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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탐방및 인물

[역사]김일성(金日成)과 김광서(金光瑞)장군 (1)

작성자睦園 박이환|작성시간15.04.06|조회수174 목록 댓글 0

역사]김일성(金日成)과 김광서(金光瑞)장군(1)

 

1.일본육군사관학교 23기 기병과 김광서(金光瑞)장군--항일운동가 진짜 김일성장군 동일 인물

(1)조선군사령부(대명사. 지음 古野直也. 옮김 김해경) 김광서(김일성) 내용


ㄱ.북조선 지도자의 김일성도 젊었을때는 항일 게릴라의 일원이었다는데 1935년을 전후로 하여 활약했던 이육사의 *광야 시 주인공 김광서 즉 김일성일까?


그가 항일전에 참가 했던 사실은 없는 것 같다 이 거짓을 발견한 북조선정부의 고관은 살해되려던 직전 소비에트로 도망쳤다 하지만 김일성의 옛 동료들은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진상은 불명 그대로이다
일본 육사 23기생으로 일본 육군을 탈주한 김광서(金光瑞)가 김일성이라는 의명(儀名)으로 항일 게릴라를 하여 조선의 전설적 영웅이었기에 인기 높은 이 이름을 차용해 속임수 이름 (김일성)을 자칭했다고 생각된다
압록강을 야간에 건너와 부락을 불지르고 도망치는 정도라면 현대의 과격파 학생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북한 김일성이 1937년 6월에 함경남도 갑산군의 보천보 마을 공격해 김일성은 항일영웅이 되었다는데 사실은 일본인 순사 한 명이 당직하고 있는 파출소를 불태운 것 뿐이다<문예춘추사의 제군 1990년 9월호 게재 글. 북조선 내무차관 출신 강상호씨의 증언>

 

 

  •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참아 이 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사진 左下:서대문 감옥의 이육사)

 

ㄴ.김부인(탈주해 시베리아로 간 육사 23기 김일성=김광서의 처)은 몇 년전의 부채와 생활난에 시달려 작년 겨울 살던 가옥을 매각, 부채를 정리하고 남은 돈으로 생계를 꾸려 가면서도 지부인(지청천 장군 부인)의 비참한 경우를 동정 가옥매각 때 일금 100엔을 지 부인(지청천 장군 부인)에게 기부하였다 <전의회 회보 全誼 1926년 1월 17일 게제 된 글>


ㄷ.일본정부 극비자료가 조선군사령부 책자에 많은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다

 

(2)신흥무관학교(교육과학사. 지음 안천)

ㄱ.김광서(金光瑞)


  • 김광서는 일본육군사관학교 23기 기병과를 나와 일본군 장교였는데 탈출하여 *신흥무관학교 달려간 인물이다.
  • 그런데 그는 역사상 극비 신비의 인물이다 비슷한 출신에다가 동시에 비슷한 길을 간 이청천(지청천)의 모든 것이 알려진 바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이 가려져 있다

 

 

(사진 좌:김광서(金光瑞)


 

 

(사진 좌: 우당 이회영선생)

  • (주:신흥무관학교-우당 이회영선생..
    조선 말기에 흔한 부자들과 다르게 5번째 손가락안에 드는 큰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만주로 넘어가서 만주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 모든 재산을 처분한 돈은 당시 40만원 현재 가치로는 600억원 의 해당하는 돈이였다.)

 

(사진 좌:우당 이희영 선생과 이시영 옹)

 


그는 너무나 위장을 많이 해서 성은 물론 본관까지 바꾼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원래 이름이 김현충(金顯忠)이었다 그런데 일본육사를 다니면서 김광서(金光瑞,일본육사23기 기병과)로 바꾼다 김광서장군이 육사23기생이며 이청천이나 홍사익장군이 육사 26기이며 김석원장군이 육사27기생이었다 그리고 박정희장군이 육사57기생이다

 

일본 육사 출신

01

02

03

04

 

