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懲 毖 錄 ]
[혼날징, 삼갈비,
기록할록]
극중 류성룡 선생
KBS 대하 역사극 징비록을 2월
14일부터 방영한다고 하니 사뭇 기대가 크다. 징비록은 그제목 자체가 뜻하는 바와 같이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삼어
다시는 이런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혹독하게 겪었든 임진왜란 전후의 사정을 서애 유성룡이 눈물과 회한으로 기록해 놓은 것이다. 우리의
뼈아픈 치욕의 역사기록이지만 오늘날에도 고질적인 당파 싸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찌 그리도 비슷하니 참담했든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관심을 갖고 시청하려한다.
눈물과 회한으로 쓴 전란의 기록
물론 『징비록』이 임진왜란을 다룬 유일한 기록문은 아니다. 하지만 유성룡이 전란 당시 전황이 돌아가는 급박한 사정을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살필 수 있는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으며, 기록문학의 일차적 자료가 되는 조정의 여러 공문서들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임진왜란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으로서의 『징비록』이 갖는 가치와 매력은 학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록문학의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기록자의 객관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징비록』은 신뢰를 받고 있다. 애초에 상대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공론정치의 활성화라는 목적에서 시작된 붕당정치는, 선조 때부터 소모적인 당쟁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유성룡 역시도 동인의 일원인 남인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능이나 전술의 부재로 인해 전투를 그르친 일부 장수들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제외하면 비교적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음을 『징비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록문학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징비록』의 저술 연대를 보여주는 명확한 기록은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유성룡이 『징비록』의 저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용한 사료나 공문서들에 대한검토 시간을 고려할 때,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한 지 3~4년째가 되는 1601년 혹은 1602년 무렵이 본격적으로 집필에 들어간 시기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전란을 대비한 선견지명
다른 한편으로는 점차 현실화 되어가는 전란의 가능성을 애써 외면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즉, 1591년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통신사 일행에게 선조 임금이 전쟁 가능성을 묻자, 통신사 대표 김성일과 황윤길은 상반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이 자리에 함께 있었던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황윤길과 상반된 답변을 한 이유를 따져 묻는 장면이 『징비록』에 나온다.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는 것과 더불어 유성룡이 지속적으로 추진하려 했던 정책은 바로 '진관(鎭管)체제'로의 복귀였다. 조선 건국 당시에 수립된 일종의 지역적인 방어체제인 진관체제는 각도의 관찰사가 병마절도사의 직책을 겸임한 채 주진(主鎭)에 있으면서, 도내 각진의 육군과 수군에 대한 군사 지휘권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진 밑에는 거진, 제진 등이 있어서 지역의 수령이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그 지방의 진지를 지키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병역 기피자들이 증가했고 그 때문에 병력수급에 어려움을 겪자 1555년 을묘왜변을 기점으로 '제승방략(制勝方略)'체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제승방략체제란, 전투가 벌어질 경우 수령들이 휘하의 군사들을 전장으로 인솔해가서, 중앙으로부터 파견된 군 지휘관의 명령을 받는 체제였다. 따라서 이 체제는 대규모의 적군과 정면 대결할 때의 병력운용 개념으로,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 있고 기동전에 대응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에서 파견된 군 지휘관이 전장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므로 급변하는 전세에 기민하게 대처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체제이기도 했다.
유 성룡은 일찍이 제승방략체제의 단점을 지적하면서 진관체제로의 복귀를 강력히 건의했는데, 그 내용이 『징비록』에 들어 있다.
