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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전쟁[ Trojan war ]

작성자睦園 박이환|작성시간14.03.11|조회수779 목록 댓글 4

트로이전쟁[ Trojan war ]

요약
고대 그리스의 영웅 서사시에 나오는 그리스군과 트로이군의 전쟁.
 

기원전 1,200년경에 일어났다는 트로이전쟁은 엉뚱하게도 그리스 여신들의 질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한,혼래식에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라고 적힌 황금사과가 던져졌다. 그러자 제우스의 왕비 헤라,지혜를

관장하는 아테나,미의 여신인 비너스는 서로 자기의 것이라 우겼다.세 여신의 싸움에 누구의 편을 들수없었

던 제우스는 양치기였던 미소년 파리스에게 판정을 위임했다.파리스는 실제로 트로이왕(프리아모스)의 둘째

왕자였다.파리스는 황금사과를 비너스에게 주었고 그녀는 인간중에서 최고의 미녀를 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의 최고 미녀가 이미 스팔타의 왕(메넬라오스)과 결혼한 왕비 헬레나 라는 점이었다.

헬레나는 제우스 신과 레다 공주 사이에 태어난 미녀로 숱한 왕자들의 구혼을 받은 끝에 스팔타의 왕과

결혼을 했지만 내심 불만이 많았었다. 이에, 비너스의 도움으로 파리스는 헬레나를 유혹해 트로이로 도망을

갔고, 화가난 메넬라오스는 형인 아가멤논(미케네의 왕이자 그리스 총사령관)에게 도움을 청했다.아가멤논

은 헬레나에게 거절당했던 과거의 구혼자들을 포함해 90척의 그리스 연합 선단을 이끌고 트로이를 공격한다.

 

트로이군은 그리스 연합군의 위세에 밀려 처음은 성으로 후퇴했지만 그리스군의 공격은 생각되로 되지 않았다.

바닷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던 트로이는 두꺼운 성벽과 높은 방어탑에 강력한 수비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더구나 트로이는 소아시아의 다른 도시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지원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스인들

은 두 곳에 자신들을 보호할 성벽을 쌓고 간간이 공격에 나섰지만 10년 동안 트로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트로이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 났고, 트로이는 함락 되었다.그리스인들이 원정에 나선지 10년째 되

던 해였다.그리스인들은 커다란 木馬를 만들어 그안에 무장한 장병들을 숨겨 두고 거짓으로 퇴각했다.트로이인들

은 목마를 신의 선물로 알고 성 안으로 끌고 들어왔는데, 그 날 밤 목마 안에 숨어 있던 장병들이 나와 트로이를 점

령해버린 것이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남긴 황금 사과를 두고 헤라와 아프로디테(로마신화의 비너스), 아테나가 서로 다투다가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심판을 내려 아프로디테가 주인이 되었다. 그 대가로 파리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의 사랑을 얻게 해 주었다.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과 함께 트로이 원정길에 나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스군의 아킬레우스오디세우스, 트로이군헥토르아이네아스 등 숱한 영웅들과 신들이 얽혀 10년 동안이나 계속된 이 전쟁은 오디세우스의 계책으로 그리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스군은 거대한 목마를 남기고 철수하는 위장 전술을 폈는데, 여기에 속아 넘어간 트로이군은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 놓고 승리의 기쁨에 취하였다. 새벽이 되어 목마 안에 숨어 있던 오디세우스 등이 빠져 나와 성문을 열어 주었고 그리스군이 쳐들어와 트로이성은 함락되었다. 여기서 비롯된 ‘트로이의 목마’는 외부에서 들어온 요인에 의하여 내부가 무너지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이 전쟁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는 고대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수많은 영웅 서사시가 만들어졌으나 그 중에서 뛰어난 문학성을 인정받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만이 후세에 전해졌으며, 이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수많은 예술 작품이 탄생하였다.

