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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여행기14 (이경우)-블라디보스토크 2

작성자睦園.박이환|작성시간18.08.24|조회수169 목록 댓글 0


                 


*816일 수요일. 맑음


      삶은 계란과 삶은 토마토로 아침을 해결했다. 좀 부실한 것 같다. 시내 구경을 나섰다. 어제 봐둔 고개를 넘어간다. 날씨는 맑고 쾌청하다. 왼편에 교회 지붕이 보인다. 성 니콜라스 정교회(St. Nicholas Cathedral). 소박하고 깔끔한 교회당이다. 정원에는 꽃이 잘 가꾸어져 있다. 마을 속에 있어서 주민들과 친숙한 교회 같다.

스베틀란스카야 거리(Svetlanskaya St)로 내려왔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대도시이긴 하지만 관광객이 둘러볼 곳은 중심가에 몰려있기 때문에 그리 크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우리가 살펴보니 모든 관광지를 걸어서 다닐 수 있다. 기준으로 삼는 거리는 스베틀란스카야 거리이다. 이 길을 중심으로 모든 관광지가 있다. 이 거리가 동서로 뻗어있으며 그와 만나는 거리는 알류산 거리와 아께안스키 이다. 알류산 거리에는 서점, 향토 박물관, 기차역 등이 위치해 있으며 아케안 대로는 중앙 광장에서 시작하여 극동대학교를 넘어서 신한촌 입구까지 뻗어있다.



      인터넷과 우편, 전화, 팩스 등을 모두 이용할 수 있는 우체국은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보인다. 우체국은 기차역 건물로 나오면 왼쪽 길 건너로 간판을 통해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여행을 위한 지도나 가이드 북 등은 서점 끄니가미르에서 살 수 있는데, 기차역에서 알류산 거리를 쭉 따라가면 찾을 수 있다. 이곳은 2층 규모의 서점으로 상당히 많은 종류의 책을 발견 할 수 있다. 우리 안전을 책임져 주는 한국 영사관도 이곳에 위치해 있다. 러시아에 있는 재외 공관으로는 모스크바 외에 이곳이 유일하다.

 

경기장(Stadium "Avangard" Стадион "Авангард") 입구가 보인다. 오토바이 그림이 붙어있는 경기장이다. 경기장 앞에서 서쪽으로 걸어간다. 별이 달려있는 기념물이 보인다. 천주교 성당(Roman Catholic Church)이 보인다. 러시아에서는 좀 특별한 교회다. 문이 굳게 닫혀있다. 첨탑이 높아 사진기에 잘 안 들어간다. 성당에서 다시 내려가는 길에 또 하나의 예쁜 교회를 발견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아닌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최근에 지어진 것 같다. 그리스 정교회 스타일이다.


       흉상(Monument to the hero Komsomolets V.B.Banevuru)이 있다. 예쁜 꽃들이 잘 가꾸어져 있다. 누구의 동상인지는 모르겠다. 구소련시절 청년 공산주의자의 동상인 것 같다. 오래된 건물들이 길가에 줄지어있다. 작은 공원,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공원이 또 있고 작은 기념물이 하나 세워져 있다. 기념물을 위해 조성된 공원 같다. 그 옆에 무기박물관이 있다. 정확히 얘기하면 육군 역사 박물관이란다. 정언에는 대포들이 많다. 포탄도 그 옆에 놓여 있다. 군함에서 사용하던 함정포도 있다. 잠수함도 있고 작은 군함도 잔디위에 전시되어 있다. 향토 박물관의 분관 격인 작은 박물관이다. 이 안에는 과거의 무기류, 이 지역의 어류들, 보석 컬렉션, 그리고 정기적으로 자체 전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좀 더 걸어가니 방패와 칼을 든 천사상이 조각되어 있다. 금각만 현수교의 현수탑 아래다. 다리 옆이다. 일본과 관련된 동상(monument V.S.Oschepkovu)이다. 러일조약 기념비란다. 또 기념비가 있다. Nevelskiy monument. 다리 바로 밑에는 기념비(Moryakam Torgovogo Flota)가 또 있다. 눈을 들어 금각만을 쳐다본다. 다양한 배들이 정박해 있다. 선착장에는 부두 크레인이 많이 보인다. 군함도 여러 채 보인다. 고층빌딩이 그 뒤를 막고 있다.


