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아프리카 여행기10 (이경우) - 케냐(나이로비에서 탄자니아로 이동)

작성자睦園.박이환|작성시간18.06.30|조회수162 목록 댓글 0


   

# 2017113일 금요일, 맑음 초가을 날씨


       밤새 시끄럽던 음악소리는 새벽 4시에야 잠잠해 졌다. 날카로운 여자의 괴성도 사라졌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은 새로운 날을 맞이한다. 회색빛 재미없는 건물들이 골목을 좁게 만들어 놓았다. 골목에는 차와 사람들이 엉켜있다. 말라리아 약을 먹는 날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금요일에 먹기로 하고 챙겨온 약이다. 일단 아침을 먹어야 할 것 같다. 누룽지를 끓여 고추장과 함께 멸치로 가볍게 배를 채웠다. 속은 편하다. 말라리아 약을 먹었다. 별로 효과도 없는 것 같고 모기도 보이지 않는다. 약은 입에 쓰고 먹을 때 기분도 편치 않다. 아침에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이 잘 나와 맘에 든다. 950분에 숙소에서 나와 다른 건물에 있는 사무실로 간다. 사무실에 짐을 맡겨두고 시내를 구경하기로 했다. BS 라고 부르는 나이로비 도심의 큰 버스 정류장도 있다. 어제 만났던 이름 모를 동상은 톰 음보야인 것 같다.


        톰 음보야(Tom Mboya, 1930815~ 196975)는 케냐의 정치인으로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 대통령 시기에 활동했고, 케냐가가 배출한 아프리카권 민족운동 지도자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나이로비 인민 의회당(Nairobi People's Congress Party)의 설립자이고, 케냐 아프리카 민족 동맹(Kenya African National Union, KANU)의 중심인물이며, 케냐의 경제 계획 발전부 장관을 지냈다. 톰 음보야 동상 앞은 현재 '씨티 스퀘어'라는 조그마한 광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인근에는 대형 쇼핑센터들이 들어서 있는 번화가다. 화이트 고원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가톨릭 선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1946년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정치계에도 진출해 케냐 아프리카 민족 동맹(Kenya African National Union, KANU)의 회장으로도 당선되었다. 1962년 케냐가 독립하자 경제 계획 발전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이 되었으나 196975일 수도 나이로비 중심가에 있는 한 약국에서 나하스완 이삭 은젠가 은조로게의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


       먼저 공항 가는 버스가 있는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엠베세더 호텔 앞에서 34번 버스를 타면 된단다. 걸어서 가기에 적당한 거리다. 지도를 확인하고 찾아가니 쉽다. 공항을 간다는 버스는 대기해 있다. 정장을 입은 남, 여 직원이 손님들을 모으고 있다. 좀 고급스러운 차인 것 같다. 케냐 리무진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낡은 차다. 차는 초록색과 연두색으로 칠해져 있고 영어로 City Hoppa 라고 씌어있다. 사람이 다 타면 가는 버스다. 요금은 70실링(700)이다. 택시비에 비해서 엄청 저렴한 요금이다시내를 둘러보러 간다. 작은 공원에 구두를 닦는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예쁜 공간을 차지하고 영업을 한다. 나이로비에는 힌두사원도 있다. 나이로비에는 인도인이 많이 산다고 한다. 인도인은 나라 경제를 좌우할 만큼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고용을 창출하며 국가에 세금을 많이 납부해 나라재정에 기여한다고 한다. 인도인은 영국 식민지 시절 1800년대에 영국인들에 의해 케냐와 우간다 등 동아프리카 지역으로 오게 되었다. 영국식민 정부는 케냐의 동쪽 해안인 인도양에 접한 항구도시 몸바사에서 나이로비와 빅토리아의 호수의 키수무까지를 연결하는 철도를 부설하면서 인도인을 썼다.


       이때 아프리카로 넘어온 인도인이 무려 32000명인데 이중 6700명이 공사가 끝난 뒤 잔류하여 자신들의 삶을 개척하여 신천지를 이룩했다고 한다. 본국에서처럼 카스트 신분 차별을 겪지 않아도 되고 백인들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내륙에서 경제적 기반을 구축했다. 그들의 후손들이 나이로비의 은행과 건물, 대형 슈퍼마켓 등을 소유하고 있다먼저 중앙역을 찾아보기로 했다. 나이로비가 철도로 인해 형성된 도시라고 한다. 철도 박물관도 있다고 한다. 북쪽으로 걸어가는데 높은 빌딩들이 많다. 기차역을 찾아가기로 했다. 대통령 집무실 건물도 만났다. 촬영이 금지되었다고 직원이 나와서 카메라를 살펴본다. 지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큰 나무에 가려서 건물이 잘 보이지 않았다.