한편 고대에는 이 전쟁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으나, 19세기의 비판적 역사 연구에서는 허구적인 신화로 취급하는 풍조가 강하였다. 그러나 하인리히 슐리만이 1870년부터 트로이 유적지를 발굴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근거를 얻게 되었다. 1930년대에 미국의 블레겐이 트로이 유적에 대한 과학적인 재조사를 시행한 결과, 트로이전쟁이 사실성을 갖는다면 9층으로 이루어진 유적 가운데 BC 125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제7층 A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트로이목마(Trojan horse)


 

그리스의 설화에 따르면, 트로이전쟁은 기원전 1200년경 고대도시 트로이에서 10년간 진행되었다. 시인 호메로스는 일리아드라는 서사시를 통해 트로이 전쟁을 연대기별로 묘사했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미케네인들은 아가멤논 왕의 지휘 아래 헬레스폰트 해협 남서쪽의 터키 해안에 위치한 트로이를 공격했다. 오늘날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불리는 헬레스폰트 해협과 보스포루스 해협은 흑해와 에게 해를 잇는 좁은 해협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요충지로서 흑해 무역의 요소라는 이점을 겸비하고 있었다. 아가멤논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 지역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터라 이 전쟁을 통해 이곳을 무역의 요충지로 확보하고자 했다. 헬레네를 두고 쓰인 신화 속 전쟁 또한 기원전 1200년경을 기점으로 한다.


그리스의 서사 시인 호메로스 덕분에 트로이 목마는 겉으론 해를 끼치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험인자를 포함한 모든 것을 일컫는 단어가 되었다. 일리아드에 나와 있는 트로이 전쟁을 살펴보면 10여 년의 전쟁 끝에 미케네인들(그리스인)은 바퀴가 달린 커다란 목마를 만들어 놓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트로이에서는 이들이 남기고 간 목마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카산드라 공주를 비롯해 일부에서 목마를 받지 않을 것을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트로이인들은 목마를 성안에 들이기로 결정한다. 트로이인들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전쟁을 패전의 길로 인도했다. 그날 저녁 목마 안에숨어 있던 미케네군은 몰래 빠져 나와 성문을 열었고, 10여 년간 이어졌던 트로이 전쟁은 삽시간에 미케네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트로이의 목마 모형

트로이의 목마 모형 - 터키 트로이 주변에서 발굴된 동전과 도자기를 근거로 트로이 목마 모형을 만들었다고 한다. 1996년 터키 역사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199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출처: doopedia.co.kr

 

트로이(Troy)

터키 서쪽에 있는 기원전 4,000년전의 고대도시 유적, 트로야·트로이아라고도 한다. 호메로스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서는

‘일리오스’라고 불렸다.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흐르는 평야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근대에 와서는 히살리크라고 불렀다)에 있다. 바다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어 바다로부터의 습격을 받을 위험은 적었다. 그러나 바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에게해(海)와 흑해(黑海)를 잇는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 해협)의 입구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에 있어, 예로부터 번영을 누려왔다.

독일 고고학자 슐리만이 1870년부터 이곳을 발굴하면서 유적이 밝혀졌다. 유적은 9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최하층은 BC 4000년 말기의 것으로,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제2층에는 메가론식의 왕궁으로 짐작되는 건물이 있고, 이 층에서 많은 금·은 제품을 발견하였으며, 이 층을 호메로스 시대의 것으로 생각하였다.

슐리만은 이때 발굴한 유물들을 독일로 밀반출, 1881년 베를린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함으로써 찬란했던 트로이문화가 세상에 알려졌다. 1945년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은 이를 탈취, 금·은 보물은 모스크바  푸시킨미술관에, 도자기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미술관에 소장하다가 1995년 4월 푸시킨미술관에서 다시 전시되었다.

그러나 그후 슐리만을 도운 독일의 고고학자 되르프펠트는 아래에서 제6층에 해당하는 곳이 호메로스 시대의 것이라고 하였다(BC 15∼BC 12). 1930년대에 와서 미국의 블레겐이 다시 조직적으로 발굴하여 한 층 위인 제7층 A를 호메로스 시대의 것이라고 수정하였다. 제7층 B는 철기시대 초기, 제8층은 그리스인이 이민(移民)한 아르카이크시대의 것이며, 맨 위층인 제9층은 헬레니즘시대 및 로마시대의 유적으로 이 무렵 도시는 ‘일리움’이라고 불리었다. 이 시대에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원정 도중에 일부러 이곳을 들렀다.

