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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탐방및 인물

페르디난드 마젤란

작성자박이환|작성시간11.09.23|조회수131 목록 댓글 0

2년전에 '마젤란'에 대하여 간단하게 글을 올린 기억이 있습니다. 인물세계사로 본 '페르디난드

마젤란' 에서 좀더 깊이 있는 그의 행적과 의미를 되세겨 보십시요.

어느 역사학자의 말마따나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유럽의 식탁 위 풍경은 그야말로 단조로운 흑백이었다. 음식의 맛이라곤 싱겁거나 짜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던 유럽의 식탁이 지금처럼 다채로운 색깔과 그윽한 향기를 지닌 음식들로 가득 차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아시아 산 향신료의 도입이란 일대 사건이었다.

 

 

향신료는 원산지인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아랍 상인들을 거쳐 유럽에 수입되는 과정에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5세기 중반에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지중해 동부를 장악함으로써 유럽과 아시아 간의 육로무역이 단절되자, 그 대안으로 대서양을 이용한 해상무역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다. 수많은 모험가들이 동남아시아의 향료 제도까지 가는 뱃길을 개척하기 위해 바다로 나섰다. 실패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했지만, 성공하면 막대한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해상무역의 패권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선수를 친 쪽은 포르투갈이었다. 아프리카 서해안 탐사를 적극 지원한 엔리케 왕자(1394-1460)의 선구적인 노력의 결과로 1488년에는 바르톨로메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에 도착했고, 1498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 에스파냐에서는 1492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에 도착함으로써 사실상 신대륙의 발견자가 되었다. 그리고 1519-1522년에 에스파냐에서는 사상 최초로 세계일주 원정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니, 그 중심에는 바로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있었다.

 

마젤란 원정대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빅토리아 호

 

당시의 모험가들이 종종 그러했듯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똑같은 이름이 다르게 불리는 일이 허다했다. 가령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고국인 이탈리아에서는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원정 후원국인 에스파냐에서는 ‘크리스토발 콜론’으로 불렸다. 마찬가지로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은 영어식 철자며, 그의 고국인 포르투갈에서는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Fernão de Magalhães), 원정 후원국인 에스파냐에서는 ‘페르난도 데 마가야네스’(Fernando de Magellanes)로 불렸다. 하지만 보통은 영어식 철자가 유명하므로 이 글에서도 ‘페르디난드 마젤란’으로 통일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1480년에 포르투갈에서 하급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에 왕궁에 들어가 시동으로 일했다. 1495년에는 인도 원정에 참가했고 8년 동안 동남아시아 여러 교역소에서 해상무역 경험을 쌓았다. 1513년에는 모로코에서 전투 도중에 무릎을 다쳤고, 그로 인해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후 그는 향료 제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겠다는 열망에 불타서 포르투갈 왕실에 세 번이나 원정 후원을 요청했지만 연이어 거절당했다. 고민 끝에 마젤란은 다른 나라를 찾아가 방법을 찾아보기로 작정했다.

 

마젤란이 고국인 포르투갈을 버리고 에스파냐와 협력해 원정을 떠난 것은 마치 변절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모험을 꿈꾸는 수많은 탐험가들이 외국 정부의 후원을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가령 이탈리아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에스파냐 정부의 후원을 받았고, 이탈리아인 아메리고 베스푸치 역시 서로 앙숙인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양쪽 모두에서 후원을 받았다. 마젤란의 원정대만 해도 에스파냐인과 포르투갈인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프랑스인, 영국인 등 여러 국적의 선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517년에 에스파냐의 세비야에 도착한 마젤란은 국왕 카를로스 1세에게 접근했다. 당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교황의 중재에 따라 서경 46도 30분을 기준으로 각각 동쪽과 서쪽에 대한 영유권을 소유하기로 합의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에스파냐로서는 포르투갈의 영역인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는 기존 항로 대신, 자신들의 영역인 남아메리카 하단을 우회하는 신항로를 통해 향료 제도로 가자는 마젤란의 제안이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나친 낙관은 금물이었다. 과연 그런 항로가 있는지 여부는 물론이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목적지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518년에 카를로스 1세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젤란은 곧바로 원정 준비에 착수했다. 트리니다드, 산안토니오, 콘셉시온, 빅토리아, 산티아고라는 이름의 함선 다섯 척으로 이루어진 ‘몰루카 함대’(목적지인 몰루카 제도에서 따온 이름)에는 모두 260명의 선원이 승선했다. 마젤란이 에스파냐의 후원을 받아 원정에 나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포르투갈 측은 뒤늦게야 회유와 협박을 동원해서 마젤란에게 원정 포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마젤란은 이런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격분한 포르투갈 정부는 마젤란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고, 그를 붙잡기 위해 훗날 대서양이며 향료 제도로 추적대를 급파했다.

