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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행기10 (이경우)- 에딘버러에서 벨파스트로

작성자睦園.박이환|작성시간19.01.07|조회수90 목록 댓글 0


   

# 86일 목요일 흐림

 

       오늘의 일정은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로 가는 것이다. 어제 저녁에 먹던 치킨과 사과로 아침을 했다. 밥을 먹지 않고도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새롭다. 밥과 김치를 잊어버린 지 오래된 것 같다. 주변에 있는 왕립식물원에 다녀와서 체크아웃을 하기 로 했다.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하는 숲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식물원이다. 넓은 식물원으로 각각 이름이 붙여진 정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1년 내내 언제 방문해도 그 계절의 꽃과 나무가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으며 온실도 있어서 절대 실망할 일은 없단다. 어느 식물에나 꼬리표가 붙어있어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물론 영어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기억에 남는 산책코스가 될것이라고 한다.


       오후 3시에 벨파스트행 버스를 타기 때문에 오전은 이곳 에든버러에서 지내야한다. 아침 8시에 서둘러 왕립공원으로 갔다. 겨우 정문을 찾았는데 문이 닫혀있다. 오전 10시에 문을 연단다. 비가 조금 내린다. 우산을 펼쳐들고 숙소로 돌아섰다. 숙소에서 짐 정리를 하고 계란 15개를 삶았다. 소풍가는 기분으로 계란을 챙겼다. 여행도 소풍이다. 소풍이 여행이다. 여행에 대해 생각게 한다. 이곳 에든버러 출신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여행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어떤 목적지에 가려고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기위해서 여행한다. 여행을 위해서 여행한다. 중요한 것은 움직이는 것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그리고 보물섬으로 알려진 작가다. 갈수 있는 마음과 움직일 수 있는 건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배낭을 정리해서 메고 나왔다. 10시에 체크아웃을 했다. 날은 개어 비는 그쳤다. 다시 공원으로 갔다. 등에 진 배낭이 묵직하다. 수목원은 입장료가 없다. 들어가니 조용하다. 산책길 옆에 골프장 그린 같은 모습으로 잔디를 잘 가구어 놓았다. 골프장에 가고 싶다. 이곳 에든버러는 골프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세인트 앤드루스. 한 여름에도 바람이 강하게 부는 동쪽 해안에 유서 깊은 골프장이 있는 세인트 앤드루스는 골프팬이 아니더라도 매료될 정도로 아름답단다. 골퍼들이 동경하는 올드 코스의 페어웨이는 인공이 가해지지 않고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려서 만든 곳으로 신이 만든 코스라고 불려진다. 1754년에 Royal and Ancient Club의 맴버에 의해 탄생하게 된 이곳은 골퍼들에 있어서 이른바 성지이다. 세인트 앤드루스에는 현재 여러 개의 골프장이 있는데 전 잉글랜드 오픈이 개최되는 곳은 올드 코스뿐이다. 골프 박물관도 있다. 골프의 역사를 전부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왕이나 여왕의 골프와 관련된 물건, 골프 클럽의 형태 변화 과정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조금 높은 고지대의 코스 주변은 산책하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예약하고 나서 몇 개월 기다린 끝에 정식으로 플레이의 꿈을 이룬 신사들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살피면서 걷는 것도 재미있단다. 이 도시는 골프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유물도 많다. 종교개혁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것도 의미있는 도시다. 가보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는다.


       식물원은 방문객이 적어 조용하다. 잘 가꾸어져 있다. 정식이름이 에딘버러 왕실 식물원 (Royal Botanic Garden)이다. 1607년에 만들어졌단다. 꽃들이 풍성하게 펼쳐져 있다. 질서가 있다. 책 길은 잔디와 거목들로 잘 어우러져 있다. 중앙 나지막한 언덕에는 3층 짜리 주택이 보인다. 그 앞에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진다. 아내는 나무 그늘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쉰다. 카메라를 들고 식물원 탐방을 나섰다. 핑크 빛, 은빛, 에메랄드빛, 특이하게 꼬인 조형물이 곳곳에 있어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유리 온실이 있는데 여기만 입장료를 받고 있다. 열대 식물들이 가득하다. 이끼류나 작은 식물들도 잘 분류되어 가꾸어지고 있다. 아이슬랜드에서 보았던 작은 식물들이 모두 모여 있는 것 같다.울타리로 가꾸어진 거대한 식물군은 질서 있게 잘 다듬어져 있고 커다란 구멍도 있어 입구역할을 한다. 그 옆에 아이들이 스케치 북을 하나씩 들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커다란 고목 아래에서는 나이든 아주머니들이 멋지게 폼을 잡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모두 진지하다. 여가 활동으로 그림을 배우는 것 같다. 가르치는 영감님이 자상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아주 멋진 건물 보타닉 샵도 있다. 유리와 원목을 이용해 만들어진 2층 자리 건물인데 꽃과 관상용 식물, 기념품등을 팔고 있고 식물에 관한 전시회도 열고 있다. 꼬 사진이 멋지다. 이건물이