 

트로이 도시 성벽 터키 트로이. 트로이 6기에 만들어진 도시 성벽이다. 트로이 유적은 기원전 3000년 청동기 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 9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트로이 6기는 기원전 1800년부터 1275년까지로 추정된다.

 

 

 

 

 

- 트로이 전쟁은 전설인가 사실인가

 

 

트로이 전쟁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3,00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다.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유명한 사건임에도 트로이 전쟁에 관해 기록한 어떤 역사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로 있었던 전쟁인지 확인불가란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이 전쟁이 세계적 관심을 받게 된 데는 호머의 일리야드(Iliad)가 기여한 바가 크다. 일리야드는 기원전 700년경에 쓰인 대 서사시다. 그리스 작가 호머(Homer)의 작품으로 트로이를 배경으로 쓰인 오딧세이(Odyssey)와 더불어 서양 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일리야드가 트로이 전쟁의 원인과 경과를 그리고 있는 반면 오딧세이는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오딧세우스가 겪는 모험을 노래하고 있다. 이 두 서사시는 트로이 전쟁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물로 수 천년간 유럽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서사시는 기본적으로 민족이나 국가의 전설을 신(神)이나 영웅 중심으로 적은 시다. 역사적 기록물이 아닌 창작물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이 서사시의 존재만으로 트로이가 실존했다고 단정할 순 없다. <강남 스타일>이 강남을 묘사하지만 그건 그저 노래일 뿐, 강남에 대한 역사적 기록으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다.

 

일리야드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은 흥행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미모를 자랑하는 유부녀와 사랑에 빠진 왕자, 그리고 남편이 벌이는 막장불륜, 그들을 벌하기 위해 출정한 수십만 병력들의 스펙터클 전투신, 신들마저 이 싸움에 끼어드는 SF 환타지... 그리고 결국 가정 파괴범이 맞게되는 권선징악형 결말까지 트로이 전쟁에는 영화화하기에 충분한 소재거리가 넘쳐난다. 그래서 할리웃이 잊을만 하면 한번씩 트로이 영화를 리메이크 하고있다.

 

 

 

 

 

 

이렇게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나 트로이 목마는 실제로 존재했던 사건일까? 1870년 슐라이만이 힌트를 찾아내기 전까지 그 답은 아니올시다 였다. 호머의 일리야드, 오딧세이를 읽으며 자란 독일소년 하인리히 슐라이만(Heinrich Shliemann)은 돈많은 사업가겸 고고학자로 성장했다. 여유가 생기자 그는 소년시절 자신을 매료시켰던 트로이를 찾아나섰다. 그가 주목한 지역은 터키 아나톨리아 북서쪽에 있는 히살릭(Hisarlik) 이었다. 유럽과 중동, 에게해와 흑해를 잇는 길목에 위치한 히살릭은 해상 무역로의 중심지이자 바다를 통한 교통로의 거점이었다. 1870년 슐라이만은 소년시절의 꿈이자 고고학계의 숙제였던 트로이의 실존을 밝히기위해 이곳 히살릭에서 역사적인 삽질을 시작했다.

 

 

 

 

 

 

히살릭 언덕이 트로이라고 확신했던 슐라이만은 총 7차례의 발굴을 실시했고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 언덕 지층속에서 9개의 도시흔적과 13개에 달하는 서로 다른 시대적 유물들을 발견한 것이다. 도시들은 겹겹히 쌓여있는 구조로 흙속에 파묻혀 있었고 그 역사는 무려 5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트로이 1 : 기원전 3000년 ~ 2600년

트로이 2 : 기원전 2600년 ~ 2250년

트로이 3 : 기원전 2250년 ~ 2100년

트로이 4 : 기원전 2100년 ~ 1950년

트로이 5 : 기원전 1900년 ~ 1700년

트로이 6 : 기원전 1600년 ~ 1400년

트로이 6a : 기원전 1300년

트로이 7a : 기원전 1300년 ~ 1190년

트로이 8b1 : 기원전 1100년

트로이 8b2 : 기원전 1000년

트로이 8b3 : 기원전 950년

트로이 9 : 기원전 700년

트로이 10 : 기원전 1세기

 