광서 장군

이청천(지청천) 장군

홍사익 장군


김석원 카이젤 수염 장군

박정희 소좌


그리고는 호적을 바꾸면서 김해(金海) 김씨를 시흥(始興) 김씨로 바꾼다
그러나 그는 경기도 시흥(始興)과는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물이고 <본인이 시작하고 일으켜 흥하게 한다=始興>는 단호한 의지를 본관으로 쓴 듯하다 그러니 그는 시흥 김씨 시조인데 그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었다 그렇다면 그 딸들이 현재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다는데 시흥 김씨는 대가 끊긴 것이라고 보아야 할 듯 하다 그 딸에 양자라도 이어야 옳지 않을지? 김해 김씨 가문에서라도 나서야 옳지 않을까?
그러나 김광서는 일본군을 탈출하면서 이름을 또 바꿔서 위장하면서 김경천(金敬天)으로 불렀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청천 같이 모친의 성을 따서 윤경천으로 쓰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때부터 역사 속에 별안간 사라진다 그가 바로 원조(元祖)의 진짜 김일성이란 학설이 날로 강해지고 있다 그가 다시 그의 이름을 김일성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당시 독립지사들은 흔히 가명을 쓰고 있었으며 동지라 할지라도 피차 자기 정채를 알리지도 묻지도 못했던 때였다 이것은 그들의 불문율이었다>

ㄴ.사라진 김광서(金光瑞) 편


청산리 대첩이 있기 얼마 전에 신흥무관학교의 핵심 인물 하나가 홀연히 사라진다
그가 사라진 것은 3.1만세 항쟁이 사그러 들면서 국내가 조용해질 무렵이니 1919년 초겨울의 어느날이었다
신흥무관학교의 맹장들은 꺼져가는 3,1운동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1920년 3월 1일의 제1회 삼일절에 해당할 날에 제2차 3.1운동을 일으킬 방안을 골똘히 궁리하게 된다 그렇게 되려면 국내로 진입하여 국내 봉기를 유발시켜야 하겠고 그러려면 당연히 무기가 필요했다
무기 구입의 중대한 임무를 띠고서 무기 구입 비밀통로를 개척하기 위해서 김광서는 용기 있게 삼원포를 떠났다 삭풍이 몰아쳐 오면서 새로운 겨울에 접어드는 합니하 강변을 떠난 김광서! 그는 그후 시베리아의 소만(蘇滿) 국경지대를 넘나들며 항일 전투를 벌이는 새로운 길을 간다 그리하여 김광서는 신흥무관학교의 맹장이면서 청산리 대첩에는 참여치 못하는 핵심 인사가 된다
그러나! 김광서의 위치는 결코 무시될 수 없는 것으로서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시베리아등으로 끌어내며 분산 작전을 펴는 등의 중대한 일을 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김광서가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려고 할 무렵에는 불행히도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고 말았으니 그는 시베리아를 넘나드는 항일전투의 길에 정면으로 나섰을 것이라 생각된다 김광서는 몇 가지 재미 있는 특징이 있다

첫째로 김경천(金敬天)이라는 이름으로 곳곳에 출몰하여 일본 정보문서에는 김경천(金敬天)이란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두목이 곳곳에서 부하를 규합하여 무장투쟁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예전에 많은 동포들과 독립군이 있던 소만(蘇滿)국경지역이 일본군에 의해 폐허가 되면서 수 많은 동포들이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을 보면서 곳곳의 침략군을 응징했고 신출귀몰하는 전법으로 일본군을 괴롭히며 동포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러다가 일본 정보문서에는 훗날 그가 김광서(金光瑞)라는 것이 밝혀진다


둘째로 그는 신문기자들에게 당당하게 본인의 전투내용을 떳떳이 알린 듯하다 신문에 알릴때는 김광서(金光瑞)라는 본명으로 알려줬기에 독립군 대장으로 신문에 인터뷰한 기사가 상당히 많아 남아 있다
동아일보에는 당시의 김광서장군이 나폴레옹에 본인을 비유하는 대담한 지휘자였음을 말한 내용까지 실려 있을 정도이다 그가 일본육사 23기 기병과를 나왔고 탁월한 지휘자임이 상세히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아마도 신문기자들에게 독립운동의 꿈이요 태양과 같은 존재로 보였던 듯 하다 독립군 대장으로 인터뷰 기사가 나간 사례는 거의 독보적인 사례에 해당할 정도의 용기 있는 행위였다