"[오늘날에는 군제가 제승방략 체제로 편성되어 있기에] 비록 진관이라는 명칭은 남아 있사오나 그 실상은 서로 연결이 잘 되지 않으므로, 한번 경급을 알리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멀고 가까운 곳이 함께 움직이게 되어, 장수가 없는 군사들로 하여금 먼저 들판 가운데 모여 장수 오기를 천리 밖에서 기다리게 하다가, 장수가 제때에 오지 않고 적의 선봉이 가까워지면 군사들이 마음속으로 놀라고 두려워하게 되니, 이는 반드시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대중이 한 번 무너지면 다시 수습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이때는 비록 장수가 온다 하더라도 누구와 더불어 싸움을 하겠습니까? 그러하오니 다시 조종 때 마련한 진관 제도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며 피난길에서
그렇게 해서 평양성에서의 소요는 진정되었다. 조정이 항전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민심을 다독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징비록』에는 실제로 유성룡이 선조 앞에서 백성들의 의지를 믿고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항전을 벌인다면 명나라의 지원을 기대해 볼 수 있지만, 평양성을 버리고 의주로 떠난다면 결국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논리를 펼치는 대목이 있다.
원병의 도착과 전세의 역전
그러나 명군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조정은 명나라 군사들이 먹을 양식을 차질 없이 조달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갑자기 닥친 전란 앞에서 조정의 권위가 무너져 인력과 물자의 동원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흩어진 관군을 다시 규합하여 명군과 함께 연합작전을 펼치는 것 역시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평양성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왜군의 전력에 적잖이 놀란 명군 장수들은 전투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명군의 총사령관 이여송(李如松) 역시도 왜군의 습격 소문에 두려워하여 평양성 이남을 수복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당시 유성룡은 체찰사의 직분으로 명군에 대한 보급과 협의를 관장하고 있었는데, 그는 종사관을 통해 명군이 군사를 물려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이유를 이여송에게 전달했다. 거기에는 도성 수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과 결사 항전에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군세를 수습한 관군과 의병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거둔 승리와 남해 바다 이순신의 거듭된 승전 그리고 각지에서 떨쳐 일어난 의병들의 유격전은 전쟁의 양상을 조금씩 바꿔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4월 30일, 왜군이 떠나버린 도성에 명나라 군사가 진입하면서 서울이 수복되었다. 『징비록』의 기록에 따르면 유성룡 역시 명나라 군사를 따라 도성으로 들어왔다. 전란 발발 초기에 아무런 경황도 없이 떠났다가 1년 만에 돌아온 도성이었으니 그 감격이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겠으나, 유성룡의 눈에 비친 200년 도읍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오직 거대한 폐허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백성들의 모습뿐이었다.
선조는 물론 조정의 대신들은 명나라와 왜국 사이의 이와 같은 움직임에 격렬한 반대 입장을 표시했다. 하지만 명나라 지원병의 힘을 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왜군을 몰아내기엔 군사적 역량이 너무도 부족했다. 더구나 그동안 명나라 군대의 군수품를 조달하려는 목적에서 백성들에게 부과한 징발과 부역은 한계점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징비록』에 기록된 유성룡의 민생 현장에 대한 묘사는 참혹하기 그지없다.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굶주림이 만연했으며, 명군이 먹을 군량 운반에 동원된 노인과 아이들이 골짜기에 쓰러졌고, 장정들은 도적이 되어 산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대다수는 전염병으로 죽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아비와 아들, 남편과 자식이 서로를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러 죽은 사람의 뼈가 잡초처럼 드러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는 데 적신호가 켜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종전의 뒤안길에서
전쟁의 종결과 함께 조선 조정은 7년 전란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공허한 영광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 이면에는 커다란 상처를 봉합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징비록』 서문에서 유성룡이 토로한 바와 같이, 임진왜란의 전화가 몰고 온 참혹한 피해를 복구하고 재건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전쟁 발발 수십 일 만에 서울, 개성, 평양 이른바 삼도(三都)가 모두 무너졌고, 임금은 피난길에 올라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보다 극심한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란을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준 이들은 무명의 백성들이었다.
"어지러운 난리를 겪을 때 중요한 책임을 맡아서, 그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지도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지도 못하였다"며 스스로를 책망하는 유성룡의 모습은 당대의 백성들에겐 어쩌면 때늦은 후회로밖에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날의 근심거리를 그치게 한다"는 『시경』의 구절로 자신의 책 제목을 대신한 유성룡의 마음가짐만큼은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역사 서술에서 기록자의 주관을 완전하게 배제한 객관성을 구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록자 본인의 의지와는 별도로 사료의 선택과 재구성, 서술 시점의 선택 등에서 기록자의 주관이 개입되는 것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다만 『징비록』에서 유성룡이 보여준 것과 같이 자신의 선입견과 편견, 당파심의 영향을 줄여나가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하겠다.
