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역사 탐방및 인물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작성자(睦園)박이환|작성시간15.06.25|조회수67 목록 댓글 0

 

한니발

“장군, 장군 생각에 역사상 최고의 명장은 누구일까요?” “말할 것도 없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능가할 사람은 없소.” “그렇군요.

그러면 두 번째는요?” “에피루스의 피로스요.” “…음. 그럼 세 번째는?” “바로 나, 한니발이오.” “하하, 그러나 장군은 제게 지지

않았습니까?” 언제쯤 자기 이름이 나오나 하고 조바심 내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조국 카르타고를 떠나 시리아에 망명하고

있던 한니발에게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러게 말이오. 하지만 내가 그때 당신한테 지지 않았다면, 나는 알렉산드로스와 피로

스를 뛰어넘어 사상 최고의 명장이 되었을 거요.”


2300년 전의 세계대전

 

매우 오만한 말 같지만, 그 말이 결코 허풍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위대한 장군이었던 한니발(결국 스키피오는 그 말에 효과적인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에 스키피오에게 패할 때까지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싸웠다. 그러나 결국 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했다. 그가 평생의 목표로 삼았다는 “반드시 로마를 쓰러트린다”는 꿈도 헛된 꿈으로 끝났다.

 

기원전 3세기, 카르타고는 지중해 세계의 초강대국이었다. 기원전 8세기에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포에니 전쟁’의 ‘포에니’는 페니키아를 가리킨다) 카르타고는 지금의 튀니지 북쪽 해안의 카르트하다쉬트를 본거지로 해서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 서부, 이베리아, 몰타, 발레아레스 제도,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시칠리아의 일부까지 지배했으며 서지중해는 “카르타고의 허락 없이는 바닷물에 손을 담글 수도 없다”고 할 만큼 완벽히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의 앞선 해양력은 무역선을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와 서아프리카의 황금 해안까지 오갈 수 있게 했다.


 

 

한편 농업도 발달해, 풍부한 밀 생산량은 무역을 하지 않아도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빈곤한 유럽

중서부에 수출까지 할 수 있었다. 카르타고는 이런 막강한 국력을 믿고 동지중해까지 판도를 넓히려 했다. 그 시작으로써 서쪽 절

반만 지배하고 있던 지중해 중부 시칠리아 섬의 나머지를 손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뜻밖에 연이은 암초에 부딪쳤다.

먼저 한니발의 언급에서 나오는 사람, 그리스 국가 중 하나인 에피루스의 왕이던 피로스가 카르타고의 야심을 막아냈다. 그리고

그 다음 암초는 바로 로마였다.

 

로마는 기원전 8세기경 성립되어 삼니움, 갈리아 등 이민족과 대결해 가며 차차 세력을 넓혔고, 3세기에는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달성했다. 통일의 마지막 장애물이 바로 에피루스의 피로스였는데, 그는 카르타고와는 반대로 동지중해를 기반으로 서쪽

을 정벌해 세계를 통일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에 상륙해 로마를 매섭게 공격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그 다음 원정에서 시칠

리아의 카르타고를 무찌르고는 다시 로마와 겨루었으나 패퇴하고 그리스로 돌아갔다가 전사하고 만다.

 

피로스가 사라지자 지중해의 패권을 노리는 카르타고를 막을 세력은 로마뿐이었다. 로마의 국력은 카르타고에 비하면 약세였고, 특

히 육전에는 강해도 해전에서는 카르타고에게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그래서 로마 원로원도 동맹을 맺고 있던 시칠리아 동부의

도시들이 카르타고의 침략에서 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과연 우리가 바다 건너 외국에서 싸워 이길 수 있을까?’하고 무척 망

설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원정대가 로마를 출발했고, 이로써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된다(기원전 264

년).

