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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Cleopatra BC 69∼BC 30)

작성자睦園 박이환|작성시간12.02.23|조회수79 목록 댓글 0

 클레오파트라(Cleopatra) 
클레오파트라 (Cleopatra BC 69∼BC 30)

클레오파트라 7세(BC 51∼BC 30).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왕조 마지막 여왕이다.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은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왕가, 이어 시리아 설레우코스왕가에서 발견되고, 프톨레마이오스왕가에서도 여왕이름으로 종종 쓰였으나 클레오파트라 7세가 가장 유명하다.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둘째딸이었다. 재색을 겸비한 여성으로 높은 교양을 지녔고, 이집트어는 물론 여러 나라 말을 잘 구사하여 외교사절과도 통역 없이 대화하였다고 한다. 17세에 프톨레마이오스집안 관례에 따라 9세된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공동통치자가 되었으나, 곧 두 사람은 대립하여 궁정 안에서 두 파로 갈라져 싸웠으며 한때 클레오파트라쪽이 열세하여 시리아로 물러갔다.

BC 48년 M.G.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에 들어온 J. 카이사르를 만나 지지를 받아냈다. 그 결과 일어난 알렉산드리아전쟁에서 카이사르는 처음에는 고전하였으나 마침내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패배시켜 죽게 하였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5살난 막내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이집트 공동통치자로 지정하였으나, 그녀는 사실상 카이사르의 애인이 되어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았다. 카이사르의 로마개선 뒤 클레오파트라는 어린 왕을 데리고 로마를 공식방문하여 카이사르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BC 44년 3월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급히 이집트로 돌아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죽이고, 카이사리온을 공동통치자로 내세웠다. BC 42년 G.J.C. 옥타비아누스와 힘을 합하여 카이사르를 암살한 무리를 격멸한 M. 안토니우스는 이듬해 소아시아 타르소스에서 클레오파트라와 회견하였는데, 그 미모와 재기에 사로잡혀 알렉산드리아로 함께 가 연인 사이가 되었다.

BC 40년 안토니우스는 로마로 돌아와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정략결혼하여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가 끝난 듯 보였으나, BC 37년 파르티아원정을 위해 동방에 온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애정을 되찾는 동시에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그들 사이에는 남녀 쌍둥이가 태어났다. BC 36년 파르티아원정은 참패로 끝났으나 클레오파트라는 페니키아까지 사랑을 구하여 달려갔다. BC 34년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에서 승리하자 관례를 벗어나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시스여신으로 분장하여 주변 여러 나라를 속국으로 거느리고 동방 헬레니즘세계의 여왕으로 군림하였다.

이 소식은 곧 로마에 전해지고, BC 35∼BC 34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활발한 선전과 비난의 문서 싸움이 시작되어 정치문제로부터 여성관계 추문을 폭로하기에까지 이르렀다. BC 33년 안토니우스는 에페소스에 동방로마군단과 속국 군대를 집결시켰고, 클레오파트라도 군함과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BC 32년 안토니우스는 드디어 옥타비아에게 이혼장을 보냈고, 옥타비아누스는 내란형식을 피하기 위하여 클레오파트라에게만 선전포고하였다. BC 31년 악티움해전에서 서로 천하를 두고 겨루었으나 싸움중 클레오파트라가 함대를 이끌고 달아나고 안토니우스도 이를 뒤쫓아 싸움은 가볍게 끝났다.

BC 30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가 자살, 클레오파트라도 로마개선식에 끌려다니는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독사에 물려 죽었다고 전해진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등 로마의 대표적 장군 두 사람을 매혹시킨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인으로부터 <나일의 마녀>라는 악담을 들었으나 최후의 깨끗한 죽음은 높이 평가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로 알려진 B. 파스칼의 경구(警句), W.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및 그 영화화 등 헬레니즘 최후의 여왕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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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카바넬 (Alexandre Cabanel),[유죄의 선고를 받은 갇힌 자들에게 독약들을 테스트하는 클레오파트라]
                                     

 

 

 

 

기원 전 50 년경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역사상 그 어떤 여인보다 극적인 삶을 살았다.

한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그녀의 흥미진진한

 

생애와 러브스토리는 지금껏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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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 율법에 따라 남동생들과 두 번씩이나

 

결혼해 왕좌에 올랐고, 왕권을 쟁취하기 위해


남편이며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리했다.



에집트의 마지막 여왕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생애는 소설보다 더 흥미롭다.


    


클레오파트라의 생애 중에서 일반인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부분은 그녀가 로마의 지배자인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유혹한 과정이다.

당대 최정상에 오른 두 남자를 어떻게 그처럼

 

완벽하게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기원 전 48년 클레오파트라는남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후 강제로 폐위되어 유배된 상태였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침공한

 

카이사르의 막강한 힘을 빌어 왕권을 되찾는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로마의 최고 실력자인

 

카이사르와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위 그림에서 보면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를 정복한

 

카이사르가 이집트 왕궁에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몰래 그에게 접근하려던 그녀는

기막힌 계락을 떠올렸다. 스스로 양탄자 위에 드러누운 뒤


충복에게 자신의 몸을 양탄자로 둘둘 말 것을 명령했다.

충복은 어깨에 맨 양탄자를 호위 병사들에게 보인 후

집정관에게 줄 값진 선물을 가져왔다고 둘러댔다.

큼직한 양탄자는 카이사르의 눈길을 끌었고 호기심이

 

발동한 카이사르는 서둘러 양탄자를 풀게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양탄자를 펼치기가 무섭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반라의 여왕이 비너스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반한 카이사르는 연인이

 

되었음은 말한 나위가 없고 여왕의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그녀를 왕좌에 앉혔다.