이 유적군속에서 <트로이의 헥토르>라는 글씨가 새겨진 동전이 출토됐다. 땀 뻘뻘 흘리며 삽질하던 슐라이만을 포함해 전 세계 고고학계가 열광했다. 유럽 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대 서사시 일리야드와 오딧세이가 서사시를 넘어 사실일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슐라이만은 미친듯 땅을 파헤쳤고 유적들은 서서히 대중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슐라이만이 사망하자 그의 조수였던 빌헬름 도프펠트(Wilhelm Dorpfeld)가 발굴을 계속했다.

 

발굴단의 관심을 끈 건 지상으로부터 다섯번 째, 트로이 7a 유적층이었다. 그곳에서는 성채를 중심으로 한 23군데의 방어벽과 11개의 게이트, 돌로 포장된 도로, 5개의 방어 성채로 둘러싸인 일반인 거주지역등이 발굴되었다. 일리야드속 트로이와 비교해서 시기적으로 형태적으로 가장 유사해 보였다. 일리야드에는 트로이의 성벽중 유독 한 부분이 취약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트로이 7a에서는 호머의 묘사처럼 다른 곳보다 취약한 성채가 발굴됐다. 일리야드에서 "일리오스의 거대한 탑들"로 묘사된 것처럼 성벽을 따라 건설된 큰 탑들도 찾아냈다.

 

또한 도시 전체에 남아있는 광범위한 화재와 학살의 잔재는 Troy 7a 문명이 대규모 전쟁의 결과로 멸망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역시 일리야드가 설명하고 있는 트로이의 종말과 일치하는 흔적이었다. 에게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국가들 중 가장 막강한 방어력을 갖췄을 것으로 평가받는 성채는 스파르타가 트로이 공격을 위해 전체 그리스 연합군을 긁어모은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었다. 발굴단은 이 모든 자료를 취합해서 트로이 7a가 트로이 전쟁의 실제 무대라는 결론을 내렸다. 즉 트로이는 실존했던 도시였다고 선언한 것이다.

 

 

 

- 트로이 유적 발굴 현장

 

 

이 결론이 맞는지 검증하려는 시도가 최근 있었다. 일리야드에서 묘사한 전쟁 상황과 트로이 유적의 주변 지리를 대조해 전쟁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2003년 국제 조사단이 구성되었다. 미국 미네소타 대학의 George Rapp 교수팀, 터키 이즈미르 Ege 대학의 Ilhan Kayan 교수팀, 아일랜드 더블린 Trinity 대학의 존 V. Luce 교수팀등이 참여했다. 그들은 일리야드속 트로이 전쟁의 전투장면과 주변지리를 현대기술의 도움으로 대조했다.

 

일리야드는 그리스 원정군의 캠프가 트로이 성에서 멀지않은 스캐맨더(Scanmander) 강 입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3000년 전 지형을 복원하자 성에서 5km나 떨어져 있던 해안선은 일리야드 묘사처럼 트로이성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스캐맨더 강을 포함해 복원된 당시 지형도는 일리야드의 전투 기록에 등장하는 여러 지형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국제발굴 조사단 역시 발굴된 유적이 일리야드속 트로이가 맞다는 최종 평가를 내렸다. 이로써 트로이는 상상력의 산물이 아닌 역사적 사건기록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현대 기술로 복원된 트로이 성의 모습은 이렇다. 성벽으로 보호받는 성채를 중심으로 일반인 거주단지로 구성된 이 도시는 총 면적 30만 평방미터, 성채 규모 2만 평방미터를 가진 요새로 실제 거주민은 약 5,000명 정도였다. 그리스, 발칸지역, 아나톨리아 지방의 교차점에 위치한 도시, 바다를 통한 접근이 용이했던 이곳이 바로 실존했던 트로이의 모습이다.