 

의외로 카르타고 편이던 시칠리아 도시들이 배반하여 로마 편을 드는 바람에 로마군은 시칠리아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해군력 열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여겨, 총력을 기울여 새 함대를 건조했다. 그래도 카르타고 함대의 규모에는

못 미쳤지만, 로마의 새 군함은 적함에 걸쳐 놓고 보병대가 돌격해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적교를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카르

타고 해군의 우수한 조함술을 따라잡을 수 있고, 바다에서도 로마의 장기인 백병전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효과는 확실해서,

로마는 기원전 260년 시칠리아 북부 해안에서 카르타고 해군을 격파한다. 이후 카르타고 본거지에 대한 공격에서는 참패했지만, 다

시 시칠리아를 무대로 벌어진 공방전에서 결국 승리를 거두어 제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난다(기원전 241년). 로마는 이

로써 카르타고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받는 한편 시칠리아 전체를 차지했고, 여세를 몰아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까지 손에 넣는다.

 

한니발, 로마의 등에 칼을 꽂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때 시칠리아에서 용병대를 조직해 로마군을 집요하게 몰아붙여, 한때 로마를 패배 직전까지 몰고 갔던 카르타고

장군이 있었다. 그는 하밀카르 바르카스라고 했는데, 패전 후에는 이베리아로 건너가 정복지를 넓히고 은광을 개발하기도 하며 카르

타고의 손상된 국력에 보탬이 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229년 그만 암살당하는데, 배후에는 로마가 있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이 바로 한니발 바르카스였다. 하밀카르는 어린 한니발에게 “네가 자라면 반드시 로마를 멸망시켜야 한다.

신과 아버지 앞에 맹세하거라.”라고 했다고 한다. 어린 한니발에게 로마는 아버지가 반드시 멸망시키고 싶어했던 나라요, 아버지를

죽인 나라였다. 그리하여 그가 기원전 221년에 26세의 나이로 이베리아의 카르타고군 총지휘권을 손에 넣자, 이베리아 북부를 공략

중이던 로마와는 날카롭게 대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는 지중해 연안의 도시 사군툼을 속령으로 선언하고, 카르타고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니발은 사군툼을 공격해서 점령해버렸다. 기원전 218년의 일이었고, 이것으로 제2차 포에니 전

쟁은 시작되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래 카르타고의 국력은 크게 쇠퇴했지만, 로마와 자웅을 겨루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카르

타고 본국은 부패와 정쟁에 찌들어 있었다. 또한 민간인과 군인의 구분이 없던 로마와 달리 직업군인 제도가 전통이던 카르타고에

서는 어떤 장군이 혁혁한 공로를 거두면 민간인 정치인들의 의심과 질투의 대상이 되는 일이 많았으며,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

과 해상 무역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 사이의 다툼도 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카르타고 본국의 도움을 포기한 한니발은 혼자 힘으로

로마와 싸우기로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발상의 대전환’을 했다.

 

 

 


이전 전쟁에서 ‘로마는 육군의 나라이고, 카르타고는 해군의 나라다’라는

발상을 뒤집어 바다에서도 육지에서처럼 싸우는 방법을 개발하여 로마가

승리를 거뒀듯, 이번에는 바다가 아닌 육로로 로마를 침공, 육전에서 로마

를 패배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로마가 서지중해에서만 카르타고 함대가 쳐

들어오지는 않나 하고 감시하는 동안, 한니발은 4만의 병력으로 피레네산

맥을 넘고, 갈리아를 통과, 다시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침입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뛰쳐나온 한니발군에게 로마인들은 혼비백산했

다. 그래도 총 75만의 병력을 가진 로마군은 원정 과정에서 절반가량 줄어

이제는 2만 5천뿐인 한니발군을 간단히 무찌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한니발은 기병대와 코끼리부대(다만 코끼리부대는 그다지 실효성이 없었다

는 지적도 있다. 코끼리부대는 결국 나중에 한니발의 발목을 잡는다)를 써서

 로마의 중장보병을 뒤흔들어 놓고, 이를 다시 보병대로 밀어붙이는 전법으

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특히 기원전 216년의 칸나에 전투에서는 로마군 8만

명 중 5만 명을 살육했으며, 이는 1916년 솜 전투 이전까지 서양에서 하루에

가장 많은 인원이 전사한 전투로 남았다.