여왕은 카이사르의 권력을 이용해 왕권을

 

되찾고 피맺힌 복수를 감행할 수 있었다.






그의 연인이 되어 아들 카이사리온까지 낳고 야망을 키우던

 

클레오파트라에게 찬 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원 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무한한 권력에

 

위협을 느낀 정적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음 상대로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로마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한 안토니우스를 점 찍었다.

삼두 정치인 중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 사령관 에 오른 후 동방 원정길에 나섰다는

 

정보를 입수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안토니우스를 유혹하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위의 그림에서 앨마 테디마는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크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만남을 묘사한 글을 토대로 이 그림을 그렸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첫 만남을

 

가진 장소는 타르수스다.

오늘날에는 터키의 한 지방 도시에 불과하지만


고대의 타르수스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시가지는 강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선체는 황금빛이요, 바람을 받아 크게 부풀어

 

오른 돛은 가장 값비싼 색깔인 자주색이었으며


갑판 중앙에는 금실로 수놓은 장막이 좌우로 열려 있고


그 아래 옥좌에 사랑의 여신 비너스로 분장한

 

클레오파트라가 앉았다.

노예들은 은으로 만든 노를 저으며


피리와 하프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고 배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바람을 타고 진동했다.

이 화려한 첫 만남에 안토니우스는

 

그만 혼을 뺏기고 말았다.

정신이 나간 안토니우스가 벌떡 일어서서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가득 찬 눈길로

 

클레오파트라를 바라본다.

클레오파트라는 금으로 장식된 이동 닫집 아래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아 요염한 눈초리로

 

안토니우스를 탐색한다.

안토니우스와 극적인 첫 만남을 가진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행여 안토니우스가 권태를 느낄새라 늘 새로운

 

쾌락을 개발했고 날마다 산해진미에 악사와

 

무희를 동원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런 생활이 10년이 넘도록 이어지자 클레오파트라는

연인을 아예 자신 곁에 못 박아두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려 안토니우스의 사랑이


순간적인 열정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끝내 신분과 국적, 동양과 서양이라는 인종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이국의 여왕과 혼인식을 올릴만큼

안토니우스는 철저하게 여왕의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결혼 선물로 여왕에게 엄청난

 

이권이 걸린 오리엔트 지방의 통치권을 주었다.

로마의 권력자를 애인으로 둔 덕분에 그녀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물과 권력을 소유한 여왕이 되었다.


Cleopatra


사랑에 눈이 먼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아내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고


또 다른 권력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의 지배권을 동서로 양분할 것을 요구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자


로마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국사를 돌보기는 커녕 힘들게 정복한 식민지에서

 

나온 귀한 수입을 이집트 여인에게 몸땅 안겨주는

 

사령관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특히 로마의 상속자요,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여왕의 노예로 전락한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수치로 생각했다.

그는 두 남녀를 국가의 명예를 더럽힌 탕아와

 

국제적인 창녀의 야합으로 매도한 후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에 벌어진 악티움 해전의

 

승자가 되었고, 패전 사령관이 되어 벼랑 끝에 몰린

 

안토니우스는 자결하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갑작스럽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안토니우스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온 그녀는 곧바로

 

최후를 맞았고 역사가들은 그녀가 독사에 물려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클레오파트라를 그릴 때는

독사가 벌거벗은 여왕의 젖가슴을 무는

자극적인 장면을 선택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에로티시즘이 강하게 풍겨

 

나오는 것은 죽음과 성을 한 쌍으로 묶어 표현했기 때문이다.
    

The Death of Cleopatra


클레오파트라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을 이용해

 

왕권을 차지했고 애인들의 막강한 힘을 빌어

 

정적을 제거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플루타르크는 클레오파트라의 신비로운 죽음에 대해


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탐스런 무화과 바구니를 든

 

농부가 여왕을 방문한 직후에 일어났다.



무화과 바구니에 맹독성이 강한 독사가 들어

 

있었던 것일까? 라고 강한 의문을 던졌다.

들라크루아는 클레오파트라를 방문한

 

농부의 바구니 속에 숨겨져 있는


뱀을 그려 넣어 극적인 죽음을 예견하고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 파스칼의

 

유명한 말처럼 클레오파트라는 세계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헨델의 <줄리오 체사레> 중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아리아 '내 운명을 슬퍼하지 않으리 !
//

Johann LISS (1590 - 1631) /The Death of Cleopatra

    
    헨델의 <줄리오 체사레> 중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아리아 
    '내 운명을 슬퍼하지 않으리'
    G.F. Handel (1685 - 1759) / 'Piangero la sorte mia' 
    from Giulio Cesare in Egitto (Act 3) 
    
    
    
    
    
    
    헨델의 `쥴리우스 시저' 중에서 클레오파트라가 부르는 비장한 느낌의 아리아, 
    'piangero la sorte mia' 는 프토로미에 잡혀 투옥된 클레오파트라의 아리아로 
    이 느리면서 우아한 곡은 'Lascia ch'io pianga' 와 더불어 헨델의 비장한 
    아리아의 으뜸으로 손꼽을 수 있다.
    
    Piangero la sorte mia,
    si crudele e tanto ria,
    finche vita in petto avro.
    Ma poi morta d'ogn'intorno
    il tiranno e notte e giorno
    fatta spettro agitero.
    
    
    I shall weep at my fate,
    so cruel, so wicked,
    while I have life in my breast.
    And after death, both night and day,
    like an unquiet phantom,
    I shall hover around the tyr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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