       철도 박물관에는 사실상 밖에 세워진 기차들이 전부다. 나이로비 철도 박물관은 나이로비 역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나이로비의 주요 간선도로인 우후루(Uhuru)를 지나다 보면 잘 보인다. 1971년에 개관한 이 박물관은 동아프리카의 철도부터 케냐 철도까지 초창기에서 현재의 철도 변천사를 잘 보여주고 증기기관차와 선로 보수차량, 화물차, 호화스러운 객차까지 다양한 차량을 연대별, 종류별로 전시하고 있다.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촬영할 때 사용한 열차도 있단다. 입장료도 있는데 표를 어디서 사는지 몰라 그냥 밖에서 보는 것으로 끝냈다. 당시 몸바사로 다니던 우아한 열차들의 낭만도 이제 녹슬고 시간 속에 아름다움이 묻혀버린 것 같다. 철길을 가로질러 건너가는 육교에서 바라보니 모든 것이 시원하게 보인다. 움직임이 없는 기차역이다. 햇살이 뜨거운데 그늘로 다니면 시원하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로도 만들어진 카렌 브릭슨이란 필명 외에도 수많은 필명으로 작품을 남긴 <이삭 디네센>의 생가를 가려니 시간이 좀 부족해서 포기했다.


       육교를 다시 내려와 역 광장으로 간다. NAIROBI RAILWAY STATION 이라는 큰 글씨가 보이는데 역사는 낮고 낡아 보인다. 이곳이 정말 역사를 말해주는 박물관 같다. 들어가려니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 그냥 구경하려고 한다니까,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오래된 군대 막사 같은 건물이다. 우후르 공원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역 앞에는 버스 정류장으로 사람들과 버스들로 혼잡하다. 슈퍼에 들어가서 과자와 요플레 물과 땅콩을 샀다. 국회 건물이 있어서 사진을 찍으려하니 경찰이 와서 촬영금지란다. 별게 다 금지다.


       국회 뒤편 큰 길 건너편에 있는 호수 공원으로 갔다. 우후루 공원이다. 나이로비 시내를 관통하는 우후루로(Uhuru Highway)를 경계로 한쪽은 고층빌딩이 밀집해 있는 중앙상업지구(Central Business Area)이고, 다른 한쪽은 푸른 잔디와 아름드리나무로 가득 찬 공원이다. 교통체증에 걸려 짜증이 나려고 하면 빌딩 숲을 외면하고 우후루 공원 쪽만 바라보면 기분이 풀린단다. 눈부신 아프리카의 햇살에 나무, , 꽃들이 빛나는 모습과 한가로이 공원을 거닐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차가 앞으로 가지 않아도 그리 따분하지 않았다고 방문객이 말한다. 인구 3백만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저개발 국가의 수도 한가운데 어떻게 이런 수려한 공원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까? 나이로비 중심가는 건설용지 부족난을 겪고 있다는데, 나라 살림이 궁핍하여 해외 원조까지 받아야 하는 케냐 정부가 왜 이 노른자위 땅을 놀리고 있을까? 이 질문의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바로 왕가리 마타이 교수 때문이었다.


       1980년대 케냐 정부는 여러 번 우후루공원 부지를 초고층 건물을 짓겠다고 나선 외국투자자들에게 매각하려고 했다. 그때마다 왕가리 마타이 교수가 이끄는 케냐의 환경운동가들은 우후루공원을 지키기 위해 정부와 사투를 벌였다. 한번은 우후루공원 시위 현장에서 왕가리 마타이 교수를 포함한 여성 환경운동가 일행이 옷을 모두 벗겠다고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들을 위협한 적도 있다고 한다. 우후루공원 뿐만이 아니다. 왕가리 마타이 교수의 그린벨트운동(the Green Belt Movement)이라는 단체가 케냐에 있는 한 어느 누구도 응공숲(Ngong Forest), 카루라숲(Karura Forest), 에버데어숲(Aberdare Forest) 등지의 나무 한그루 쉽게 베어내지 못한다. 왕가리 마타이 교수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또  이공원에는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서 영국 정부가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 의미로 제작한 '마우마우 독립투쟁' 기념 조형물이 있다. 식민통치 나라가 과거의 가혹행위를 스스로 인정하고 자신들에 맞선 피지배국 독립운동 단체 동상까지 세워주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2015년 나이로비 우후루 공원에서 열린 '사죄의 동상' 제막식에서 크리스천 터너 케냐 주재 영국 대사가 "영국과 케냐 양국 과거사 중 발생했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함께 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케냐 인들은 과거 1950년대 주요 부족인 키쿠유족을 중심으로 영국 식민지배에 항거하는 '마우마우' 무장봉기를 전개했다. 이제는 70대가 된 마우마우 독립투사 수천 명은 터너 대사의 진심 어린 사죄에 감사하다며 크게 반겼다고 한다.