 

한니발은 나중에 ‘전략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전투의 여러 요소를 적절히 배

합하여 통상적인 전투력보다 몇 배나 되는 힘을 끌어내는 천재였다. 또한 리

더십도 뛰어났다. 이역만리 적지에서 17년 간이나 머무르면서도 대부분 용병

인 한니발군은 전선을 이탈하거나 난동을 부리는 일이 없었다. “병사들과 함

께 먹고 함께 자며, 자신의 이익은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적을 무

찌를 생각에만 골몰해 있는” 한니발에의 마음에서 우러난 존경심이 없었다

면 불가능했으리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그는 군사전략에는 뛰어났지만 정치

전략에서는 실패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훌륭한 조국’을 갖지 못했다.

 

   

소수 병력으로 적진 깊숙이 침투했을 때는 적의 머리를 쳐서 적진을 와해시키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한니발은 연승을 거두면서

도 좀처럼 로마 시로 진격하려 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빙빙 돌며 17년을 보냈다. 그 까닭은 오늘날까지 완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인데, 소수병력의 한계를 잘 알고 있던 한니발이 로마군을 직접 전멸시키기보다 로마 연합에 소속되어 있던 동맹도

시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기를 꾀했다는 추측이 가장 유력하다. 한니발이 보기에 로마는 이탈리아를 통일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단지 로마의 힘에 굴복해 복종할 뿐인 도시가 많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니발이 로마군의 주축을 깨트리면 기회라고 여겨 반란에

 나설 도시가 많을 것이며, 그러면 로마는 저절로 멸망의 길로 가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로마 연합은 견고했고, 두 세 도시를 제외하고는 한니발에게 끝까지 항전했다. 그리고 로마군 총사령관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유명한 ‘지연 전략’을 펼쳤다. 한니발과 정면승부를 벌여 이길 가망이 적으니, 그가 돌아다니며 싸움을 걸어도 응하지 않으면서 그의 점령지 중에서 수비가 느슨한 곳만 골라 공략하는 식으로 싸운다. 그러면 소수에 불과한 한니발군은 결국 지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주효하여 한니발은 처음 몇 차례의 대승 이후로는 로마군 전체 전력을 좀처럼 줄이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했다.

 

이러는 사이에 ‘한니발을 본받아 한니발에게 이기자’는 목표를 세운 젊은 로마 장군, 스키피오가 등장했다. 그는 한니발의 길을 거꾸로 밟아 그의 본거지인 이베리아를 정복해 버린다. 그리고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 본국을 공략한다. 여기서 한니발의 조국은 스키피오의 조국에 비해 너무도 나약하고, 비겁한 대응을 했다. ‘우리는 이번 전쟁과 무관하며, 모든 책임은 한니발 개인에게 있다’면서 로마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매년 바치는 한편 한니발을 본국으로 소환하겠다고 한 것이다. 기원전 203년, 한니발은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이탈리아를 떠나 카르타고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카르타고여, 나를 용서해 다오!”


귀국한 한니발을 앞에 두고, 카르타고의 집권자들은 다시 표변하여 로마에 적대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당시 카르타고는 로마의

감시를 받는 반쯤 속국이나 다름없었는데, 한니발은 은밀히 병력을 모으며 로마와의 재대결을 준비했다. 이 와중에 로마의 수송

선이 카르타고인들에게 약탈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로마 원로원은 스키피오에게 카르타고를 쓸어 버리라고 명령했다. 기원전

202년, 북아프리카의 자마에서 45세의 한니발과 33세의 스키피오는 세기의 결전을 벌였다. 한니발은 약 5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수적으로는 스키피오에게 다소 앞섰다. 그러나 한니발의 전술에 필수 요소였던 누미디아 기병대가 이번에는 로마군 편에 서 있

었다. 한니발은 코끼리 부대가 그 공백을 메워 주기를 기대했으나, 로마군의 화살과 투창 세례에 놀란 코끼리는 뒤로 돌아서 카르

타고군을 짓밟았다. 전투는 로마의 승리로 돌아갔고, 카르타고의 희망도 꺼졌다.