그런데! 그는 결정적인 데에서는 동포들에게 본인을 김일성(金日成)이라고 말하고 떠난 듯하다 그는 흡사 의적 일지매나 임꺽정같은 행동도 하고 백마를 타고 홀연히 나타나 일본군을 단호히 혼내 주고는 동포를 도와준 뒤에 귀신같은 사라지는 멋진 행위를 만주동포들에게 서서히 신화 같은 인물로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가며 날로 신비성을 증폭시키는 가운데 <김일성 신화>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불행한 영웅이었던 듯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본의 적(敵)인 공산 소련군과 손을 잡기도 하며 공동작전을 펴는 등의 전투를 하다가 서서히 소련군에 잡혀 버리는 길을 가고 끝내 그들에게 이용당하며 인생을 마친 듯하다


어떻든 <김일성 신화>는 그가 사라졌어도 만주 땅에 강력히 남았었고 그것이 이어지며 말기에는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김광서 장군)을 빌려쓰면서 6.25동족상잔을 일으켜 <김일성 신화>에 흙칠을 하고 마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내래 어렸을 때는 진짜 옛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수다래. 부친이 늘 우리 형제에게 너희들도 그런 훌륭한 분처럼 되라고 애기하여 주었수다래. 성주형님은 만주에 있는 우리 독립군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리고 전투를 잘했기 때문에 진짜 김일성 장군이 이름을 물려준 거야요. 형님에게 이름을 물려 준 김일성장군도 역시 그 전대의 진짜 장군으로부터 이름을 물려 받은 거야요>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가진 엄청난 공백이다 몰라서 만들어진 공백? 사회주의라는 이유에 의한 공백! 소련군과 연합으로 전투하였다고 공백! 스탈린에 무참히 끌려간 홍범도나 공산당에 잡혀 가시밭길을 간 김광서를 오랫동안 버려둔 공백! 일본 경찰의 문서조작에 의한 공백! 일본정부의 독립군 분야 비밀문서 미공개 공백!등 수 없는 공백이 있다

  • 신흥무관학교 10년사가 토대가 된 청산리 신화도 현재로서 많은 연구가 되어 있으나 아직도 수 많은 공백이 있을 것이다 (사진 좌:신흥무관학교)

그런 공백의 대표적 사례에 해당할 것이 위대한 영웅이며 백전백승의 명장이며 불세출의 지도력을 가졌던 민족의 태양인 진짜 김일성 장군의 실종이 아닐까?

(3)전설의 김일성 장군 유족에 건국훈장 수여 (옥포誌 2000년 1월호) 정 현 백 자료
한인들 사이에 전해져 온 김일성장군에 관한 전설은 한인들이 그저 알고 있기로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약탈하던 그 때부터 '김일성 장군'이란 용맹한 항일전사가 있어서 오랜 세월을 두고 韓滿국경 혹은 露滿국경에서 일본의 군경과 숱한 전투를 백전백승으로 치루어 낸 특출한 군략가이며 애국자였다는 이야기였다. 구전으로 퍼져 와 그야말로 전설적이었던 까닭에 주인공 '김일성'의 이름자가 金日成인지 아니면 金一成인지 또 아니면 金一星 또는 金日星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김경천 장군의 자식들. 앞줄 왼쪽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맏딸 지리, 셋째딸 지란, 막내딸 지희, 맏아들 수범>


이러한 전설이 생겨날 만한 사실상의 근거가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는데 그것은 '金一成 장군'이란 항일투사와 또 한 사람, 같은 발음의 '金日成 장군'이라는 항일투사 두 사람의 투쟁사에 얽힌 이야기였었다. 그 전설적 김일성장군 그 중의 한 사람인 김경천 장군의 혈육이 8·15 50주년을 맞아 지난 98년에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게 되었다고 하니 후손 된 우리로서 심히 민망스러워 몸둘 곳을 모르겠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작년 8·15 50돌 기념식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은 독립군 장령 김일성장군(金一成. 1888년 함남태생) 즉 김경천 장군에 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 <주:김경천 장군의 아버지 김정우. 그는 35살의 늦은 나이에 일본에 유학하고 돌아와 대한제국 육군군기창장으로 일했다.(1900-1908년)>