John Hope Gateway 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편안해 보이는 카페도 있다. 원목으로 꾸며 놓은 장식과 계단이 인상적이다.


       에딘버러 왕실 식물원은 식물학자들과 원예학자들이 다양한 식물을 수집하고 최근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 또한 에딘버러 시민들의 편안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3.600가지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 에딘버러 왕립 식물원은 식물의 다양성과 보존성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다. 식물원안에는 암석원, 고산식물실, 온실, 퀸마더 기념정원(Queen Mother’s Memorial Garden), 수목원등 다양한 분야의 정원에 있는 수목이 눈에 들어온다. 식물원에는 3개의 입구가 있다. 그 중 2009년 새로 건립한 서쪽 입구(John Hope Gateway)가 제일 멋있다정원을 산책하면서 원산지가 다른 여러 종류의 꽃과 식물을 보면서 아름다운 정원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다람쥐에게 먹이를 주는 것도 즐거웠다. 발이 피곤하여 나오기 전에 식물원 중앙 언덕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에딘버러 성을 바라볼 수 있어 좋다. 나무 그늘은 약간 썰렁하다. 엄청 넓은 잎을 가진 식물이 제일 인상적이다.


       이제 시내로 걸어간다. 등에 맨 배낭이 무겁다. 시간이 좀 남아 스콧 기념비 아래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삶은 계란과 복숭아와 과자가 점심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우리 밭에 매어 있는 개와 같은 종류가 눈에 들어온다. 잉글리쉬 쉽독이라는 종류다. 털이 엄청 길다. 색깔이 다양한데 영국에서 양치기 개로 알려져 있는데 이제는 애완용으로 많이 키우는 것 같다. 아래 잔디밭에는 햇빛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흰 수염을 가진 영감님이 백파이프를 불고 있다.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인 타탄을 입고 있다.


       버스 터미널로 갔다. 깨끗하고 조용하다. 오후 3시에 벨파스트행 버스를 탔다. 고속버스는 시티 링크(City Link)라는 노란색 스코틀랜드 운행 버스다. 923번 버스다. 고속버스는 조용히 터미널을 빠져 나간다. 이제 북아일랜드로 가는 것이다. 글래스고를 경유해서 간다. 국부론을 발표하여 자유주의 경제학을 확립시킨 애덤 스미스는 글래스고 대학에서 공부한 학자다. 글래스고는 스코틀랜드 제1의 인구를 자랑하는 대도시이며 경제, 산업의 중심지로서 한 때는 세계를 리드한 적도 있다. 도시로서의 역사도 깊어 6세기경에는 이미 그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도시의 중심이었던 교회가 있던 장소는 Glas Cau(녹색의 땅)라고 불리었는데 그것이 글래스고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1300년에 왈라스가 잉글랜드 군을 격파하고, 1451년에 대학이 창립되고, 1568년에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의 군대가 참패를 당하는 등 이곳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도 엄청 많다. 이는 글래스고가 요지였다는 증거다. 공업도시이면서 오페라, 발레, 오케스트라의 콘서트와 엔터테인먼트도 활발하게 열리는 곳이다.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항구에 차가 들어간다. 커다란 유람선이 창밖에 보인다. 오후 630분 경에 항구에 도착했다. 차에서 모두 내려 본인의 짐을 들고 선착장으로 간다. 승선 준비를 한다. 여권과 표를 보여주고 통과했다. 우리가 타는 배는 커다란 유람선으로 Stena Line 이다. 사람들이 이동하는 대로 따라서 배에 승선했다. 실내 공간은 편안하고 고급스러웠다. 날씨가 흐리다. 배는 곧 출 발한다. 서서히 움직인다. 아무데나 의자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창밖은 바다 색깔이 회색이다. 수평선 끝에는 같은 배가 한 대 함께 간다. 영국기가 펄럭인다.