       우리는 반대로 언덕을 향했다. 높이에 있는 독수리 전망대를 목표로 걸어간다. 푸쉬킨 거리를 다라 오른쪽으로 걸어간다. 작은 교회도 만나고 박물관(Geological and Mineralogical Museum of A.I.Kozlova)도 만났다. 푸쉬킨 극장(Primorsky Pushkinsky Theatre)도 있다. 그 옆에는 푸쉬키의 동상도 있다. 러시아에는 동상이 많은데, 가장 많은 게 푸시킨 동상이다. 문화와 문학을 애호하는 나라답다. 푸시킨 동상은 전국이 거의 비슷한데, 이 동상은 좀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 우는 표정이다. 가까이 가서 보면 눈물자국도 있다. 극장 건너편의 고색창연한 벽돌 건물은 박물관인데 옛 동방대학 건물이었단다.


       독수리 전망대에 가려면 여기에서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야한다. 푸니쿨라는 언덕에 설치된 전차다. 후르시쵸프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고 모방해서 만든 거라는데, 신기하게 지금도 운행한다. 그러고 보니 샌프란시스코와 블라디보스토크는 닮은 것이 많은 것 같다. 약간 언덕진 지형에 금각교와 금문교도 이름이 비슷하고 모양도 비슷비슷하다. 푸니쿨라는 2대가 있다. 내려가는 것과 올라오는 것이 교대로 간다. 중간에서 길이 나눠진다. 교차되면서 올라가고 내려온다. 객차의 정확한 배차 간격은 없는 것 같다.


       탈 때 검표원 아주머니에게 돈 내면 표를 대충 손으로 끊어서 준다. 1명에 12루블 매우 저렴하다. 한국 돈 300원도 안 되는 탑승료다. 타고 있으면 어느 정도 사람이 타면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 같다. 자동은 아니고 사람이 직접 조종하는 수동이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도 본 것 같다. 생각보다 사람이 없다. 러시아 총각 한 명과 아내와 차장 아줌마까지 4명이 전부다. 푸니쿨라 안이 텅텅 비어서 바깥 경치를 앞에서도 보고, 뒤에서도 보고 앉아서도 보고, 서서도 보며 올라갔다.


       1분 정도를 타고 올라온다, 올라오니 아이들이 그린 것 같아 보이는 푸니쿨라의 모습들이 전시되어있다. 귀엽다. 독수리전망대 올라가는 길은 푸니쿨라에서 나와 아래쪽 계단 이용해 내려온 후 지하도 같은걸 통해서 동그란 광장을 지나 다시 계단을 올라가 길이 나있는 쪽으로 쭉 따라 올라가면 된다. 그냥 사람들 따라가면 쉽다. 로터리 도로가에는 단체 관광객을 실고 온 대형버스들이 줄지어 서있다. 전망대에는 열쇠가 많이 걸려있다. 열쇠보다 중국 관광객이 더 많아 보인다. 아주 시끄럽다. 예쁜 러시아 가이드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다고 아주 야단이다. 커다란 호랑이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전망대 위쪽으론 러시아 문자를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키릴형제의 동상이 서있다. 마케도니아 오흐리드 호수를 방문했을 때, 거기에도 있던 키릴 문자를 만든 성 키릴(827~869)과 성 메토디우스(815~885) 동상이다. 이곳은 참 초라하게 만들어 놓았다. 키릴 문자는 러시아어를 비롯한 옛 소련의 언어들로, 동유럽(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 몰도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일부 지역, 크로아티아 일부 지역, 루마니아 일부 지역,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공화국)과 중앙아시아, 북아시아와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일부 지역, 몽골 등 슬라브권의 영향을 받은 나라에서 쓰이는 문자이다. 9세기의 그리스 문자에 바탕을 둔 키릴 문자는 '슬라브족에게 파견된 사도'인 그리스의 두 형제(키릴 문자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성 키릴루스 와 성 메토디우스)가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독수리전망대는 해발 214m의 높지 않은 독수리둥지 언덕(Орлиное гнездо горы)에 있는 전망대지만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와 잘라토이라그 만(бухта ЗолотойРог)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다. ‘잘라토이(Золотой)’는 황금()이고 라그(Рог)’는 뿔()이니, 때문에 황금 뿔 만또는 금각만(金角灣)’으로도 번역된다. 과거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즉 오늘날 터키(Turkey)의 이스탄불(Istanbul)에 있는 금각만(Golden Horn)과 지형이 비슷하다고 하여 그러한 명칭이 붙었다.


