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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許蘭雪軒) 묘지 답사

작성자睦園 박이환|작성시간14.10.14|조회수71 목록 댓글 0

허난설헌(許蘭雪軒) 묘지 답사

 

조선조에는 유명(有名) 무명(無名)으로 여류시인(女流詩人)이 많았다. 그중에서 이름이 알려진 시인으로는

황진이, 허난설헌, 신사임당 이매창 이옥봉 김부용 강정일당 등이다.

 

이중 허난설헌의 묘를 경기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산29-5 에 답사하고 사진을 소개 한다.

허난설헌(許蘭雪軒)하면 이름앞에는 “천재 시인” 이라는 수식어(修飾語)가 붙는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년~1589년)의 본명은 초희(楚姬)이며 호는 난설헌(蘭雪軒)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조선제13대왕 명종 18(1563)년에 강릉 초당(草堂) 생가(生家)에서 당대의 석학인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셋째 딸로 태어나서

조선제14대왕 선조 22년(1589)에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강릉 초당(草堂) 마을은 허엽의 호(號)로 인해 생겨났으며“초당두부” 의 상표가 된 마을이다.

 

허난설헌에게 천재시인의 이름이 붙는 것은 그녀가 8세 때

“광한전백옥루 상량문(廣寒殿 白玉樓 上樑文)”을 지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광한전백옥루 상량문은 천상선계(天上仙界)에 있다는 상상(想像)의 이상적(理想的)인 가상(假想) 세계(世界)로

이곳에 전각(殿閣)과 누대(樓臺)를 짓고 상량(上樑)에 글을 지은 것이다.

8세 소녀가 지었다기에 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매우 아름다운 문장이지만

너무 길어서 다음에 소개 한다.

 

천재 시인 허난설헌의 짧은 일생은 너무 비극적이었다.

14세 때 안동김씨 가문의 김성립에게 출가를 하게 된다.

18세 때 친정아버지 허엽이 상주에서 객사(客死)를 한다.

20세 때 딸을 잃고나서 이어 아들 희윤을 잃고 뱃속의 아기마저 죽어 아이 셋을 잃는다.

이때 자식을 잃은 슬픔을 애달프게 그린 시가 곡자(哭子)라는 유명한 시다.

21세 때 둘째 오빠 허봉이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이이를 탄핵했다가 귀양을 가게 된다.

26세 때 둘째 오빠 허봉이 금강산에서 객사한다.

27세의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마쳤다.

 

두 아이를 잇달아 잃고 뱃속의 아이도 사산한 난설헌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남편과의 불화, 아이를 잃은 슬픔은

그녀가 살아가는 생의 의미를 잃게 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오자 그동안 썼던 시와 글을 모두 불태웠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몽유기(夢遊記)”를 짓는다.

 

다행이도 그녀가 친정집에서 썼던 시와 글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시집을 간 뒤에 보낸 시들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허난설헌의 시를 그나마 접할 수 있는 것이다.

 

허난설헌은 귀양 가는 둘째 오빠 허봉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이 27살에 죽을 것이라는 예언과도 같은 글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예언대로 1589년 (선조 22) 3월 19일 27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친 것이다.

 

허난설헌의 유년(幼年)생활은 매우 유복했다.

아버지와 오빠들은 그녀를 여자라 무시하지 않고 글과 학문을 가르쳐주었고 타고난 재능과 감수성으로 자신의 시세계를 가꾸어 나갈 수 있었다.

 

허난설헌은 용모가 아름답고 천품이 뛰어났다고 하며 문장이 높은 오빠 허봉과 동생 허균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교분이 있던 이달(李達)을 스승으로 삼았다 한다.

 

이달(李達,1539∼1612)은 조선중기의 시인(詩人)으로 비록 서얼(庶孼)의 신분이었지만 허봉, 양사언(楊士彦), 정철(鄭澈), 이이(李珥) 등과

교류한 당대 최고의 위항시인(委巷詩人) 이다.