       밤이 되어 어두우니 실내가 밝아진다. 오락실과 식당 그리고 매점에는 꼬마들과 부모들로 붐빈다. 730분에 출발한 배는 밤 10시가 되어 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 도착했다. 금방 도착한 기분이다. 배에서 내려 우리가 타고 온 버스에 다시 올라탔다. 버스는 어둠속을 지나 버스터미널에 내려주었다. 창밖의 거리풍경은 어둡고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버스터미널에서 지도를 얻어 우리 숙소가 있는 곳을 표시했다.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길을 물으니 사람들이 친절하게 알려준다. 거리에는 도로 이름이 적혀있어 찾기 쉬웠다. 이렇게 우리는 북아일랜드에 도착했다.


       영국을 이루는 네 지방 가운데 하나. 아일랜드 섬 북동부에 있는, 영국에 속하는 여섯 주를 이른다. 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와 같은 섬이 위치하면서도 아일랜드가 아니고 왜 영국연합왕국에 속하는 것일까?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는 왜 다른 나라가 되었을까? 아일랜드 섬에는 일찍이 켈트족이 살고 있었다. 헌데 12세기 이후에 영국귀족과 영주들에게 정복당한다. 17세기에 들어서자 영국은 북부 얼스터 지역을 중심으로 얼스터 식민지를 만든다. 이는 신교 신도를 확보하기 위한 식민지였다. 이런 이유로 남부와는 이질적인 지역을 형성한다.

 

            그러던 중 1919121일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의회가 처음 개원하던 날, 영국 경찰관 2명이 아일랜드 의용군이 쏜 총에 맞아 숨지는 일이 발생한다. 영국과 아일랜드 전쟁이 시작이다. 이 후 2 년 반 동안 전쟁이 벌어지고 마이클 콜린스가 등장해 아일랜드 반군의 지도자로 활동한다. 이 와중에 영국군은 아일랜드를 약탈하고 구타와 살인, 방화 등 무자비한 만행을 저지른다. 이에 아일랜드 인들은 분노하여 독립을 원했다. 결국 아일랜드 공화국이 전쟁에서 승리해, 19217월 양측은 휴전하기로 협상한다. 1921126일 앵글로-아이리시 조약에 서명하는 것으로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 다만 그 독립은 남부의 26개 주에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북부 신교지역인 얼스터 6개주는 여전히 영국 영토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 얼스터 지역에서 60%를 차지하는 신교 그룹과 나머지 구교 그룹의 대립이 시작된다. 신교 그룹은 아일랜드를 식민지로 만들었던 영국인들이다. 이들은 당연히 이곳이 영국령이기를 바랐고, 아일랜드 인들은 신교 그룹의 차별과 억압에 평화적으로 대항했다. 하지만 이들의 운동은 심한 탄압을 받았고, 결국 폭력 사태로 이어졌다. 이것이 북아일랜드 분쟁의 시작이다. 이때 IRA(Irish Republican Army), 아일랜드 공화국군이 등장한다. 영국은 아일랜드가 독립하자 무력으로 북아일랜드 지방을 통치하기 시작한다. 아일랜드 반란군을 이끌었던 마이클 콜린스는 영국령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통일을 요구하며 이 단체를 이끌었다. 그러니까 IRA는 나누어 진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단체였다. 이후 IRA는 영국에 대한 테러 활동으로 이어간다.


       1972130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분쟁은 심화되었다. 영국 정부가 모든 시위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시위대 진압을 위해 특수부대를 파견하면서 민간인이 사망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내전은 1998410성 금요일' 협정이 맺어지면서 종결된다. 협정이후 1998410일 런던에서 더블린 당국 및 북아일랜드의 구교와 신교 정파들이 합의한 평화협정의 찬반을 묻는 투표가 진행되었다. 개표 결과, 압도적인 지지로 북아일랜드가 영국에 속해 있다는 것으로 재확인되었다. 이렇게 영국은 북아일랜드에 속하게 된다. 계속되던 IRA의 테러도 198511월 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소강상태에 들어갔고 이후 1999년 북아일랜드 자치정부가 수립된다. 2001IRA는 무장해제를 선언한다. 그러나 아직도 신교계 주민과 가톨릭계 주민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마직물, 조선 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중심 도시는 벨파스트이다.