       이곳에서는 금각만과 아무르 만, 그리고 그 주변의 멋진 섬들의 풍광을 볼 수 있으며, 시내의 주요부가 한눈에 보여 아름다운 파노라마를 관광객들에게 선사한다. 특히 유명한 볼거리가 루스키 섬과 연결된 금각만 대교(Мост Золото́й Рог)인데 이 다리는 2012APEC 정상회의를 위해 건설되었으며 길이가 3.1km로 세계 최장 사장교(斜張橋)이다. 웅장한 금각만 대교를 지나 루스키 섬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멋진 다리가 보이는데 러시아 최고의 다리인 루스키대교(Русский мост)이다. 다리위의 서스펜션 케이블은 흰색, 빨강, 및 파랑의 3색이며 러시아 연방 국기를 나타낸다.다리 아래는 군함들이 줄지어 있다. 금각교는 러시아어로 Золотой мост (잘라또이 모스트)라고 한다. 저 다리 외에도 지형적 유사함으로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비교된다. 겨울에는 다리를 사이로 한쪽은 얼음이 얼고 한쪽은 얼지 않아, 구멍을 뚫고 낚시를 하는 이들도 있단다. 차량이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사고도 심심치 않게 생긴다고 한다.


       이제 내려가기로 했다. 걸어서 내려간다. 푸니쿨라를 타고 내려가지 않고 정류장 앞에서 길을 따라 서쪽으로 걸어간다. 작은 광장에 금각만을 내려다보고 있는 동상(Murav'yev-Amurskiy Monument)이있다. 무라브요프 아무르스키 동상이다. 5000루블 화폐에 올라와 았는 인물이다. 하바롭스키에서 본 인물이다. 무라비요프의 동상 밑 부분에는 비문이 있는데, ‘아무르 강에 최초로 발을 디딘 러시아의 명예로운 아들에게 바친다.’ 라고 새겨져 있다. 이르쿠츠크에서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바로 알렉산드르 3세 동상 밑 부분에 새겨져 있는 부조가운데 하나다. 러시아 극동 지방의 도시마다 만들어져있구나.


       동상 뒤편에는 수하노바의 집이라는 박물관이 있다. 수하노바는 연해주 지역의 주지사를 역임했던 인물이다. 그의 집이 박물관으로 만들어져 그의 생활용품과 흔적들이 남아있다. 19세기의 목조주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00년이 넘은 집이다. 당시 사용하던 피아노와 권총, 축음기 등 다양하다. 좀 더 걸어가니 극동 국립대학 건물과 관공서 건물이 나온다. 수하노바 동상 공원에 들어섰다. 거리 이름도 수하노바(Sukhanova) 거리다. 공원에는 그의 흉상도 눈에 띄지만 더욱 눈에 띄는 것은 고급 목재로 된 책장이다. 책장에는 책이 가득했고 몇 몇 사람이 책을 꺼내 읽고 있다. 공원에 책장이 있다니, 비나 눈이 내리면 어떻게 할 까? 쓸데없는 걱정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공원 옆에는 해산물 요리로 유명한 팔라우 피쉬 식당이 있다.


