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역사 탐방및 인물

허난설헌과 허균생가

작성자睦園 박이환|작성시간14.10.14|조회수54 목록 댓글 0
 

 

 

 

강릉을 가게 되면 늘 찾게 되는 이곳 허난설헌 생가를 아침나절에 거닐었다.

 

겨울이면 겨울 바다를 보러 강릉을 찾곤 하는데

 

추운 날 거닐었던 느낌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오는 싱그러운 여름 풍경이었다.

 

겨울 풍경만 포스팅하였기에 여름 풍경을 몇 장 담아왔다.

 

오늘은 허난설헌, 허균 생가 주변 풍경을 소개한다.

 

 

 

 

 

 

 

 

 

 

 

 

허난설헌과 허균의 생애를 알고 돌아보면 더욱 운치를 느끼게 된다.

 

 

 

 

 

난설헌 허초희(1563~1589)

 

조선 중기 대표적인 여류시인

 

 

 

허난설헌은 짧은 생을 살다간 천재시인으로

 

그녀의 당호 난설헌처럼 난초같이 살다간 시인이었다.

 

양천허씨 허엽의 딸로 태어났고, 아명은 초희였다

 

그당시 조선은 여성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은 제한적이었고 대부분 여성들은 집안을 지키고

 

후세를 낳아 기르는 역할과 남성 중심의 가치체계가 확고했던 시대라

 

여성이 자기 이름으로 시를 쓰고 이를 세상에 알린다는 것은 참 드문일이었다.

 

그러나 허난설헌이라는 여류시인의 등장으로

 

그녀의 천재성은 당시 여성들의 고통을 보여주는 시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난설헌은 사대부가의 여인으로 현모양처나 성공한 자식을 두었기에 알려진것이 아니라

 

그녀가 창작한 시의 탁월함 때문에 오로지 자신의 시로서 그 이름을 남겼고

 

훗날 그녀의 시는 중국과 일본에서 많은 사람에게 극찬을 받게 된다.

 

 

 

허난설헌은 죽을 때 유언으로 자신이 쓴 시를 모두 태우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녀가 남긴 시는 족히 방 한 칸 분량이었다고 전해지는데

 

허난설헌의 시집은 그녀의 유언에 따라 유작들을 모두 태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동생 허균은 찬란한 천재성을 가진 누이의 작품들이 불꽃 속에 스러지는 것이

 

안타까워 그녀가 친정 집에 남겨놓고 간 시와 자신이 암송하는 시들을 모아 '난설헌집'을 펴냈다.

 

 

 

아버지 허엽은 허난설헌에게 남자와 똑같은 교육기회를 주었으며

 

아들에게는 자유로운 사상을 가질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

 

당대 뛰어난 문인으로 평가받은 허성, 허봉이 허난설헌의 오빠이며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이 허난설헌의 남동생이다.

 

 

 

그녀는 세 가지 한을 품고 살았다.

 

여자로 태어난 것,

 

여성의 활동을 제한하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

 

평범한 남자의 아내가 된 것,

 

 

 

허난설헌은 그 당시 자유로운 가풍을 가진 친정에서 가부장적인 가문으로 시집가면서

 

시집살이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양반가의 여성에게조차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시를 쓰는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달갑지 않은 존재였을 테니까

 

결국 지식인 며느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갈등의 골은 깊어갔으며

 

남편 김성립은 그런 그녀를 보듬어주지 않았고, 과거 공부를 핑계 삼아

 

밖으로 돌며 가정을 등한시 하였단다.

 

정말 그 당시 조선은 그녀의 재능을 담기에는 너무 작은 나라였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결국 허난설헌은 이같은 사회적 분위기에 회의와 절망을 느꼈고

 

두 자식을 병으로 먼저 보내고 유산까지 겪으면서 작은 희망마저 잃어버린것이 아니었을까,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시어머니의 학대와 무능하고 통이 좁은 남편, 몰락하는 친정에 대한 안타까움,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슬픔 등으로 허난설헌은 건강을 잃고 점차 쇠약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시로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채 스물일곱에 요절하게 된다.

 

 

 

 

 

난설헌의 시는 조선 후기 사대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재평가되어

 

그녀를 유일한 시인이자 뛰어난 천재로 인정했다.

 

조선중기 여성에게 가장 혹독했던 시기에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그녀의 천재성은 길이 남을 것이다.

 

 

 

허난설헌 이야기는 익히 알고는 있지만 다시 새겨보면서

 

어쩐지 쓸쓸함이 감돈다.

 

 암울한 그 시대가 그녀의 삶은 아깝게 마감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교산 허균(1569~1618)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겸 소설가

 

 

 

당대 명가의 후예로, 자유분방한 삶과 파격적인 학문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굴곡 있는 삶을 살았던 정치인이자, 자기 꿈의 실현을 바라든 호민을 그리워하던 사상가였다

 

허균이 속했던 집안은 당대 최고 명가의 하나였다.