 

1년여의 준비 과정을 거친 원정대는 1519년 8월 10일에 세비야를 떠났다. 일주일 뒤에 에스파냐 남단의 항구도시 산 루카르 드 바라메라에 도착한 일행은 대서양에 접어들기 직전 그곳에서 마무리 준비를 했다. 이때 마젤란은 24일자로 미리 유서를 써서 남겼다. 1519년 9월 20일, 마젤란의 원정대는 드디어 역사적인 첫 걸음을 내디뎠다. 대서양을 횡단하던 도중에 함대는 두 달 가까이 폭풍에 시달리며 악전고투했다. 하지만 마젤란에게는 자연의 위력보다도 더 심각하고 더 고질적인 고민거리가 있었다. 바로 부하들의 반항이었다.

 

마젤란의 선원 가운데에는 에스파냐인이 절대적으로 많았으며, 이들은 마젤란을 비롯한 포르투갈인 동료들에게 은연중 적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마젤란은 신항로를 개척한다는 임무를 줄곧 비밀에 부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의혹을 샀다. 네 척의 함선을 지휘하는 선장들도 마젤란에게 불만을 품었다. 특히 왕의 측근으로 마젤란을 감시하기 위해 원정에 동행한 후안 데 카르타헤나는 노골적으로 총지휘관의 명령에 불복했다. 분노한 마젤란은 카르타헤나를 체포했다가 다른 선장들의 만류로 풀어주었는데, 이는 머지않아 더 큰 반란의 불씨가 되었다.

 

출발 4개월 만인 12월 13일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한 원정대는 본격적으로 남쪽의 우회 항로를 찾아 다닌다. 그러나 아무 성과 없이 시간만 흐르자 선원들의 불만은 점점 커졌다. 1520년 3월 31일, 원정대는 남반구의 겨울을 나기 위해 훗날 푸에르토 산 훌리안이란 이름이 붙여진 자연항에 닻을 내린다. 바로 이곳에서 선원들의 불만은 결국 반란으로 폭발했다. 4월 2일, 다섯 척의 함선 가운데 세 척이 반란자의 손에 들어갔다. 마젤란은 협상을 도모하는 척 하면서 부하를 시켜 반란 주모자를 제거하고 함선 한 척을 탈환한 다음, 세 척의 배로 항구를 봉쇄하고 나머지 두 척의 항복을 받아냈다.

 

마젤란 해협 지도

 