2. 임진왜란 발발 초기 민심의 동요와 이반이 심각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전란 이전부터 조세와 부역을 비롯하여 백성에 대한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로 인한 불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여기에 전란이 발발하자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들의 안위만을 도모하는 조정의 실망스런 모습에 대한 배신감이 더해지면서 개전 초기 민심의 동요와 이반 현상은 극에 달했다.
3. 『징비록』이외에 조선시대의 기록문학 작품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비롯하여, 병자호란의 참상을 그린 기록으로 궁녀가 집필한 『산성일기(山城日記)』,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가 궁중생활을 기록한 『한중록(閑中錄)』 등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기록문학 작품들이다.
유성룡(柳成龍)
온건과 타협의 명재상
신임은 얻었으나 곧은 말은 적었다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고향 하회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도성에 퍼지자, 도성의 늙은 아전들과 종로의 장사치들 수천 명이 묵사동(墨寺洞, 오늘날의 남산 밑 언저리)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주인이 살지도 않는 빈집에 몰려와 통곡을 했는데, 이 빈집이 바로 유성룡이 살던 집이었다. 이들은 유성룡의 살림이 가난하여 장례 치를 경비조차 없다는 말을 듣고 너도나도 삼베를 가져오거나 한 푼 두 푼 거두어 장례 경비를 모았다. 그들이 유성룡을 마음으로 우러러봤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의 행적을 더듬어 보면 이런 일이 이해되고도 남을 것이다.
조선 선조 때의 재상으로, 대사헌ㆍ경상도 관찰사 등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권율 같은 명장을 천거했으며, 도학 · 문장 · 덕행 · 서예로 이름을 떨쳤다.
유성룡이 죽은 뒤에 날카롭기로 이름난 실록의 사관은 이렇게 그를 평했다.
천자(天資)가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했다. 학문을 열심히 익혀 종일 단정히 앉아 있으면서 몸을 비틀거나 기댄 적이 없으며, 남들을 대할 적에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고 말수가 적었다.
하지만 칭찬의 말 외에도 그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이해가 앞에 닥치면 동요를 보였기 때문에, 임금의 신임을 오래 얻었으나 곧은 말을 드린 적이 별로 없고, 정사를 오래 맡았으나 잘못된 풍습을 구해 내지 못했다.
- 《선조실록》 권211, 40년 5월조
이로 보면 그는 총명했으나 과격한 성품은 아니었으며, 정치적 이해가 걸릴 경우나 조정에 분란이 있을 때, 처신을 적당히 한 것으로 평가된다.
어느 날 조정에서 선조 임금이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조 : 과인을 예전의 성군인 요 · 순과 폭군인 걸 · 주에 비긴다면 어느 쪽이겠는가?
정이주 : 요 · 순과 같은 군주올시다.
김성일 : 걸 · 주와 같사옵니다.
선조는 안색이 확 변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유성룡이 나섰다.
둘 다 바른말입니다. 정이주는 장차 전하의 성덕을 바라는 뜻이요, 김성일은 전하께 경계를 드리는 말인 줄 아옵니다.
부드러움으로 어색한 자리를 누그러뜨린 것이다. 이런 유성룡이었으니, 그의 정치적 행각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이황의 제자로 학문을 익히다
그는 경상도 의성 땅 사촌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글을 배웠다. 그가 이웃 고을 안동의 도산(陶山)에 가서 글을 배운 것은 21세 때였다. 이때에 퇴계 이황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글방을 열고 제자들을 기르고 있었다. 특히 이황의 문하에는 조목(趙穆)과 김성일(金誠一) 등 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들이 그의 선배로 활동했다.