       그늘이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 앉아서 과자를 꺼내 먹었다. 호수가 있는 공원은 메말라 보이지만 고목들이 있어서 쉬기는 좋았다.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버는 사진사들이 여러 명 보인다. 이 공원에서 건너편 건물이 가득한 상업 지구를 보면 우리나라 LG 마크가 선명하게 보인다. 국회의사당 시계탑이 보인다. 시계탑은 시청사에도 있다. 형태와 높이는 비슷한데 모양이 약간 다르다.


       점심때가 되어서 식당을 찾아가기로 했다. 사람들이 많이 들락거리는 식당을 찾아갔다. 지하로 내려간다. 메뉴 표를 보니 알 길이 없다. 옆 사람이 먹는 것이 맛있어 보였다. 메뉴 표를 보여주니 찍어준다. 가격도 적당해서 주문을 했다. 초록색 감자 으깬 것과 야채 종류 3가지 그리고 망고 주스와 소스가 따로 나왔고 주 요리인 고기요리가 첨가되었다. 고기 종류인줄 알았는데 소고기 간 요리다. 실망이다. 퍼석퍼석한 것이 순대 집에서 나오는 삶은 간 맛이다. Liver()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요리는 다시는 먹지 않으리라 맘을 먹었다. 그래도 망고 주스는 맘에 들었다.


       New Kenya Lodge로 돌아왔다. 시간이 좀 남아 인터넷 검색을 했다. 탄자니아의 다르에 살람에 예약해 둔 YMCA 숙소 위치를 살펴보았다. 공항에서 제법 떨어져 있다. 늦은 밤에 도착하는데 찾아갈 것이 난감했다오후 2시에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위해 배낭을 메고 나왔다. 버스는 손님이 꽉 차 있었다. 좌석이 겨우 2자리 밖에 없다. 아내와 떨어져 힘들게 앉았다. 버스 의자를 개조해서 좌석을 더 많이 만들어 놓아서 비좁다. 배낭을 무릎위에 올려놓기도 힘들다. 다음 차를 탈까, 생각했지만 그냥 타고 가기로 했다. 버스는 1시간이 넘게 걸려 공항으로 간다. 시내는 좀 낯익어 보인다. 중간에 사람들이 하나, 둘 내려 아내와 함께 앉게 되었다. 여유 있게 나가니 밀리는 차량 정체도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같은 곳에 차가 멈췄다. 갑자기 차에서 사람들이 짐을 갖고 모두 내린다. 짐을 검사한다. 공항 검색대 같은 분위기다. 버스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다. 모두 짐을 검사 받은 후 다시 차에 탔다. 도로에서 이렇게 짐 검사하기는 또 처음이다. 테러로 유명한 케냐라서 검색이 심한 것 같다. 다시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간다. 공항 건너편에 모두 내렸다. 공항은 초록으로 잘 가꾸어 놓았는데 거기에 누와 얼룩말 사자와 같은 케냐에서 볼 수 있는 동물들을 만들어 놓았다.


       너무 일찍 공항에 왔다. 820분 비행기인데 공항에 도착하니 오후 4시다. 예약한 비행기도 케냐 항공이 아니라 저가 항공인 Precision Air. 케냐 항공 카운터에서 체크를 해준다. 게이트 5번으로 들어간다. 출국 신고를 모두 마치고 들어가니 한국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알고보니 단체 관광객 2팀이 있다. 좁은 공항 내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보이니까 반갑다. 여기서 비행기를 타고 아디스아바바를 거쳐 한국으로 가는 팀이다. 커피를 많이 사가지고 간다. 케냐의 커피도 유명한가 보다. JABA A.A 커피가 좋은 것 이라고 알려준다. 벽에 그려진 커다란 그림을 구경한다. 케냐의 항구인 몸바사 모습과 사람들, 그리고 사자 독수리 죽은 얼룩말,그리고 하이에나가 그려진 그림이다. 그 옆에는 마사이족과 동물들, 케냐의 높은 산과 평원의 아카시아 나무, 호로조라는 야생 닭과 동물을 주제로한 그림이 이어진다.