       공원 앞에 있는 지하도를 통해 길을 건너 남쪽으로 간다. 지하도에서는 리코더를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가 있는데 너무 잘 부른다. 좁은 숲길을 다라 내려오니 공연 예술 극장(Primorskiy Akademicheskiy Krayevoy Dramaticheskiy Teatr Imeni M. Gor'kogo) 이 나온다. 제법 규모가 크다. 계단에는 기타를 들고 연주하는 모습의 동상도 만들어져 있다. 블라디미르 비소츠키라는 배우 겸 가수의 동상이다. 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 비소츠키(Vladimir Semyonovich Vysotsky1938.1.25.~1980.7.24)는 러시아의 배우 겸 시인이며 가수 겸 작사가이다.


       독재체제에 대한 비판과 억눌린 인민들의 삶에 대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절규하듯 700여 곡의 저항가요를 불렀다. 배우로도 성공하여 수많은 연극과 드라마에서 연기했으며 28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42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나고 죽은 그의 동상이 세워진 이유는 아마도 그가 소련 시절 그가 많은 민중가요를 불러서가 아닌가 싶다. 그의 굵직하고 힘 있는 러시아 스타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내가 옆에 앉아서 사진을 찍는다.


       세르게이 라조(1894~1920) 동상이 있다. 세르게이 라조는 극동러시아 지역의 볼셰비키 지도자 중 한명이었다. 몰도바 태생인 그는 시베리아를 넘어 극동까지 와서 적군 활동을 한다. 그러다가 반대편인 아군백군을 지원한 일본군에게 붙잡혀서 젊은 나이에 불타죽는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라조 뿐 아니라 다른 볼셰비키들, 적군 그리고 한인 독립 운동가들도 러시아 내전 당시 일본군에게 많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배가 고프다. 큰 길로 가니 미니 굼(Малый ГУМ) 쇼핑센터가 있다. 중국 단체 관광객들이 상품을 사러 많이 몰려드는 곳이다. 에스컬레이더를 이용해 올라가니 식당들이 나온다. 코코치킨 코너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 총각이 치킨을 잔뜩 시켜서 맛있게 먹고 있다. 총각에게 물어서 같은 종류를 주문했다. 스프라이트를 추가해서 먹었다. 정말 맛있다. 아내와 백화점에서 물건을 샀다.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이다. 결혼한 지 벌써 30년이 넘었구나.


       일리노어 프레이 동상(Eleanor Prey)의 동상이 길가 계단을 배경으로 세워져 있다. 미국인으로 1894년부터 1930년까지 약 36년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편과 함께 살면서 이곳에서 겪은 경험과 느낌을 2,000편의 편지로 적어 미국의 친지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의 친척(찰스 스미스)이 이곳에서 큰 집을 짓고 1층에 미국 상품가게를 만들었는데 장사가 잘 되어서 결국 도움이 필요했고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살고 있던 그들을 불렀다고 한다. 그녀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사랑하게 되었다. 물론 20세기 초에 러시아에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러일 전쟁, 1,2차 세계대전, 러시아 혁명과 내란으로 사는 게 항상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남편이 죽은 1923년에도 그년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게 된 이유는 그녀가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아버린 후 생활비를 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편지 작성을 너무 좋아한 그녀는 대략 16천 페이지를 썼단다. 결국 엘레오노라의 손녀가 옛날 편지를 발견한 덕분에 그 내용이 책<엘레오노라 프레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편지 Letters from Vladvostok, 1894-1930>으로 출간되어 블라디보스토크의 30년 역사가 담겨있어서 정말 재미있고 또 역사를 파악하는 사료가 되었다고 한다. 동상 옆 벽돌 벽에는가끔은 도망가서 이곳 생활의 모든 고생과 근심에서 너무나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나에게 이 난잡하면서도 아름다운 곳보다 더욱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데가 없을 것을 알고 있다. 나의 인생의 가장 좋은 기간을 바로 이곳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엘레오노라 프레이,1929’이라는 글이 있다. 이동상은 러시아 양식의 화려한 우체국 건물 옆에 201474, 미국 독립기념일에 맞춰서 세워졌다.