그가 주자의 《근사록(近思錄)》을 들고 이황에게 중요한 항목을 물어 나가자, 이황은 “이 젊은이는 하늘이 낸 사람이다”라며 칭송했다. 그리하여 선배인 조목과 김성일, 그리고 정구 · 김우옹과 함께 퇴계학파의 줄기를 잇게 된 것이다.
그는 3년 남짓 이황 밑에서 글을 읽고 벼슬길에 나섰다. 그가 생원시와 문과에 합격해서 성균관에 들었을 때나 낮은 벼슬아치가 되고 나서는 스승 가까이에서 글을 익힐 수가 없었다. 특히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오고 인사권을 쥔 이조정랑을 지내는 바쁜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황을 만난 지 7년 만에 이황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듬해 장년의 나이에 접어든 30세에 말미를 얻어 안동 낙수(洛永)의 서쪽 언덕 밑에 스승의 학문을 전수하기 위해 서당을 지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다만 이 서쪽 언덕의 뜻을 따 ‘서애(西厓)’라는 호를 지어 불렀다.
일찍이 이황은 임금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학문을 위해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관에 ‘처사’라고만 쓰고 벼슬 이름은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진심으로 산림처사를 표방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문인들은 조목 등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벼슬길에 나와 활동했다.
유성룡도 곧 서당 짓는 일을 거두고 다시 벼슬길에 나왔다. 그 뒤32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복상한 기간, 그리고 홀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고향 가까운 곳의 벼슬자리를 원하여 33세 때 1년 남짓 상주목사를 지낸 것과 그 뒤 잠시 경상관찰사를 지낸 것 외에는 중앙의 요직에서 거의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순탄한 벼슬길에서 도승지 · 대제학 · 이조판서 같은 요직을 거쳐 1590년(선조 23) 우의정에 올랐다. 48세로 정승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다. 그의 출세는 문벌의 덕을 본 것도 아니고 이황의 후광을 입은 것도 아니었다. 그의 능란한 처세, 신중한 몸가짐과 선조의 남다른 신임도 작용했다.
이즈음 조정은 동인 · 서인으로 갈라져 대립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동인에 속했지만 상대 당파에 대해서도 온건한 태도를 취했다. 동인이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질 때에, 그는 온건파인 남인에 속했다.
그가 정승으로 있을 당시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동인들이 무수히 걸려들었다. 동인에 속한 벼슬아치들이 속속 쫓겨나거나 귀양 가거나 죽음을 당했지만, 그는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끝내 자리를 지켰다. 그의 이름이 연루자들 속에 끼여 있을 때에는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는 자핵소(自劾疏)를 올렸다 .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권율을 추천하다
유성룡은 또 하나 중대한 일에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을 통일한 뒤, 그동안 중단되었던 통신사를 파견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해 왔다. 이를 놓고 조정의 의논이 어수선할 때 그는 통신사를 파견하여 저들의 속셈을 알아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왜가 내침하면, 우리가 맞서 싸울 수 없는 조건을 들고 그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의 의견은 첫째, 삼남지방에 연거푸 흉년이 들어 민심이 안정되어 있지 않고 둘째, 변방의 방비가 허술하여 적을 막을 군사력이 부족하고 셋째, 왜적의 동향을 탐지하여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의견에 따라 성격이 온순하고 침착한 황윤길, 곧고 기개가 넘치는 김성일, 이들을 조화시킬 수 있는 허성을 통신사 일행으로 파견했다. 그런데 통신사 일행이 가져온 일본의 국서에 담겨 있는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에 들어갈 터이다”거나 “명나라를 정벌할 터이니 길을 빌리자”는 따위의 내용을 놓고 조정은 또다시 의견이 분분했다.
각각의 의견이 팽팽히 맞설 때 유성룡은 커다란 회의에 빠졌다. 그는 결코 “왜적이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사실 조정의 대신들도 많은 의구심을 가졌고, 선조도 이 문제에 대해 무척 고심했다. 선조는 정승 박순에게 만일 왜구가 쳐들어오면 도원수감이 될 인재를 구하고 있었다. 박순은 비록 신분이 미천하지만 지략이 뛰어난 정개청을 기용해 보라고 권고했다(《연려실기술》 〈선조조 고사본말〉).