       모두가 떠나가고 아내와 둘만 남았다. 시간이 남아 유명하다는 Hardee’s 버거를 찾아간다. 햄버거 집에 가서 햄버거로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햄버거는 역시 햄버거다.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햄버거를 벗어날 수 없다. 실망이다. 그러나 먹어봤으니 그 또한 즐거움이 아닌가? 햄버거를 주문했는데 거스름 돈을 잘 안준다. 1,122 실링짜리 햄버거인데 1,200을 내니 잔돈을 거슬러 주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짜증이 난다. 달러로 지불해야하는데 실링으로 지불하니 거스름돈 실링이 없는가 보다. 알고 보니 떼어먹을 요량인 것 같다. 악착같이 말을 해서 겨우 거스름돈을 받았다. 기분이 나쁘다. 이 공항에 있는 면세점들이 좀 불친절하고 계산이 바르지 않다. 커피와 여러 가지 물건을 사고 계산이 분명치 않아 불평을 하는 소리를 방금 떠난 한국 관광객들이 여러 번 하는 소리를 들었다.


       비행기를 타러 간다. 공항 직원이 안내를 해서 걸어가는데 너무 빠르다. 나이 많은 노부부가 잘 걷지 못하시는데 자꾸 맘에 걸린다. 그래도 부지런히 따라갔다. 활주로에서도 걸어간다. 비행기가 활주로 가까이에 대기해 있다. 계단이 비행기 꽁무니에 세워진다. 비행기 뒤에서부터 탄다. 모두 다 앉고 보니 비행기 좌석이 2/3 는 비어서 간다. 원래는 820분 출발인데 비행기는 810분에 출발했다. 어둠속으로 가볍게 날아간다. 저가항공이라 기내식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견과류 1봉지와 주스를 준다. 고맙다.


       밤 10시에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 공항에 도착했다. 도착비자를 받아야한다. 입국신고서와 함께 50달러를 제출하고 기다린다. 다르에스살람 공항은 수도에 있는 대표 공항으로는 좀 허술해 보이고 규모도 작아 보인다. 밤이라 외부의 모습은 알 수 없었다. 옆 창구로 가서 기다리란다. 잠시 후에 이름을 불러 입국 도장이 찍힌 여권을 나눠준다. 배낭을 찾으러 간다. 배낭은 벌써 나와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을 빠져나오니 캄캄하다. 택시를 타려니 35달러를 부른다. 그냥 밖으로 더 걸어 나갔다. 다행히도 주유소가 보이고 큰 길이 나타난다. 버스를 타려니 모두 끊겼단다. 도로변에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물어보니 버스도 있는 것 같은데 택시를 타란다. 툭툭이도 보인다. 흥정을 하려고 하니 사람들이 많이 몰려온다. 이것저것 흥정을 해보니 결국 10달러까지 내려간다. 달러가 없으니 탄자니아 실링으로 17,000을 주고 가기로 하고 택시도 아닌 일반 자가용을 탔다.


        홀리데이 인 앞에 있는 YMCA를 찾아 갔다. 대문이 잠겨있다. 택시 기사가 빵빵 거리니까, 잠시 후에 직원이 와서 대문을 열어준다. 11시까지만 오픈되어 있고 문을 닫는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1115분이다. 방이 있냐고 물으니 풀이란다. 도미토리 4인실이 있다고 나중에 말해준다. 그것도 감사할 일이다. 이 늦은 밤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아침식사 제공이냐고 물으니 조식은 포함되지 않는단다. 식당에서 요리를 해 먹을 수는 있단다. 우리가 읽어본 여행기에서는 아침도 준다고 되어있어서 물어본 것이다. 4인실에 들어가니 백인 총각 혼자서 늘어지게 자고 있다. 무척 덥다. 에어컨도 없다. 조심스럽게 공용 샤워장으로 가서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여자 샤워장이다. 1인용 침대에는 고맙게도 모기장이 달려있었다. 편안하게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자리에 누우니 엄청 덥다. 할 수 없이 팬티만 입고 대자로 누워 잠을 청한다. 더위로 힘든 밤이 될 것 같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