       길을 건너 공원으로 내려왔다. 포세이돈으로 추정되는 두상이 있다. 아이들이 기념상에 올라가 놀고 있다. 개선문이 보인다. 개선문(니꼴라이2)은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Николай II, 1868~1918)가 방문했던 것을 기념한 것으로, 원명은 승리의 아치(Триумфальная арка)’이다. 아치 뒷부분에 황제가 방문했던 날짜 ‘11.05.1891.’가 새겨져 있다. 황제는 191710월 혁명 때 퇴위되어 총살당하지만, 2001년에 가족 및 다른 교회 순교자들과 함께 러시아정교회에 의해 성인(聖人, святой)으로 시성되었다.


       전쟁 출발 당시 승리를 기원하며 문 사이를 지나가서 러시아를 되찾게 되었다는 설이 있어 승리의 아치라 불린다. 그 후 개선문을 지나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다. 니콜라이2(НиколайII)는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로써 매우 내성적이고 조용한 스타일로 군주로서 적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제위에 등극하자 등극한 기념으로 러시아의 주요 도시들을 순회하며 개선문을 건립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소련 정부가 파괴한 것을 니콜라이 2세 황제 135주년을 기념하여 2003년에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 개선문 윗부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상징인 호랑이가 반대편에는 니콜라이 2세 상징이 새겨져 있다.


         하얀색 대리석으로 조각된 칼 든 수도사의 상이 보인다. 수도사와 칼이라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아담하고 작은 정교회 앞에 영원한 불꽃이 있다. 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영원의 불꽃'입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전쟁을 얘기하면 '나폴레옹 전쟁''2차 세계대전'을 얘기한다. 그만큼 위기에 빠졌던 전쟁이고, 끝내 승리한 전쟁이기도 하다. 잘라토이라그 만(бухта ЗолотойРог) 연안에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огонь Вечный)이 있다. 이것은 국가를 위해 희생된 자들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러시아 곳곳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러시아도 수많은 도시가 파괴되었고, 엄청난 숫자의 희생자도 발생했는데 대도시 중심부 곳곳에 전쟁에서 순국한 군인과 피해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영원의 불꽃이 만들어 졌는데 365일 꺼지지 않으며, 참전용사들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도 옆에 있다. 이것들을 통해 러시아 국민들은 아픈 역사를 배우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의 불꽃 조형물 좌, 우측의 19411945 숫자는 러시아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해와 세계대전이 종료된 해를 나타낸다. 황금빛 지붕을 한 정교회 건물, 개선문과 꺼지지 않는 횃불, 잠수함 전시관 근처를 제독광장(Admiral'skiy Skver)이라고 한다.


       잠수함이 전시되어있다. 잠수함을 전시해 놓은 것은 러시아에서 처음 보는 것 같다. 잠수함 박물관이 있다. 영원의 불꽃 옆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4 대의 적함을 침몰시켰다는 전설적인 잠수함 C-56호를 개조한 잠수함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잠수함 내부를 통해 당시 전쟁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잠수함 박물관에는 함장이 이용하는 방과 작전실, 수병들의 침실, 그리고 어뢰를 발사할 수 있는 선미를 그 모습 그대로 재현하고 있어 역사적, 교육적 가치로도 인기가 높다. 잠수함 옆 광장에는 참전용사들의 이름을 담은 승전 탑이 그들의 넋을 위로하며 승리를 기념하고 있다.


       C-56잠수함(Подводная лодка С-56)193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작되어 파나마해협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임무를 수행하며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군함 10척을 침몰시키는 전공을 세웠으며, 당시 함장과 승무원들은 소비에트연방의 영웅으로 칭송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북해로 이동하여 훈련용으로 쓰이다가 잠수함으로 생명을 다하고 1975년 다시 이곳으로 옮겨져 잠수함의 연혁과 자료 등의 전시장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잠수함은 소비에트연방 시절 연방으로 부터 훈장을 2번이나 수여받았다고 한다. 어떤 곳에서도 보기 힘든 잠수함 내부 구조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잠수함 뒤 부분에 설치된 입구를 통해 내부를 들어가면, 먼저 당시 사용했던 군복과 장식들, 잠수함 축소 모형, 그리고 전쟁영웅들의 이름과 전사자 명단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물을 보고 좁은 통로를 거쳐서 앞쪽으로 향하면, 통제실, 기관실, 조타실, 어뢰 발사관 등 잠수함 내부를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잠망경은 이미 그 기능을 잃은 것 같다. 입장료가 주말엔 100루불, 주중엔 50루불이다.