유성룡은 이순신을 천거했고 권율을 기용하라고 했다. 선조는 정읍현감 자리에 있는 낮은 벼슬아치인 이순신을 일약 전라좌수사로 삼아 바다를 맡기고, 형조정랑인 권율을 의주목사로 삼아 육지의 방비를 맡게 했다.
끝내 임진왜란이 터졌다. 선조는 허겁지겁 몸을 빼서 서울을 떠나 개성에 이르러서 유성룡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난의 수습을 온통 그에게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반대파는 쫓겨 가면서도 “화의를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쳤다”고 그를 매도했다. 곧 통신사의 파견을 주장하고 왜의 국서 내용을 명나라에 알려야 한다는 주장을 두고 몰아붙인 것이다. 이리하여 서울이 함락되는 시기에 그는 파직되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승이 맡는 임시직인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소임을 띠고, 군량미를 거두어들이고 의병봉기를 격려하는 한편 명나라와의 파병 교섭을 추진했다.
그는 겁쟁이 선조가 중국 요동이나 함경도로 처소를 옮기려 할 때, 의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관군과 의병에게 반격의 기세를 격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관철시켰다. 그는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가 우리 땅 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나가면 조선 땅은 우리 것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모처럼 대들었던 것이다. 선조는 유성룡의 강경한 요구를 속으로는 싫어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민중들은 선조의 어가에 돌멩이를 던지고 소리를 지르는 등 저항의 기세를 보인 것이다.
영의정에 올라 전후의 혼란기를 수습하다
그는 동분서주하면서 평양 탈환에 앞장섰고 서울 수복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조정이 서울로 돌아온 뒤인 1593년 10월,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에게 난의 수습을 위한 모든 책임이 주어진 것이다. 그는 잠시도 쉴 틈 없이 군국(軍國)의 일을 처리했다.
그가 추진한 전란 수습책을 몇 가지로 나누어 알아보면 이러하다.
첫째, 새로 속오군(束伍軍)을 창설해 양반 자제들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모두 지게 했다. 둘째, 노비와 승려 등 천민들도 군대에 복무하게 하고 그 조건으로 천민신분을 면제해 주며, 공을 세우면 벼슬을 주는 제도를 실시했다. 셋째, 지역 특산물인 공물 납부를 현물로 하지 않고 쌀로 대신하게 했으며 부과 기준을 토지 소유의 정도에 따르게 했다. 실제 양반과 그들에게 딸린 노비들은 군대의 의무를 지지 않는 특권을 누렸으며 공물을 현물로 바치다 보니 폐단이 많았다.
한편으로 그는 화의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추진했다. 그는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제해야 했고 텅 빈 국가재정으로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화의를 서둘렀다. 그의 바른 양심은 왜적의 유린은 물론, 명나라 군대가 부리는 횡포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또다시 그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원수를 잊고 치욕을 참는다”고 반대파가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순신이 어명을 어기고 출병하지 않았다고 조정에서 죄를 논란할 때에는 동료인 정탁(鄭琢)을 통해 변명하게 하고 자신은 뒷전으로 물러났다. 이에 또 “대신의 뼈대가 없다”고 벼슬아치들이 그를 비난했다.
시련은 연이어 닥쳐왔다. 난이 채 끝나기도 전인 1598년, 명나라의 경략(經略) 정응태가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이 왜와 짜고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일러바친 것이다. “이 일로 명나라에 변무(辨誣, 사리를 따져 억울함을 변명함)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지만, 그는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만류했다. 그러자 북인들이 들고일어나 그의 미지근한 태도와 함께 화의를 주장하여 나랏일을 그르친 죄를 공격했다.
유성룡은 영의정이 된 지 5년 만에 끝내 자리를 내놓았다.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 하회로 돌아온 것이다. 파직의 표면적 이유는 명나라 《대명회전》에 이성계 아버지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기 위해서 변무사(辨誣使)를 자청하지 않았다는 것이요, 난중에 원수와 강화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억지였다.