 

 

 

 

 

 

발굴 내용과 약간의 상상력을 중심으로 재 구성해 본 트로이 전쟁의 실체는 이렇다. 기원전 1200년경 트로이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경쟁자 관계였다. 트로이는 아나톨리아와 소 아시아에 위치한 도시 국가들의 맹주였고 지중해로 뻗어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막강한 지중해 세력을 형성해 반대로 아나톨리아 지역을 거쳐 흑해로 진출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해상 무역로의 주도권을 둘러싼 군사적 갈등이 높던 시대로 트로이와 고대 그리스 사이에선 어떤 사건이던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결정적인 불씨를 당긴 사건이 일어났다. 미녀 헬렌의 아버지는 스파르타의 왕이었다. 당연히 헬렌은 스파르타의 공주였다. 그녀가 아버지의 강요로 정략적으로 메넬레우스와 결혼하자 헬렌은 불행해졌다. 왕이 되기위해 자신을 이용한 메넬레우스 때문에 애정없는 결혼생활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무역항로를 따라 스파르타에 들른 트로이 왕자 패리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 커플은 야음을 틈타 트로이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였고 헬렌덕에 왕위를 물려받은 메넬레우스는 왕권에 심각한 위협을 받는다. 메넬레우스와 그의 동맹자 오딧세우스는 외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먼저 사절을 보내 왕비를 돌려보내 줄것을 요구했지만 거절 당했다. 이제 남은 선택은 전쟁 하나 뿐이었다. 어차피 에게해와 흑해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할 운명이었다. 메넬레우스는 동생 아가멤논을 시켜 전 그리스의 도시 국가에 병력지원을 요청했고 총 28개의 서로 다른 부대가 연합군에 합류했다. 그리스 연합군은 각 지역에서 파견된 장군들로 지휘부를 구성했다. 아가멤논(Agamemnon), 아킬레스(Achilles), 아약스(Ajax), 디오메드(Diomed), 네스토르(Nestor), 오딧세우스(Odysseus), 패트로클로스(Patroclus)등이 지휘봉을 잡았다.

 

이들에 맞서 트로이는 소 아시아 동맹국들과 손을 잡고 결전을 준비했다. 일리야드는 그리스군이 50개의 노를 갖춘 총 1,200척의 전함을 동원했다고 적고 있다. 한 척당 전투요원 50명, 비전투요원 50명 도합 100명씩 승선하면 총12만에 달하는 대군이다. 하지만 실제로 연합군의 규모는 트로이 방어군의 두 배 정도인 만 명 정도였을 것이다. 고대 문학속 숫자 뻥튀기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늘 있어왔으니 접어주자.


1차 원정은 폭풍으로 실패했다. 2차 원정에 오른 그리스군은 드디어 트로이성을 포위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높은 성벽과 성채로 보호받던 트로이 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내륙쪽을 통해 동맹국들의 지원을 받는 트로이의 숨통을 완전히 끊기는 어려웠다. 전쟁은 군바리 숫자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리스 지휘관들이 몰랐던 게다. 트로이 주변 지역을 초토화 시켰지만 물자보급로는 완벽히 차단되지 않았고 결국 전쟁은 장기전으로 흘렀다.

 

 

 

 

 

 

상대적으로 보급선이 길었던 그리스 연합군은 전쟁을 서둘러 종결해야 했다. 그래서 최후의 일격에 나선다. 오딧세우스가 이끄는 특공대가 야밤을 틈타 트로이의 성벽을 타고 넘은 것이다. 성문은 열렸고 그리스군은 물밑듯이 밀려 들었다. 오랜 전쟁으로 생존자 대부분이 노인, 부녀자, 아이와 병자들 뿐이었지만 그리스군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학살에 나섰다.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목마는 성의 함락을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호머가 만들어낸 설정일 가능성이 높다.

 

뜬금없이 전장에 나타난 목마를 성안으로 들일만큼 트로이 사람들이 어리석을리 없고 더군다나 그 안에 병사들이 숨어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만큼 전쟁의 문외한들이 아니었다. 어쨋든 오딧세우스의 영웅적 행동으로 트로이는 함락되었고 그는 전체 그리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호머가 그만을 위한 서사시, 오딧세이를 별도로 쓴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트로이를 함락한 그리스 연합군은 보복을 저질렀다.