(사진 좌:김경천의 부친 김정우)

 

백마를 타고 번개같이 날아다녔다는 김경천 장군의 본명은 '김광서'로서 함경남도 북청출신이며 1911년 일본 육사 23기생으로 기병과를 졸업하고 도쿄 기병 제1연대에 근무한 바 있고, 1917년 1월에서 9월까지는 육군기병실시학교에서 용병법과 기마술을 교육받은 바 있으며 일본육사출신 한인 친목 모임인 "전의회"의 회장으로서 그 회원 중에는 일본 육사 26기 흥사익, 이응준, 27기 김석원, 김인욱 등 34명이 있었다.

앨범에 적힌 김경천(본명 김광서)의 생일은 1887년이나, 종로구청 호적계의 제적서고에 있는 그의 호적등본에는 1888년 6월 5일로 되어있으며, 1919년 6월 망명이전까지의 주소는 사직동 166번지인데 1912년 12월 2일 본인 출원에 의한 취적 등록이라 되어있고 본적도 이곳으로 옮겨져 있고,



본관도 김해에서 시흥으로 되어 있는데 본인 출원에 의한 정정이라 기록되어 있다. 동향인의 증언에 의하면 북청군 해안의 승평태생임이 틀림없다고 한다. 육사 재학 중에 이름을 김광서로 개명했고 그 이전의 이름은 김현충이며 김경천, 윤경천 등의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父 김정우는 구한말 포병부령까지 지낸 자로서 1857년생이며 1894년 5월 38세의 나이로 일본 경응의숙보통과에 입학하였다. 그의 반에는 윤치성(윤치영의 형) 노백린 등이 함께 했는데, 이들은 육사 11기로 1899년에 졸업하게 되고 김정우는 동경고등공업학교를 거쳐 포병공작창에서 총탄제조법을 익힌 후에 돌아와서는 군기창장을 지낸 바 있으며 1906년에는 윤치성과 함께 부령으로 승진된 바 있는 사람이다.

신팔균

철기(鐵騎)이범석(李範奭)


1919년 2월 20일 김경천은 병가를 얻어 귀국하여서는 6월에 일본육사 3년 후배인 이청천(지대형)과 함께 만주로 탈출 신흥무관학교에 찾아가 독립군 교육부터 담당했다. 이 소식에 고무되어 열혈청년이 600여명이나 신흥학교에 몰려들었다 한다. 이 때에 구한국군 정위(대위) 신팔균도 함께 교관으로 있었는데 세 사람이 합심단결하여 조국광복을 쟁취하자는 뜻에서 天자 돌림 별호를 쓰기로 하여 신동천, 김경천(또는 윤경천, 母가 윤씨), 지청천(이청천, 母가 이씨)으로 서로 불렀는데 한인 사회에서는 이들을 남만삼천(南滿三天)이라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이 남만 3천에 열혈 청년장교가 한 사람이 더 끼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철기(鐵騎)란 별호를 가진 이범석(李範奭)이었다.

그는 그해 봄에 중국의 운남성에 있는 운남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장교로 배치되었는데 남만의 신흥무관학교가 독립군의 집결지라는 소문을 듣고 그해 여름에 그리로 찾아와서 남만 3천과 합세했다. 이들 4사람의 장교들은 당면 목표를 다음해(즉1920년) 3월 1일을 기해 국경을 넘어 조선 땅으로 진격함으로써 3·1민족봉기를 재현시키는 일대 계기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범석씨(1900-1972) 증언에 따르면, 1920년 3월 1일을 기하여 국내로 진격하기 위한 거사 계획의 일환으로 김경천은 1919년 초겨울에 무기구입차 소련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때 시베리아에는 볼셰비키 혁명의 파급을 막기 위해 일본군이 출병해 있었는데 일본군의 한인 독립운동 근거지에 대한 공격 때문에 김경천은 독립군을 규합하여 日軍과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원리에 따라 赤軍(볼셰비키군)과 연합하여 일본군 또는 白軍(反볼셰비키군)과 싸웠는데 이때에 그는 김일성이란 또 하나의 별호를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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