사원의 위치는 사마르칸트 역사에 전략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옛날 사마르칸트는 아프로 시욥 언덕에 위치하여 하즈라트 히즈르 사원이 도시의 출입을 담당하는 문의 역할을 했다. 박트리아, 인도, 이란 등에서 오는 대상들은 이 남쪽 문을 통하여 도시로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이 문 가까이에 주이 아르지스라는 도시의 중요한 수도관이 지나가 시민들에게 물을 전달하였다. 이 수로는 현재 레기스탄 광장이 있는 곳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땅 밑을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벽과 담이나 건물 지붕위에 밥, 아연 등으로 파이프를 만들어 물을 보냈다고 한다. 추측에 따르면 이전 조로아스터교 사원의 자리에 8세기에 아랍인들이 첫 번째 사원을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몇 번의 재건을 통해 현재의 모습이 이루어졌다.
사원의 사각형의 큰 방 위에는 큰 돔이 있고, 입구 위에 뼈대가 있는 돔이 있다. 겨울 사원이라 불리는 사각형의 방은 예배를 드리던 방으로 서쪽 벽에 미흐랍(사원에서 서쪽 벽을 장식함으로써 메카 방향을 표시하는 것)이 있다. 이 방은 ㄱ 자 모양으로 나무기둥의 테라스로 둘러 싸여 있다. 테라스는 여름사원의 역할을 하며 모든 창이 식물과 글씨의 아라베스크 방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입구 옆에는 20세기에 지어진 미나렛이 있다. 사원 뒤쪽에는 쿠삼-이븐-아바즈(샤흐진다 영묘의 주인공)와 함께 피습을 당한 동지의 무덤이 있다. 하즈라트 히즈르는 이슬람의 성인으로 나그네의 수호신이다. 전설에 따르면 아담의 20대 손이라고 한다. 하즈라트 히즈르는 살아있는 물을 가지고 있었고 착한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어 준다고 한다. 이 수호신을 만나면 행운과 복을 받을 수 있고 보물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를 흰 턱수염에 영감의 모습으로 상상한다. 남자가 그를 세 번 만나게 되면 크나큰 행복을 얻게 된다고 한다. 사마르칸트에는 하즈라트 히즈르와 사원의 공사에 대한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사원 근처를 지나가던 대상 무리가 도둑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하즈라트 히즈르가 샘물로 그들을 살려냈다고 한다. 이것을 기념하여 사원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두 번 지나가면 앞길이 무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또 사마르칸트를 공격한 장군 구케이바-이븐-무슬림이 712년, 여기에 사원을 만들고자 했다. 오랫동안 적당한 찾던 중 하즈라트 히즈르가 그에게 와서 이곳을 가리켰다. 공사를 마칠 때 하즈라트 히즈르는 다시 나타나서 사원과 미흐랍의 잘못을 지적했다. 또한 40일 동안 아침기도를 하면 하즈라트 히즈르을 만나F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원 옆의 깊은 우물에서 솟아나는 물은 이슬람에서 성수로 여겨진다. 한동안 죽었던 우물을 몇 년 전에 다시 살려냈다. 샤흐진다의 쿠삼 이븐 아바즈와 하즈라트 히즈르는 붌의 존재로 여겨지며 성지로 여겨지고 있다. 이곳에 오르면 비비하늠 사원 부근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샤흐진다 방향으로 걸어가는데 공동묘지가 길게 이어진다. 비석에는 흑백사진이 크게 있다. 주로 1930년대 태어나 1970년대부터 2000년 사이에 죽은 이들의 무덤이다. 비스듬한 언덕에 가득 차 있다. 이 공동묘지 한 복판에서 푸른 돔들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샤흐진다 영묘가 있다. 날씨가 무척 뜨겁다. 거리에는 그늘이 없어 공동묘지로 걸어간다. 그늘이 있어 시원하고 묘지라 오싹해서 육체와 정신이 모두 시원한 것 같다. 거리에는 차들이 제법 달린다. 주로 대우차가 많다. 차들 속에서 함께 달리는 노새 달구지도 보인다.