 

 

 

한니발은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정치인들을 피해 망명했다. 그리하여 티레, 시리아, 비티니아 등을 떠돌며 로마에

 복수할 방법을 모색했으나 헛수고였다. 기원전 183년, 비티니아 왕이 로마군에게 그를 넘겨주기로 결정했음을 듣고, 그는 독약을

 마셨다.

 

“아, 카르타고여! 나를 용서해 다오!” 그는 죽어가며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용서를 빌어야 할 쪽은 카르타고가 아

니었을까. 그가 죽고 37년 뒤, 로마는 몰락할 대로 몰락한 카르타고에게 최후의 싸움을 건다. 그리고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는 멸

망했다. 로마군은 도성 안의 모든 남자를 학살하고, 모든 여자와 아이를 노예로 잡아갔다. 심지어 나무와 풀까지 불사르고는 소금

을 대량으로 뿌려, 다시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

로마인 이야기 2권의 주인공은 로마인이 아닌 페니키아인으로,

지금의 아프리카 북부 튀니지에 있었던 고대왕국 카르타고의 장군이었던 한니발이다.

 

 

 

마침내는 커다란 제국을 이루어서 1,000년의 역사를, 우리가 동로마라고 하는 비잔틴제국까지 포함한다면 2,000년의 긴 생명을 이어간 로마는 기원전 500년경에 조그마한 부족국가로 시작했다.

(보통 서로마 멸망 이후의 동로마, 즉 비잔틴을 순수한 로마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그리스인종 중심의 국가가  되었고 동방의 페르시아적인 문화를 많이 받아들여서 시민으로부터 권력이 나오는 전통적인 로마의 성격에서 많이 벗어났던 데 이유가 있다.)

부족국가의 로마가 주위의 여러 부족을 압도하여 지중해 지역의 패권국가가 되기까지는 수많은 역경이 있었다.

 

이탈리아반도의 주변 라틴족이나 북부의 켈트족, 지금의 프랑스 지역에 있던 켈트족(골족) 등을 복속시키고 격퇴하고...

로마의 강점은 국가제도, 부대편성과 대형등의 전술, 전투기법, 그리고 우수한 정치인과 군대지휘관들의 역할 역시 컸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지중해지역 패권국가였던 카르타고를 3차까지 가는 오랜 전쟁을 통해서 멸망시키고 도시가 있던 땅에는 소금을 뿌려서 풀조차 자라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사람 개개인에게도 마찬가지 이겠지만 국가에 있어서도 능력에 더해서 운이나 여건 또한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로마는 위기시마다 적절한 인물이 나타나서 국가와 시민을 구했는데 2차 포에니전쟁에서는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대가 이베리아 반도를 거치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반도에 들어온 후 로마의 성을 에워싸고 공성전을 할 정도로 위기를 맞았다.

그런데 한니발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후퇴까지 하게 된 이유는?

 

한니발이 너무 쉽게 성공하면 자신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에 손상이 갈 것을 걱정한 본국의 고관 정치인들이 보급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성을 포위하는 공성전은 시간과 사기와의 싸움이고 이것을 유지시키는 것중의 하나가 적절하고 충분한 보급이다.

본국의 시기 질투하는, 그리고 자신의 밥그릇만 보전하려는 일부 정치인들 때문에 카르타고는... 로마를 역사 게임에서 지워버리고 패권을 확장할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역사에 '만약' 이라는 단어는 존재할 수 없다지만 카르타고에 한니발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지원해 주는 세력이 있어서 넉넉한 군량과 소모품을 보급받았다면??

 

로마에서는 30대 초반의 스키피오라는 전술가가 때마침 지휘관으로 임명되어서 힘빠진 한니발군대를 추격해서 패배시켰다.

 

 

로마의 발전 초기에는 문화에서는 그리스 지역이, 경제력에서는 오리엔트가, 체력에서는 켈트족이나 게르만족이, 해상능력에서는 페니키아인이나 그리스인이 로마에 비해서 우위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는 주위의 모든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정책으로 그들을 압도했다.

역사의 중심은 머물지 않고 움직인다고 하는데 지금의 유럽이나 미국이 강한것은 그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문화를 흡수한) 로마의 오랜 패권의 결과는 아닐런지...

 

 

                                   

 

                                                       한니발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