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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탐방및 인물

駐美 한국대사관의 창설 주역들

작성자睦園 박이환|작성시간15.04.04|조회수94 목록 댓글 0
 

이승만(李承晩-Syng-man Rhee-1875-1965)의 41년간(1904-1945)미국에서 활동은

힘든 세월이 었다. 그의 이름은 미국에서의 비중은 보잘것 없는 존재였다. 아니 시야에서

살아져 갔으면 하는 그런 분위기 였다.

 

이승만은 하와이 사탕농장에 이민 온 다음해에 하와이에 들려 사탕농장의 일꾼들의 통역으로

온 윤병구목사를 만난 것이 독립운동기간동안 큰 버팀목이 된 분이기도 하였다

 

1905년과 1910년의 대한제국은 일본의 침략으로 국권을 잃고 나라없는 백성으로 되었으나

이기간중 국제무대에서 조선의 독립과 일본제국주의 만행을 규탄하는 일을 담당할 수 있는

힘과 동지들을 규합하는 중요한 시기가 된것이다.(조지 Washington대학졸업 ,하바드대 석사,

1910년 Prnston대학에서 { Neutral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란 제목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총장인 Woodrow Wilson( 후에 미국대통령이 되다)으로 부터 수여받다) - 이 논문은 영세중립론과

는 다르다.交易上 중립교역의 역사를 다룬 것이다 -

 

이승만박사의 미국에서의 활동기간의 美.日관계를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이 규명할 수 있다.

 

同盟관계에서 牽制로 그리고 敵對관계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전에 "" Taft-Katsura Memorandum-테프트.桂太郞 密約이

체결된것이다. 당시 미육군장관과(후에 대통령이 됨) 일본 내각총리를 대신하여

가쓰라다로가 주최한 동경회담이 이루워진 대화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는 서명니나 조약이나

협정같은 것은 없었고 미국.일본관계를 대화를 수록한 각서이다.

 

각서에 따르면 일본제국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인정하며 미국은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침략해 조선을" 보호령"으로 삼아 통치하는 것을 용인한다고

되어 있다.

 

이 각서는 미.일이 극비에 붙었기 때문에 각서체결후 20년동안 1924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아니하였다..

 

또 하나의 조약이 있다

러.일전쟁(1904-1905)의 전후처리를 미국루즈벨트대통령의 주선으로 1905년 9월 5일

Portsmouth 에서 체결된 Portsmouth條約의 내용의 첫 조항에는 러시아정부는 일본이 조선에

대해 정치,경제,군사상의 우선적 이익을 가진다는 것을 승인한다고 되어 있다.

 

 

일본군국주의는 청.일전쟁 그리고 러.일전쟁과 미국으로부터의 확약을 받은

대한제국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고립화 된 것이다.

 

외국으로 자리를 옮긴 독립투사들의 조선독립을 탄원하는 것은 설자리를 잃고 말았다.

할 수 있는 일이란 안중근의사 같은 극단의 행동밖에 없었다.

 

 

이승만 박사는 Woodrow Wilson 대통령을 윤병구목사와 같이 어렵살이 만나 호소

하고 은사인 Wilson 대통령을 만나 조선독립을 세계에 알리는 탄원서에 서명을 요구하자 " 한사람의

동의 보다는 미국 전국민의 마음을 얻으라"는 부드러운 충고와 함께 그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아무리 스승과 제자 사이라 하여도 루즈벨트 ,테프트 전임대통령으로 부터 인계된 극동정책을

포기하지 아니하였고 조선을 희생양으로 삼아 미국의 국익을 추구하였다.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투쟁방식을 두고 격론이 있었으나 이승만박사는 한국의 독립은

정치외교적으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굳게 믿고 그는 스스로 한국대통령이라는 직함을 갖고

미국등 여러나라에 외교작전을 펄처나갔다. 이런시기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 하는 한편

일본국국주의 만행을 규탄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런활동을 도운 두사람이 있었다

한사람은 INS통신사의 제롬 Williams란 기자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변호사인 John Stegger

이다 이들은 이승만박사가 한국독립에 관한 선언문을 작성할때 직접도움이 되었으며

이를 각 언론기관에 배포,미국인들의 여론을 환기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한 자들이다.