총 길이 200m, 폭 40m 규모를 자랑하는 샤흐진다는 ‘살아있는 왕’이라는 뜻이다. 가장 처음 이곳에 만들어진 쿠삼 이븐 아바즈의 영묘(11세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쿠삼 이븐 아바즈는 메카의 시장이었으며 마호메트의 사촌으로 이슬람 선교사 였다. 그는 지지자들과 함께 선교를 목적으로 사마르칸트에 왔다. 예배 도중 이교도의 피습을 받아 목이 잘렸다. 곧바로 죽지 않고 자신의 잘린 머리를 들고 지반의 틈으로 생긴 우물로 유유히 걸어 내려갔고 지하의 길을 통해 천국으로 가서 아직도 거기에 살아있다고 한다. 이 전설 때문에 그와 이 영묘는 ‘살아있는 땅’이란 뜻의 샤흐진다가 되었다. 또한 이곳은 성지로 여겨져 순례의 장소가 되었다. 이후 왕이나 힘 있는 귀족은 이곳에 건물을 짓거나 친척을 안장하는 일을 큰 영광으로 삼았다. 영묘들로 올라가려면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다른 곳과는 달리 계단의 폭이 넓은 이유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도중에 기도 시간이 되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입구부터 계단 수를 세어서 올라 갈 때의 계단 수와 내려갈 때의 계단 수가 같으면 모든 죄가 사하여 지고 천당으로 갈 수 있지만, 계단 수가 다르면? 그에게는 그 숫자의 차이만큼 죄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티무르 왕조의 친척들이 안장되어 있다. 티무르의 조카와 티무르의 누나의 영묘를 비롯해서, 티무르 군대의 장군과 그의 어머니, 그리고 티무르의 여동생도 있다. 마욜리카(흰바탕의 도자기에 여러 가지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 무늬를 그리는 기법)와 테라코타(점토를 구워만든 건축용 도기) 기술로 장식된 곳도 있고, 모자이크로 장식된 영묘도 있다. 2개의 소크라테스의 명언이 아랍어로 새겨져 있어 당시 사람들은 코란 뿐 만 아니라 소크라테스도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하늘에서 즐거워 하며 날고 있는 새들과 같지만 지구는 그들에게 덫 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사소한 일로 쉽게 실망한다.‘
더 들어가면 오른쪽에 8각형 정자 모양의 영묘가 나타난다. 15세기에 건축된 이 영묘의 지하실에서는 4개의 여성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슬람 신화에서는 천국에 8개의 대문이 있고 지옥은 7개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천국은 어머니의 발 밑에 있다’ 등의 선지자의 말이나 격언이 창문 위에 새겨져 있다.
쿠삼 이븐 아바즈의 콤플렉스 건너편에는 티무르의 부인 투만 아카가 지었다는 콤플렉스(사원과 영묘로 구성된 복합 건물)가 있다. 왕궁이 공사 중이던 1399년 4월 14일에 티무르가 이곳의 하나코에서 자고 갔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쿠삼 이븐 아바즈의 영묘는 샤흐진다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 그의 영묘의 문은 1404년~1405년에 유스프 쉬라즈라는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졌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무늬로 이루어진 문 오른쪽, 왼쪽, 위에는 아랍문자로 글들이 새겨져 있다.
복도를 따라가다가 왼쪽으로 꺾어진다. 사원으로 향하기 전에 지하실 칠랴호나(40일 동안 기도하며 단식하는 방)가 있다. 복도의 벽에는 작은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뚫려있다. 이는 안과 밖의 통풍을 원활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복도를 따라 가면 문을 통해 지아랏 호나(참배의 방)으로 들어설 수 있다. 문에는 ‘힘이 아니라 기도’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안장실에는 마욜리카 도자기(이탈리아식 칠보장식 도자기)로 만든 5층 묘실이 있다. 여기에는 ‘알라를 향하여 순교한자를 절대로 죽은 자로 생각지 말라’라는 코란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안장실에서 여자 2명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티무르의 부인이 안장되었다고 한다. 무덤은 7각별을 비롯한 매우 복잡한, 아름다운 무늬로 꾸며져 있다. 더운날 이곳에 들어오니 시원해서 좋다.
밖으로 나온다. 대추나무도 있다. 양산을 쓴 아내의 모습도 보인다. 함께 둘러보다가 나왔다. 아내가 배탈이 나서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더위와 긴 여행에 몸이 많이 축난 것 같다. 계속 설사를 한다. 밥과 고추장을 먹고 싶단다.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아내의 숙제를 갖고 오후에 혼자 둘러보려고 나왔다. 일단 레기스탄 광장으로 간다. 무척 뜨거운 날이다. 광장에는 그래도 관광객들이 보인다. 나무 그늘에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더위를 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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