       뜻밖의 동상을 만났다. 솔제니친(1918.12.11.~2008.8.3.)의 동상이다. 왜 여기에 그가 서 있을까? 알아보니 이유가 있구나. 오랜 망명생활을 끝낸 솔제니친은 1994, 20년간의 미국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환할 때 이곳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서 러시아로 귀국했다고 한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갔단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의 대문호 솔제니친과 관련이 깊다. 소련 시절,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반체제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다. 그는 1945년 스탈린을 비판한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8년간을 감옥과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보냈다.


       역 방향으로 걸어간다. 제독의 흉상이 보인다. 해군 사령부 건물이 높게 버티고 있다. 그 앞에는 기념비들이 있고 해군 함정들이 정박해 있다. 사람들이 많다. 역 앞에 도착하여 율브린너 동상을 찾아갔다. 율 브린너와 블라디보스토크, 아니 러시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여기에 와서 처음 알았다. 율 브린너 상을 만나니 반가웠다. 율 브린너(1920.7.11.~1985.10.10.) 집안은 이곳의 부호였단다. 바로 뒤의 3층 건물이 율 브린너의 생가다. 율 브린너는 이곳에서 광산기사인 아버지와 인텔리겐치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 할머니는 몽골인 이었으며, 조상 중에 로마인의 혈통을 가진 사람도 있었단다. 그의 아버지 보리스 브리네르는 대한제국으로부터 목재 채굴권을 얻어 부를 얻었으나, 러시아 혁명으로 몰락하여 광산기사로 생계를 근근이 이어갔다고 한다.


       율 브린너가 3살 때 부모가 이혼하였고, 이후 만주와 조선, 일본을 오가며 살다가, 프랑스에 정착하였고, 1940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왕과 나>, <십계> 등에 출연했고,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기도 하였고, 1956년 아카데미 최고 배우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배우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러시아 혁명으로 프랑스, 미국 등으로 계속 이주하다가 결국 스위스 국민으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폐암으로 사망하기 직전 공익광고에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이제 떠나가지만 여러분께 이 말만은 해야겠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마십시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담배만은 피우지 마세요.

     

       건너편 미술관(Primorskaya Gosudarstvennaya Kartinnaya Galereya) 건물의 유리가 우리의 모습을 반사하여 보여주고 있다. 사진을 찍어본다. 다시 역으로 걸어온다. 레닌 광장 옆에 있는 식당 건물 아래에는 슈퍼가 있다. 입구에 아기 그림이 있는 초코렛 광고판이 크다. 슈퍼에 들어가 물과 요플레를 샀다. 다시 역으로 왔다. 기차역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역사로 가서 내일 공항으로 가는 기차표를 알아보았다. 미리 예매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요금은 230루블이다. 역 앞으로 와서 17번 버스를 탔다.

 

       뻬르브야 레치카 정류장(1-ya Rechka)을 찾아간다. 신한촌 기념비가 있다는 곳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무사히 정류장을 잘 찾아 내렸다. 길을 건너 커다란 쇼핑몰(Pervorechenskij market)이 있는 곳으로 건너갔다. 쇼핑몰 뒷길 하바롭스크(Khabarovskaya)거리를 따라 무심코 걸어간다. 이 교차로가 예전에 신한촌의 입구였다고 한다. 그런데 길이 두 갈래로 나눠진다. 아래 길로 걸어간다. 한참을 가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르스카야 길로 나눠지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너무 많이 왔나보다. 이동휘 선생의 자택이 있었다는 엘레나(ЕЛЕНА) 상점이 나타난다, 말년에 이동휘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의 자택으로 옮겨졌다가 131일 죽었고, 24일 블라디보스토크 피르바 야레츠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기념비를 찾지 못했다. 뭔가 이상해서 이번에는 윗길로 돌아왔다. 도로 초입에 클레버 마트가 있고 그 맞은편에 기념비가 있었다. 신한촌은 일제 강점기에 대한민국 유민이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 잡고 있던 한인 집단 거주지를 말한다. 일명 신개척리라고도 말하며, 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는 국외 독립운동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런 집단 거주지가 생기게 된 데에는 시 당국이 늘어나는 한국인 유민을 위해서 집단 거주지를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이 당시 한인 마을의 이름이 개척리였다. 여기에서는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해 장지연 선생이 주필로 활약한 해조신문사가 1908년 자리를 잡았고, 뒤이어 이상설, 신채호, 장도빈 선생 등이 이곳에서 권업신문을 냈다.