 

새로눈 국제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31년 일본관동군이 벌인 만주사변과 1932년

일본이 淸나라의 마지막황제인 푸이를 황제로 다시 내세워 괴뢰국을 세웠다.중국정부는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에 提訴하는 일이 벌어 젔다.

LN은 Lytton 調査團을 파견조사하여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정부이며 만주지역은 중화민국

의 주권하에 있어여 한다"고 중화민국의 입장을 지지하자 일본정부는 반발하고 이듬해 1933년

독일과 함꼐 LN에서 탈퇴했다.

 

이승만박사는 때가 왔다고 판단하여 임시정부의 국무회의에서 LN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임명되어 1932년 12월 미국을 출발하여 1933년 1월26일 LN의 본부가 있는 제네바

에 도착하였다.

 

정식으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어려운 狀況에서 유일한 방법은 회의에 取材次 참가한

기자실에서 미리준비된 자료를 배포하고 회의 주제가 만주국을 조사한

Lytton Report에 관한 토의와 체택으로 일본의 극동에서 침략만행을 규탄하는데 더 이상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이때 이승만박사의 동정을 낱낱이 정탐하여 국제연맹 일본국사무국장대리 伊藤述史를 통해

당시 일본 외상인 內田康栽에게 복명한 보고서에는 주된 인물이 한국인 朴錫胤(후에 만주국외교관과

외무성차관까지역임 : 육당 최남선의 누이동생의 남편임) 이다.

 

 

 

호텔에서 식사중 만난 사람이 나중에 결혼까지 한 Francesca 이다

이듬해 미국으로 초청하여 결혼하였다 이승만박사의 나이는 59세 ,프란체스카여사는 36세였다.

돈도 없고 나라도 없는 독립운동가에 반해 결혼하면서 그의 조언자인 동시에 독립운동의 동지로서

아세아인으로서 서

 

양의 벽을 넘지 못하는 모자라는 한계점을 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미국은 일본이 만주국을 건설하자 " 武力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관계의 변화를 거부하는

Stimson Doctrine을 宣言한다" 미국은 대일관계의 동맹관계에서 한발 물러서 牽制테세로

돌변하게 된 게기가 되었다.

 

 

이승만박사는 점차 일본의 야욕이 극동에서 세계로 옮겨지는 것을 터득하고

일본의 야욕을 폭로하는 일에 치중하던차 1941년 태평양전쟁을 예언하는 영문저서

"" 日本軍國主義의 實相(Japan inside out""을 발간하여 미국국무부에 경고하였다.

 

그렇게 냉대하고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점점 정책을 다루는 정책입안자들의 관심의 대상으로

존재가치가 부상하는 시기를 맞게 된다.

 

 

 

1941년 진주만폭격으로 발발한 태평양전쟁은 일본어와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미국은 OSS( Office of Stregetic Service: 미육군 전략사무국)을 창설하고 100여명의

한국인을 선발 훈련에 돌입했다 이때 이승만박사는 OSS의 책임자인 Wiilliam J. Donovan장군과

실무책임자 Preston Goodfellow 대령과 共同作戰計劃書를 작성하고 미국과 중국에서 동시에

같은 규모의 훈련에 돌입하고 장차 이들을 일본과 조선에 침투하여 지하작전을 수행하는 개획이

였다. 한편 이승만 박사는 VOA즉 미국의 소리방송을 (초단파방송)통해 조선의 독립이 닦아오는

것을 고국동포에게 전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金世旋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유학중 박사과정 중 일본와세대 동창의

인연으로 일본회사의 물품을 받아 장사를 하여 상당한 재력을 이루웠다 전쟁으로 그 일을

중단하고 미국정부기관에서 일본어를 번역하고 있으면서 새로운 소식을 이승만박사에게

수시로 전달하던중 일본의 항복을 공식발표보다 미리 알고 전달하여 둘이서 얼마나 기다리

던 일인가 하고 감격하였다고 한다.