 

조선시대 한시작가 중에 당시(唐詩)의 시풍(時風)으로 일가(一家)를 이룬 세 사람의 시인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부른다.

허균의 스승인 손곡 이달, 기생 홍랑의 연인 고죽 최경창, 가사문학의 효시자 기봉 백광홍등이 이들이다.

 

남다른 재능을 가졌던 그녀의 불행은 혼인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난설헌은 14세에 김성립과 혼인하였는데 시댁은 5대나 문과에 급제한 문벌있다.

그러나 남편 김성립은 정9품 홍문관 정자 직에 머물러 재주와 학식이 난설헌과는 도저히 견줄 수가 없었다.

남편 김성립은 그녀의 뛰어난 능력을 못마땅해 하고 열등감을 느꼈다.

 

남편은 결혼 후부터 글공부를 이유로 외박이 잦았고 부부간의 금슬도 원만치 못했다.

또한 시댁 식구들과 시어머니도 시를 짓는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여겨 구박이 심했다.

시댁 식구들은 시를 쓰는 며느리 보다 평범하게 살림만 열심히 하는 며느리를 바란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사랑하던 두 아이마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뱃속의 아이마저 사산(死産)하자 고통스러운 현실을 비관하는

많은 시를 썼지만, 남편보다 뛰어난 여성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냉혹했다.

 

조선시대는“남존여비”의 유교 윤리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집안에 갇혀 폐쇄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문학적 창작 활동은 많은 제한을 받았다.

 

허균의 문집에 의하면 “돌아가신 나의 누님은 어질고 문장이 높았으나 그 시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아들을 잃고는 한을 품고 돌아가셨다.

언제나 누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는 글에서

이러한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허난설의 시는 우리나라보다 중국에서 더 알려져 있다고 전한다.

1598년 선조 31년, 허균이 정유재란 때 원정 나온 명나라 오명제에게

난설헌의 시 200여 편을 전해주어 이 시가 명나라에서 편찬한 “조선시선” “열조시선” 등에 실렸다 .

 

그 후 1606년 선조때 허균이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었을 때 그와 더불어 시문을 화답하고

우리나라 시를 자랑하면서 누님의 유고를 넘겨주었던 것이다.

 

난설헌의 시에 감탄한 주지번은 본국에 돌아가

허난설헌집(許蘭雪軒集)을 냈는데 낙양(洛陽)의 지가(紙價)를 올일 만큼

절찬을 받았다고 한다.

 

27세에 요절했으면서도 두 권의 문집 속에 213수의 주옥같은 시들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강보에 싸인 아들, 딸 남매를 잃고

애끓는 심정을 나타낸 곡자(哭子)라는 시에서 여선(女仙)이기 이전에 한 어머니이면서 여인이었던 애절한 모습을 보게 된다.

 

곡자(哭子)-아들을 여의고 곡을 하며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지난해에 사랑하는 딸을 잃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소.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서럽고도 서러운 광릉 땅이여,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솟았구나.

簫簫白楊風(소소백양풍)-백양나무 가지 위 바람은 쓸쓸히 불고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도깨비 불빛만 무덤위에 번뜩인다.

紙錢招汝魄(지전초여백)-종이돈을 살라 너희들 혼백 부르고

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무덤 앞에 술을 부어 제사지내네.

應知弟兄魂(응지제형혼)-가엾은 남매의 외로운 영혼,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밤마다 서로 어울려 노닐겠구려.

縱有腹中孩(종유복중해)-뱃속에는 어린애 들었지만,

安可冀長成(안가기장성)-어떻게 무사히 기를 수 있을까.

浪吟黃臺詞(랑음황대사)-하염없이 황대사를 읊조리다 보니,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통곡과 피눈물로 목이 메이네.

허난설헌(許蘭雪軒)

 

-농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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