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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發掘 <26> 분실된 제국, 잃어버린 도시스페인 정복자들에

작성자(睦園)박이환|작성시간15.09.06|조회수135 목록 댓글 0

찬란한 發掘 <26> 분실된 제국, 잃어버린 도시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사로잡혀 처형될 때까지 新잉카제국의 위치를 비밀로 한 황제|                  

   


찬란한 發掘 <26> 분실된 제국, 잃어버린 도시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사로잡혀 처형될 때까지 新잉카제국의 위치를 비밀로 한 황제

趙甲濟       


만코의 반란

잉카제국의 황제 아타우왈파는 피사로의 석방 약속을 믿고 약 20평의 방을 황금으로 가득 채웠다. 다른 두 방은 은으로 채웠고 스페인 원정군 기록에 따르면 아티우왈파가 끌어 모은 황금은 약 1.5t. 韓國(한국)의 1973년도 금생산량보다 많다. 황금빛에 정신이 돌아버린 피사로는 석방약속을 어기고 황제를 再체포 형식으로 계속 붙잡아 두었다. 잉카백성들이 황금을 속속 가져오리라고 그는 기대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대제국의 산속에 고립된 180 스페인 용병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반란의 조종자로 황제를 의심했다.

1533년 8월29일 카하말카에서 황제는 재판을 받았다. 반역죄로 화형이 선고된다. 처형 직전 황제는 신부의 설득으로 가톨릭에 개종했다. 그 대가는 감형이었다. 종신형으로의 감형이 아니라 화형에서 교수형으로 감형된 것이다. 황제는 세례까지 받고 ‘판’이란 法名(법명)도 받는다. 황제는 죽음 앞에 비겁했던가? 황제가 개종한 것은 잉카종교의 來世觀(내세관) 때문이었다. 불타죽은 사람은 저승에서 神(신)에게 거부된다고 그들은 믿었다. 황제는 저승의 평안을 위해 이승의 굴욕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스페인 용병들은 황제의 목에 쇠 끈을 감고 몽둥이를 끼워 돌려서 목을 죄는 악랄한 방법으로 그를 죽였다. 스페인 용병이 하카말카를 떠난 뒤 인디오는 시체를 수습, 키트로 모시고 그들의 장례의식에 따라 다시 묻었다.

9월 초 스페인 정복대는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를 향해 진군을 개시한다. 괴뢰황제로 세운 토팔카를 데리고. 도중에 그들은 고귀하게 생긴 인디오 청년과 부딪쳤다. 그는 아타우왈파황제의 이복형제라 자칭했다. 마침 토팔카가 병으로 죽은 참이라 피사로는 이 소년을 허수아비 황제로 즉위시켰다. 그의 이름은 만코.

1533년 11월15일 피사로는 쿠스코에 무혈 입성했다. 예상대로 놀라운 도시였다. 질서정연한 도시계획, 전부 포장된 도로와 완벽한 상하수도, 엄청난 대리석 궁전건물, 광장과 신전의 예술성―피바람을 일으키며 살아온 피사로 일당도 해발 3400m의 진주 같은 도시에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쿠스코는 16㎢의 넓이를 가졌는데 그 북쪽 巖山(암산) 꼭대기엔 난공불락의 요새가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요새를 점령하려면 굴을 뚫는 수밖에 없다”고 피사로는 생각했다.

잉카제국을 일단 손에 넣은 피사로는 만코를 허수아비로 세워놓고 페루해안 지방에 진출, 새로운 도시 리마의 건설을 꾀했다. 피사로의 이복동생 엠르난드 피사로가 쿠스코에 남아있었는데 어느 날 만코가 유카이 계곡에 숨겨진 父王(부왕)의 黃金像(황금상)을 찾지 않겠느냐고 말을 걸어왔다. 1536년 2월 만코는 이 황금상을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부하를 지휘, 유카이 계곡으로 사라졌다. 몇 달 뒤 만코는 이 계곡을 거점으로 확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유카이 계곡은 옥수수 재배지로 반란군이 식량을 자급자족하기엔 안성맞춤. 잉카농민들은 예부터 단식 농경법을 개발, 계곡물을 양쪽 언덕으로 끌어올려 옥수수를 재배했다.

만코의 반란선언이 있자 원한에 사무친 귀족과 백성들이 몰려왔다. 만코는 5만의 반란군을 편성, 쿠스코를 습격, 포위한다. 쿠스코엔 200명의 스페인 수비대가 있었다. 잉카군은 불화살 세례를 퍼부어 쿠스코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수비대는 집을 잃고 광장에 몰려 텐트를 치고 불안 속에서 항전했다. 잉카공격 부대는 돌을 성안으로 던져 쿠스코의 길을 막고 수비대를 광장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공격은 6개월 계속됐다. 스페인 수비대의 우수한 무기가 중과부적의 그들을 지탱하고 있었다. 6개월째 잉카군은 10만으로 부풀었다. 쿠스코의 운명은 태풍 앞의 촛불 같아 보였다.