재빠르고 단호한 조치로 반란을 신속히 제압한 마젤란은 카르타헤나를 비롯한 주동자를 가혹하게 처벌했고, 사형 선고를 받은 40명의 선원은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면해 주었다. 10월 21일, 원정대는 남아메리카에 도착한 지 무려 10개월 만에 훗날 마젤란 해협으로 알려지게 된 곳의 입구를 발견한다. 한 달 만인 11월 28일, 함대는 해협을 무사히 통과해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낯선 바다에 들어섰다. 마젤란은 이전까지의 바다와는 달리 훨씬 넓고 깊고 잔잔한 이곳에 ‘태평양’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함선의 숫자는 세 척으로 줄어 있었다. 산티아고 호는 해협에 들어서기 직전에 그만 좌초했으며, 산안토니오 호는 명령에 불복하고 단독으로 귀향길에 올랐던 것이다. 산안토니오 호의 이탈은 원정대에 큰 타격을 가했다. 한편으로는 그 함선에 식량이 많이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귀환한 선원들이 원정이 실패했다고 단언하며 모든 책임을 마젤란에게 덮어씌웠기 때문이다. 덕분에 에스파냐에 남아 있던 마젤란의 가족은 당국의 탄압을 받았으며, 이런 오해는 마젤란의 사후까지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원정대는 해협을 통과한 지 4개월 만인 1521년 3월 16일에 태평양을 가로질러 훗날의 필리핀 제도에 도착한다. 마젤란은 본격적으로 원주민과 접촉해 식량과 정보를 얻는 한편,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에 열을 올린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마젤란은 원주민 간의 분쟁에 불필요하게 끼어드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한다. 원정대의 막강한 무력을 과신한 마젤란은 우호 관계를 맺은 부족을 거들어 다른 부족을 정벌하러 나선다. 그러나 막탄 섬으로 쳐들어간 마젤란과 부하들은 원주민의 거센 반격으로 인해 패배했고, 마젤란은 그곳 해안에서 원주민의 칼에 난자 당해 죽고 말았다. 1521년 4월 27일의 일이었다.

 

 

전기작가 로런스 버그런은 마젤란의 허망한 죽음이 지나치게 무력에 의지해 자만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제까지의 항해에서 마젤란은 여러 번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폭풍에서 괴혈병에 이르는 자연 재난은 물론 선상 반란이라는 위기도 극복했다. 결국 그가 극복하지 못한 가장 큰 장애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총지휘관을 잃은 함대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향료 제도를 향한 여정은 계속되었지만 연이은 원주민과의 충돌로 상당수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콘셉시온 호도 완전 파손되었다. 1521년 11월 8일, 두 척의 함선에 나눠 탄 원정대는 드디어 몰루카 제도에 도착했다. 에스파냐를 떠난 지 무려 27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원정대는 귀한 향신료를 헐값에 잔뜩 사들여 귀향길에 올랐다. 트리니다드 호는 중도에 포르투갈 함대에 나포되었지만, 빅토리아 호는 1522년 9월 6일, 천신만고 끝에 고국에 도착했다. 함선 5척과 선원 260명으로 이루어졌던 원정대의 규모는 3년여 만에 함선 1척과 선원 18명으로 줄어들었다.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에 성공했다는 명예로운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나 배의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배에는 무엇보다도 값진 보물이 들어 있었으니, 바로 유럽에서도 최고로 치는 향신료 정향이었다. 그 한 척에 실려 있는 정향만 팔아도 원정에 들어간 비용을 모두 건지고 심지어 막대한 이익을 남겼을 정도였다.

 

마젤란의 초상(왼쪽)과 라푸라푸의 동상(오른쪽)은 이 탐험가를 바라보는 양극단의 시선을 상징한다

 

하지만 원정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마젤란에 관한 평가는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고국인 포르투갈에서는 반역자 취급을 받았고, 후원을 받은 에스파냐에서도 자칫 원정을 수포로 만들어버릴 뻔했던 위험인물 취급을 받았다. 원정대의 일원이었으며 마젤란과도 절친했던 베네치아 출신의 안토니오 피가페타의 비교적 공정한 항해 일지가 간행되었지만 그런 여론을 바꾸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중에 마젤란의 항로를 따라간 후속 원정대가 연이어 큰 손실을 입고 돌아오자, 그제야 사람들은 갖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비교적 적은 손실만으로 목적지에 도달한 마젤란의 비범한 능력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마젤란은 워낙 꼼꼼한 성격이어서 배에 싣는 물품을 일일이 확인하고, 종종 말단 선원들의 일까지 직접 챙겨주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원정 내내 부하들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지 못했고, 항상 반란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마젤란의 성격에 대해서는 성미가 급하고 분별이 없다는 평가와 함께, 지나치게 고지식한 것이 탈이라는 평가도 있다. 나아가 그는 워낙 왜소하고 볼품없는 외모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종종 남에게 얕잡아 보이곤 했다. 포르투갈에 살다가 중년이 되어서야 에스파냐로 건너왔기 때문에 평생 에스파냐어에 능통치 못했다는 것 역시 원정대 지휘관으로서는 약점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마젤란의 세계일주’라는 표현은 적절치가 않다. 왜냐하면 마젤란은 애초에 세계일주를 의도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도중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원정대의 세계일주는 그 이전까지 서양인들이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트렸다.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증명되었고, 여러 대륙과 항로에 관한 여러 가지 잘못된 지식들도 수정되었다. 나아가 에스파냐는 마젤란의 위업을 계기로 포르투갈을 앞서는 해양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로런스 버그린은 세계일주보다도 훗날 마젤란 해협으로 알려진 곳의 발견 및 통과가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단언한다. 1914년에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 해협은 무척이나 중요한 통행로로 각광을 받았다.