사실 그가 조정에서 쫓겨나게 된 간접적 동기는 두 가지였다. 무엇보다 선조의 변덕이 살아났던 것이다. 선조는 난중에 이순신을 처단하려 하기도 했고, 치솟는 유성룡의 민중적 인기를 시기했다. 그를 죽일 구실은 하나도 없었으니 조정에서 몰아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던 것이다. 게다가 특권이 배제된 양반 무리들의 앙갚음이 그 배경에 도사리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그가 추진했던 정책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양반의 특권은 다시 살아났고, 승려와 노비들에게 약속한 면천(免賤)과 벼슬 주는 약속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공물을 쌀로 환산하고 토지 소유를 기준으로 하는 제도도 사라졌다. 다만 광해군이 그 효용성을 인정해 일부 지역에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을 뿐이다.
고향으로 돌아와 《징비록》을 쓰다
풍진 세상을 벗어나 고향에 돌아와 유유자적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지만 강산은 짓밟혔고 그의 재산도 말이 아니었다. 많은 노복을 거느리는 신분에 먹을 것이 모자라 죽으로 끼니를 이어야 했다.
그는 벼슬살이의 모든 번잡함을 떨쳐 버리고 자성의 마음으로 임진왜란 회고록 집필에 몰두했다. 이것이 명저 《징비록(懲毖錄)》이다. 《징비록》 집필에 열중할 때 그의 관직이 복구되면서 또다시 벼슬이 내려졌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가난한 삶을 자족하며 《징비록》을 완성했다. 《징비록》의 내용은 앞에 일본과의 교린관계 사실을 간단하게 적고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부터 끝날 때까지 7년의 사실을 기록했다. 그 서문은 이러했다.
나는 늘 지난날 전란의 일을 생각하면 황송함과 수치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른다. 이에 한가한 가운데 그 듣고 본 바를 기술했다.
스스로 반성하는 자세를 가지고 글을 써 나갔던 것이다. 책 이름 ‘징비(懲毖)’는 중국 고전인 《서경》에 나오는 말을 빌렸다. 곧 “미리 잘못을 뉘우치고 경계해서 뒤의 환란을 대비한다”는 뜻이다. 그는 다시 이런 참담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며 미리 대비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 책은 임진왜란의 전개과정과 여러 대책을 알아보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7년간 벌어진 임진왜란의 사실을 기록한 이 책은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병들어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은 궁중의 의원을 보내 병을 다스리게 했지만, 그는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그가 고향에 돌아온 지 10년 만에 죽자, 도성의 백성들이 그의 서울 집으로 달려가 목놓아 슬피 울었다. 그가 청렴결백하고 백성의 고통을 늘 염두에 두었기에 서울의 백성들은 너도나도 부모의 초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했고,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장례비를 냈던 것이다.
그의 온건과 타협의 몸가짐이 높은 벼슬을 누리는 밑천이 되었고, 그의 총명과 판단력이 난국을 수습하는 수완이 되었지만, 그에게 쏟아진 비난도 만만치 않았다. 더욱이 그의 선배이자, 한 스승 밑에서 공부했던 조목은 그의 미지근한 태도에 분개해 절교하기도 했고, 같은 조정의 동료인 정인홍과는 원수 사이가 되어 서로 공격을 늦추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패거리만을 두둔하지 않았고 민중의 고통을 살폈으며, 청렴한 삶으로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 재상으로 역사의 귀감이 되고 있다. 또 이황의 수제자로, 조정의 명신으로, 난국을 수습한 정치가로 그의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의 후손들은 안동 풍천의 하회마을에 자리를 잡고 살아왔는데, 오늘날 전통가옥 등 많은 민속적 자료를 간직하고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2007년은 그의 서거 4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를 기리는 발걸음이 병산서원에 이어졌으며, 여러 가지 기념사업이 지금까지 펼쳐지고 있다.
뮤지칼 - 이순신 - 한산섬 닭 밝은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