 

 

 

부친 허엽은 호가 초당(草堂)으로, 오늘날 유명한 강릉 초당두부의 그 초당이다.

 

허엽이 초당을 호로 한 것은 그의 처가와 관련된다.

 

즉 허엽의 두 번째 부인인 강릉김씨 김광철의 딸의 집이 강릉에 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허균의 호 가운데 하나가 교산(蛟山)이다. 교산에서 교(蛟)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말한다.

 

허균의 호인 교산은 그가 태어난 강릉의 사천진해수욕장 앞에 있는 야트막한 산을 말한다.

 

 산의 형상이 꾸불꾸불해서 붙여진 명칭이었다.

 

그는 홍길동전과 같은 꿈을 꾸었는지 모르지만 끝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로 끝나고 만 것이었을까?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고 1594(선조27)에 문과에 급제하고

 

1597년에 다시 문과에 장원급제하면서 벼슬에 오른다.

 

 

 

홍길동전]은 최초의 한글 소설로서, 우리 국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홍길동전]하면 허균, 허균하면 [홍길동전]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는 아니다.

 

그런 만큼 [홍길동전]은 허균의 생애와 사고를 응축해 놓은 결정판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생각했으며, 불평등한 신분 제도에 맞서 사회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뛰어난 학식을 지니고 있어도 서자로 태어나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했던 신분 제도를 비판하고자 했다.
그래서 허균은 자신의 뜻을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에 담아 백성들이 모두 잘사는 나라를 보여 주었다.

 

 

 

또한 그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교리서를 가져오면서 평등 사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사관으로 있으면서 친척들을 부당한 방법으로 과거에 급제시켰다는 이유로

 

벼슬에서 쫓겨나 테인에 머물면서 글쓰기에 온 힘을 쏟았다.
허균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성리학뿐만 아니라 불교.도교.천주교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문에 두루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백성들은 돌보지 않는 관리들을 비난하고 부패한 불교의 모습을 그리는 등 당시 사회의 모습을 담았다.
한글로 쓰인 이 소설은 서민들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허균은 광해군의 총애를 받으면서 1617년에 좌참찬에 올랐으나,

 

 이듬해 대북세력의 전면에 나서서 인목대비의 폐비를 주장하고 나섰고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으로부터 역모 혐의로

 

고발되었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허균은 자신의 희망이 현실 정치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음을 알고 차라리 통쾌하게 활약하는

 

호민 홍길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울분을 풀어 주었다.

 

허균은 역적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불후의 명작 『홍길동전』을 통해 평등한 민본 사회 건설이라는 꿈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조선 중기 사회모순을 비판했던 소설가 허균...

 

그의 대표작 홍길동전처럼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꼭 필요한 것은 아닐까

 

모든 국민이 잘사는 나라....

 

 

 

 

 

 

 

 

 

 

 

 

 

 

한가롭게 거닐면서도 자꾸만 허난설헌의 짧은 생애가 떠올랐다.

 

 

 

 

 

 

 

 

 

 

 

 

 

 

 

 

 

 

 

허난설헌, 허균 기념관이 있는 풍경이다

 

기념관 내부는 전에 포스팅했기에 겉 풍경만 담아왔다.

 

 

 

 

 

 

 

 

 

 

 

 

 

 

늘 다녀가면서 보게 되는 허난설헌 동상과

 

허 씨 집안의 문장가가 담은 시비를 읽게 된다.

 

 

 

 

 

 

 

 

 

 

 

 

 

 

 

 

 

 

 

비가 오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는 날씨였지만 산책하기엔 참 고즈넉하고 여유로웠다.

 

 

 

 

 

 

 

 

 

 

 

 

이곳에 오면 꼭 거닐게 되는 숲길...

 

 

 

 

 

 

 

 

 

 

 

 

 

 

 

 

 

 

한여름의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풍경들...

 

가슴까지 시원해지던 녹음...

 

 

 

 

 

 

 

 

 

 

 

 

 

 

 

 

 

생가 화단에 피어있던 백합이 빗물에 젖어 청초해 보여 한 컷....

 

 

 

 

 

 

 

 

 

 

 

 

 

 

 

 

 

 

 

 

 

 

 

 

 

 

강릉을 대표하는 곳 허난설헌, 허균 생가를 거닐면서

 

많은 생각을 했던 시간이어서 덥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언제고 또 강릉을 가게 됨 이곳을 거닐게 될 것이지만

 

돌아와 생각함 그 숲길이 떠오르고

 

그녀의 안쓰러운 생애가 떠오른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