 

유럽에서는 여전히 위대한 탐험가로 칭송되는 마젤란이지만, 막상 그가 최후를 맞이한 필리핀에서는 침략자에 살인자로 기억된다. 그를 죽인 원주민 추장 라푸라푸는 시신을 반환해 달라는 원정대의 요청을 거절했고, 그리하여 마젤란은 무덤은커녕 변변한 유품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가 사망한 막탄 섬에는 오늘날 마젤란의 동상 대신 라푸라푸의 동상이 서 있다. 기념비 한쪽에는 “포르투갈의 위대한 탐험가 마젤란이 살해된 곳”이란 설명이, 또 한쪽에는 “위대한 족장 라푸라푸가 마젤란을 죽이고 그의 군대를 쫓아냈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마젤란에 대한 극단적인 시각차를 이것보다 더 잘 보여주는 증거가 또 있을까.

 

 

마젤란의 전기로는 로런스 버그린의 <세상의 끝을 넘어서: 마젤란의 해양 오디세이>(박은영 옮김, 2006)가 비교적 최신작으로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다만 인명이나 지명 등의 고유명사가 모두 영어식으로 되어 있어서 인용시에는 다시 한번 정확한 명칭을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애초에 책을 만들 때에 좀 더 유의했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의 끝을 넘어서불멸의 탐험가 마젤란위대한 항해자 마젤란

 

슈테판 츠바이크의 <불멸의 탐험가 마젤란>(이내금 옮김, 자작나무, 1996)은 오늘날의 본격 전기에 비하자면 비교적 가벼운 느낌이 드는 것이 한계이지만, 저자 특유의 통찰력이 빛나는 문장이 백미라고 하겠다. 베른하르트 카이의 <위대한 항해자 마젤란>(박계수 옮김, 한길 HIstoria, 2003)은 본격 전기라기보다는 전기소설이라고 해야 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아울러 여기서 언급한 책 중에서는 유일하게 마젤란을 포르투갈 식 이름인 ‘마갈량이스’로 줄곧 표기한 점이 특징이다.

 

마젤란의 세계일주 원정에 동행한 이탈리아인 안토니오 피가페타의 일지는 이 사건의 일차적 사료로 오랫동안 중요성을 인정받아 왔다. 우리말 번역본은 <최초의 세계일주 >(박종욱 옮김, 바움, 2004)라는 제목으로 간행된 바 있다. 김성준의 <해양 탐험의 역사>(신서원, 2007)는 엔리케 왕자에서 조지 밴쿠버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주요 해양 탐험가들의 생애와 업적을 설명한 책으로, 이 분야의 역사에 대한 개관서로 적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마젤란 이후 향신료 입수를 위한 유럽의 해상 무역에 관해서는 가일스 밀턴의 <향료 전쟁>(손원재 옮김, 생각의나무, 2002)를 참고할 만하다. 향신료 전반에 관해서는 장-마리 펠트의 <향신료의 역사>(김중현 옮김, 좋은책만들기, 2005)와 ABC북 가운데 한 권인 <향신료>(노정규 옮김, 창해, 2000) 등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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