       그러나 1911년 러시아 당국은 페스트 발생을 막는 것을 구실로 첫 한인 마을이었던 개척리를 강제로 소개시켰고 , 이후 시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지금의 하바롭스크 거리 일대로 옮겨서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이후 이곳은 새로운 한인 사회로 상장하여 최전성기에는 1만 명의 주민과 각종 독립운동 단체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신한촌은 일제 강점기 초기에 항일 민족 지사들의 집결지가 되었고, 나아가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기지로 발전하였다. 당시 이곳으로 망명하여 활동했던 인물로는 이범윤, 홍범도, 유인석, 이진룡 등의 독립군 지도자들이 있었고 이상설, 이위종, 이동녕, 안창호, 박은식, 신채호, 이동휘, 장지연 등의 지식인이 있었다.


       당시 신한촌에서의 1910년대 일제 강점 초기 한인의 활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권업회의 항일 민족 운동이었다. 권업회는 1911년에 결성되어 3년여에 걸쳐 활동한 한인결사인데 민중계몽과 민족주의, 실력배양 등을 통해 한인의 정치적 위치를 격상 시키고 나아가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에 나서는 것을 그 목표로 하였다. 그 계획의 연장선상에서 1914년에 대한광복군 정부가 이곳에서 창설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1차 대전 참전과 함께 탄압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그 외에 민중계몽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고, 자치회를 결성하여 신한촌 내의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자주적인 한인사회의 노력과 독립운동은 러시아의 1차 대전 참전과 이어지는 볼셰비키 혁명의 와중에서 힘을 잃고 말았으며 그 후 독립운동의 중심은 중국 땅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후 1937년에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해 신한촌은 자취를 감추고, 현재는 아파트 사이로 세워진 기념비만이 이 자리를 증명해 주고 있다. 하바롭스크 26번지라는 글이 붙어있다. 신한촌 기념탑이다. 이 화강암은 한국에서 직접 공수한 거라고 한다. 고려인, 조선족, 해외동포들. 나라가 망해서 떠돌았던 이들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독립운동 참여 여부를 떠나 이 정도의 정성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곳 신한촌은 독립운동의 요람일 뿐 아니라 교육, 언론, 문화의 중심지로서 지금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의 근원지이며 마음의 고향이다. 그러나 신한촌이 형성된 지 100여년,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흩어진지 60여년이 지나도록 기념물 하나 없이 역사의 의전으로 잊혀져가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다. 이에 해외 한민족 연구소에서 적극적으로 주선하여 여러 사람들의 협조로 이 기념비가 세워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가장 왼쪽은 북한, 가운데는 남한, 가장 오른쪽은 해외동포라고 한다. 한국에서 다녀간 학생들이 작은 기념물을 만들어 걸어놓았다. 마음이 숙연해 지는 시간이다.


       돌아 나왔다. 쇼핑몰에 있는 슈퍼에 들어갔다. 유난히도 잣과 대게맛살과 세우를 많이 팔고 있다. 한국인 특별할인이라는 글씨도 보인다. 연해주 산이란다. 김밥과 김치를 파는 곳도 있다, 당장 먹을 빵과 케피르를 샀다. 숙소로 돌아와서 라면에 계란 3개를 넣어 끓여 먹는다. 종일 걸어 다녔더니 다리가 아프다. 빵과 케피르도 마신다. 피곤하다. 내일이면 우리는 한국으로 간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이구나. 짐을 정리한다.

*816일 경비- 목걸이 690, 치킨 550, 물 요플레 90, 버스비 84, 130, 케피르 50

                              계 1594루블 *20. =31,880

                                     누계 3,3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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