 

도시 전체를 불태웠고 노예로 팔 수 있는 이들을 제외한 모든 주민들을 학살했다. 사건의 발단이었던 패리스 왕자는 이미 함락 전 목숨을 잃었고 헬렌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왕권의 정당성 때문에도 헬렌이 필요했던 메넬레우스는 그녀를 죽일 수 없었다. 일리야드는 메넬레우스가 그녀를 다신 만난 순간 그 아름다운 미모에 분노가 녹아 내렸다고 적고있다. 사실이든 아니든 자고로 여자는 미모가 있고 볼 일이다. 트로이의 왕자였던 아에니아스(Aeneas)와 일부 주민들이 간신히 목숨을 구해 달아났다.

 

그들은 성 앞 해변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 티베르(Tiber) 강 입구에 정착해 제2의 트로이를 건설했다. 그들이 세운 도시가 바로 그 유명한 로마다. 트로이의 피난민들은 로마 문명의 시발점이자 Julio-Claudian 로마 왕조의 뿌리였던 셈이다.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영향권이었던 유럽인들이 이 사건에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훗날 이 사건에 영감을 받은 호머는 이 이야기에 적당한 상상력을 버무려 일리야드와 오딧세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쓰게 되고 트로이는 그 덕에 불멸의 신화로 남게되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트로이의 후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만큼 고대 트로이를 특별하게 생각했다. 트로이를 일리움 노붐(Ilium Novum)이라 부르며 이 도시만큼은 모든 세금이 면제되는 혜택을 제공했다. 당연히 세금내기 싫어하는 자들이 떼처럼 몰려왔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스인들에게도 트로이는 특별했다. 그들의 영웅적인 선조들이 묻힌 곳이자 그리스의 위대함을 만천하에 입증한 곳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은 트로이를 방문해 아킬레스와 페트로클러스를 위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일리야드나 오딧세이, 아에네이드등에서 노래하는 트로이 전쟁은 목마 에피소드와 숫자들에 대한 뻥튀기질을 제외하곤 사실에 가깝다. 그간 출토된 유물과 지정학적 조사 내용이 이를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인정한 UNESCO에 의해 트로이 유적은 1998년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트로이 전쟁이 실존했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단군 신화가 사실로 증명되는것 만큼 서양인들에게 의미있는 결론이다. 단군의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입증된다면 곰이 쑥을 먹었든 마늘을 먹었든 샌드위치를 먹었든 뭐가 중요하겠는가. 트로이 전쟁에서 목마가 실존했는지, 진짜 헬렌의 미모때문에 전쟁이 난건지 중요하지 않은 건 같은 논리다. 서양인들이 트로이의 실존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속에서 서양문명을 관통하는 역사적 기원을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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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睦園 박이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3.13 나는 역사를 말할때 쯤은 항상 마음의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왜냐 하면 역사 그 자체가 몹씨도 흥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또 다시 서양의 역사를 다시 익혀 볼 작정이다. 6년전 우리의 카페가
    처음 개설 할 당시 한때 역사공부에 흥미를 느껴 서양사를 거의 섭렵했던 일이
    생각든다. 이번에도 또 다시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사실을 되 쉽으며 나름데로
    한번 훌터 볼 생각 이랍니다.
  • 작성자서관수 | 작성시간 14.03.13 6년후인 지금 다시한번 검토 한다니 기대가 됩니다. 역사를 보는 눈은 자꾸 발전이 되겠지요. 부지런히 읽어볼 예정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睦園 박이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3.13 서회장 님은 몇년전에 부부가 터키에 여행을 다녀오신걸로 알고 있어요.. 트로이 유적의 중심지대가 바로 터키에 있고 보면
    아마 누구보다도 관심을 갖이시고 서양역사의 근원이 되는 트로이 에 대한 이야기를 실감나게 인지 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 작성자서관수 | 작성시간 14.03.13 내가 터키에 갔을때는 불행하게도 트로이 유적을 보지못했습니다. 연관해서 이기회에 새로운것들을 구경하게 될것 같네요. 아무턴 터키는 매우 인상적이었고 역사적으로도 흥미로운 나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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