       벨파스트는 래건 강이 벨파스트 호로 흘러들어가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1888년 왕의 칙허를 받아 특권도시가 되었으며 1920년에 아일랜드 정부법이 통과됨에 따라 북아일랜드 지방정부의 수도가 되었다. 벨파스트는 석기·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철기시대 성채들의 유적이 도심 부근의 언덕에 남아 있다. 1177년경에 장 드 쿠르시(얼스터를 정복한 노르만인)가 이 언덕에 세운 한 성채는 17세기 초반까지 보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도시의 이름은 게일어로 '강의 도하지점'을 뜻하는 'Béal Feirste'에서 유래했다. 이곳의 근대 역사는 1611년에 아서 치체스터 남작이 새로운 성채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1613년에 시가 되었으며 1641년 아일랜드 폭동이 일어났다. 1685년에는 2,000여 명의 주민 중 대부분이 벽돌·로프·그물·펌프 등의 제조업에 종사했다. 1730년대 후반에 성채가 파괴되었지만, 이곳은 주요교량도시인 리즈번과 항구인 캐릭퍼거스를 대신하면서 경제적으로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17세기 후반에는 영국의 윌리엄 3세가 후원한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이곳에 피신하여 리넨 제조업을 발달시킴으로써 얼스터 리넨 산업의 시장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 면직물 산업을 정착시키려는 시도는 곧 실패했지만, 뒤이은 리넨의 방적·직조 공정의 기계화는 이곳을 세계적인 리넨 산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리넨(inen)은 아마의 섬유로 짠 얇은 직물이다.


        17세기에 이 도시는 소규모 조선업자들의 활동으로 붐비는 항구였다. 이곳의 조선업은 월리엄 리치가 조선소(1791)를 건설한 후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산업혁명 이후의 주요 조선회사는 하런드앤드울프사(불운의 '타이태닉 호'를 건설)로 이 회사 소유의 조선소는 현재 면적이 120에 이르고 길이가 300m나 되는 선박을 조선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고 있다. 1975년 이후 이 회사는 완전히 북아일랜드 상공부의 소유가 되었으며 초대형 유조선 이외에도 다리 건설에 쓰이는 강철판을 생산한다. 이 도시는 항구로서도 계속 발전해왔으나, 1941년의 공습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1968년 얼스터에서 로마 가톨릭교도들의 권리회복 운동이 시작되었고, 1969년부터는 벨파스트에서 거리 폭동과 강화된 폭력이 행사되었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난동자들을 단속하기 위해 영국군이 투입된 이후에도 로마 가톨릭 및 개신교 과격주의자들의 총포·폭탄 사용은 늘어났으며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급진파들은 민간인·경관·군인들을 살해했다. 1980년대까지 폭력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벨파스트는 북아일랜드의 도·소매·교육·상업·오락·서비스 중심지이다. 주요수출품은 선박·항공기·농산물·가축·리넨 등이다. 그밖에 담배·식품가공업이 이루어진다. 교육기관으로는 벨파스트 퀸 대학교(1845년에 퀸스 칼리지로 설립됨장로교대학(1847)·로열벨파스트아카데미(1810) 등이 있다. 북아일랜드의 행정관청 소재지인 스토몬트가 가까이에 있다. 북동쪽으로 21떨어진 앨더그로브의 공항에는 외국의 주요도시들로 운항하는 항공노선이 있다. 이곳은 배로 잉글랜드의 헤이섬·리버풀·맨체스터,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아드로슨, 웨일스의 홀리헤드와 연결된다. 1971~81년에는 종교적인 폭동과 외곽지역의 계획된 경제발전으로 이곳의 인구가 심각하게 감소했다.

 

      힘들게 숙소를 찾았다. 10시경이다. 숙소 이름은 윈더미어 게스트 하우스다. 3층 빌라 스타일의 가정집이다. 기다리고 있던 주인 할머니는 우리를 친절하게 맞아주신다. 주인 할머니에게 내일 투어를 부탁해 두었다. 자이언트 코즈웨이 투어다. 오래된 집인데 제법 안락하게 꾸며져 있었다. 내일 묵을 숙소를 찾아보았다. 생각보다 적당한 숙소가 없었다. 시내 중심가에 있다고 생각한 숙소를 겨우 찾아 예약을 했다.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는 내일 빈 방이 없었다. 늦은 밤이다. 일단 자기로 했다.

    숙소 주소 Windermere Guest House, 60 Wellington Park, 벨파스트. BT96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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