 

 

 

종전후 이승만 박사는 귀국을 서둘러서나 상황이 여의차 아니 하였다 미국무성의 미온적인

태도이다.맥아더원수는 환영하는 잎장이었다.. OSS 의 Preston Goodfellow 대령의 도움으로

무국적자인 이승만박사의 여행허가를 제출하였으나 그의 직함을 High Commissioner을 문제삼아

다시 수정하여 자연인의 신분으로 여행허가를 받아 Goodfellow대령이 제공한 군공기편으로

망명생활 33년만에 귀국하였다.

 

 

 

대한민국정부수립후 가장 먼저 한국정부를 승인한 국가는 로마교황청 바티칸 이였다.

1945년 9월9월 서울에 진주한 John L. Hadge중장과 함께 온 종군사제장으로 동행한

Francis Joseph Spellman 주교(후에 뉴욕주대주교)를 환영하는 노기남주교와 연결하는

장면박사의 힘이 작용하였다. 로마교황청을 통한 대한민국의 승인 운동을 적극 요청한 것이다.

 

 

정부수립후 주미한국대사에 장면박사를 지명하고 대사관 직원으로 김세선을 참사관으로

미시간대학교에 박사과정에 있던 韓豹頊을 일등서기관으로 영문서기로 Washington있던

Catholic University총장 여비서인 Agnis Davis를 차출하여 1949년 1월3일 임시대사관사무실을

이승만박사의 지지자인 변호사 John Stegger의 개인 소유의 빌딩방 3개를 월세로 임대하여

"" 대한민국 주미대사관 ""간판을 달았다.

 

1949년 3월 25일 장면대사는 Truman 미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증정하여 대사로서의 첫 출발을

하였다.

 

신생독립국의 대사관의 업무는 대한민국의 승인을 얻는 일이 첫째이고 그 다음은 곡물

과 원면수입 일로 정신이 없던 시기에 본국정부로 부터 해군함정구입하라는 훈령과 함께

1만 8천$이 송금되어 왔다. 당시 그 금액으로는 자동차 몇대를 살 수 있는 금액인데 군함을

사라는 것이였다.

 

김세선참사관은 미상무성을 움직여 롱아이랜드 해양대학교에서 공매를 내 놓은 哨戒艦이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이초계함은 건조한지 4년이며 항해는 3회밖에 하지 않은 거이

새것과 마찬이며 건조비용은 약 400만 $이라는 것 까지 사정을 알았다.

 

김참사관은 상무성실무자에게 어려운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반드시 성사되도록

매달렸다.채임자의 답변은 확실치 아니하였으나 자신 같으면 최저가격 1마5천$에서 최고가격은

2만$로 써 낼것을 귀뙴을 해주어 입찰가격을 1만 7천 651$로 입찰자는 대한민국정부로 기입해

넣었다.며칠을 기다린 후에 그 결과는 한국쪽에 낙찰되었다.

 

 

한편 함정은 구입했으나 본국에서 18명의 해군요원이 도착하였다.

함장 박옥규,기관장 민홍기소령이다 이들은 태평양을 항해할 면허소지자가 없어

미해군 1명을 차출했다.

 

또 문제가 발샐했다.이들에게 항해기술을 가르치고 배를 수리하는 동안 숙식비를

감당할 길이 없어 궁한 나머지 해양대학교 교장인 매킨택 중장에게 실정을 털어 놓았다.

다행이 그 해양대학교 기숙사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다.

 

군함이 떠나기전에 미 해군성에 떼를 써서 작은 포 두문을 얻어 앞 뒤에 매 달았다.

이 초계함은 대서양,파나마운하를 통가하여 하와이를 거쳐 두달만에 진해기지에 도착하였다.

 

 

이 哨戒艦이 白頭山艦(PC-701)으로 명명된 것이다.

 

6.25발발후 북한군 특수부대원 600여명을 태운 북한 수송선 (1,000톤급)이 부산항으로 향하고 있

던것을 울산앞바대에서 교전하여 그 수송선을 격침시킨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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