분실된 제국

1536년 8월 쿠스코 공방전이 6개월째 접어들었을 때 스페인 수비대는 잉카군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데 놀랐다. 당시 징발된 잉카군대는 10만. 대부분이 농민이었다. 반란황제 만코는 식량보급에 고민하고 있었다. 잉카제국엔 무료숙박소를 닮은 탄보란 조직이 있었다. 안데스 山腹道路(산복도로)의 요충지에 만들어진 탄보들은 그물처럼 연결돼 행인들은 피난처나 숙박소로 손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이 조직이 스페인의 침입으로 붕괴되고 최대의 富(부)를 자랑하던 쿠스코가 적의 손에 들어갔기 때문에 만코는 식량을 자급할 수 없었다. 그는 군대를 줄이기 시작, 서서히 쿠스코의 포위를 풀었다.

기사본문 이미지
新잉카제국의 마지막 황제 투팍 아마루

만코는 유카이 계곡을 더욱 거슬러 올라 빌가마유 계곡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장기항전 태세를 가다듬는다. 오랑타이탄보城(성)이란 요새를 절벽 위에 건설하고 바깥세계와는 줄다리 하나로 연결되도록 했다. 스페인 용병들은 이 성을 공략하려고 몇 번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한편 스페인 깡패들은 쿠스코의 통치권을 놓고 집안싸움을 벌이기 시작. 피사로의 副將(부장)인 말마구트가 반란을 일으켜 일시 쿠스코를 점령했으나 피사로 형제의 계략에 걸려 1538년 4월 사리나스 결전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다. 그가 사형되자 그의 아들 디에고는 암살단을 조직, 피사로를 노리게 됐다. 1541년 6월26일 암살단은 리마의 피사로집을 습격, 피사로를 저승으로 보냈다.

만코는 이 소식을 듣고 기뻐 날뛰었다. 도망친 암살단이 유카이 계곡으로 들어오자 그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정도였다. 당시 만코는 안데스 산맥 중심부로 계속 들어가 우루반바江(강)의 발원지 근방에 잉카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자연지형을 이용한 기막힌 제국이 소리도 없이 해발 3000~5000m에 모양을 갖춰가고 있었다. 도시는 주로 산꼭대기에 건설됐다. 정상과 정상 사이엔 비밀터널을 뚫어 연락했고, 외부세계와는 줄다리로만 이어졌다. 이 줄다리는 두 가닥 줄로 된 것인데 케이블카를 닮은 나무통에 사람이 타고 건너도록 설계됐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新(신)잉카제국의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지독한 전도사들이 간혹 접근을 시도했으나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일단 新(신)제국의 건설이 끝나자 만코는 스페인 정복자들에 대한 게릴라전을 펴기 시작한다. 줄다리를 건너 스페인 부대를 습격하고 안데스  비경으로 사라지는 히트앤드런(Hit and Run) 작전. 만코는 암살된 피사로의 이복동생을 정벌하기 위해 스페인 본토에서 파견된 副王(부왕) 베라와 손을 잡고 피사로 작당에게 복수하려했다. 그러나 비극이 이 계획에 종지부를 찍었다. 만코가 구해준 6명의 피사로 암살단원이 만코를 암살한 것이다. 副王(부왕)과 짜고 그랬다는 기록도 있다. 암살단은 新(신)잉카제국을 탈출하는 도중 몽땅 잡혀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만코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3명이 차례로 사파 잉카가 됐다. 첫째는 사이리 투팍. 그는 1555년 스페인 副王(부왕) 카니에트의 설득에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300명의 종을 데리고 新잉카제국을 나온 이 황제는 정복자의 품안에서 살다가 1560년 병사했다. 이것이 잉카제국의 굴욕적인 최후인가. 그렇지 않다. 투팍은 끝까지 新잉카제국의 위치를 불지 않았다. 상당수의 병력과 완전한 도시를 그대로 남기고 제국을 나와 혼자서 개종한 것은 백성의 안전을 위한 고귀한 희생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투팍이 죽자 新잉카제국에선 그의 동생 티투 쿠시가 즉위. 쿠시는 스페인 선교사가 보낸 독약을 폐렴치료약으로 속고 먹은 뒤 죽었다. 그의 동생 투팍 아마루가 자리를 이어 받았지만 빌카밤바 전투에서 스페인군에게 사로잡혀 쿠스코 광장에서 처형됐다. 아마루는 新잉카제국의 위치를 불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하나의 제국이 분실됐다. 


(‘잉카의 몰락’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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