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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탐방및 인물

징기스칸의 고백

작성자(睦園) 박이환|작성시간15.12.30|조회수74 목록 댓글 0

징기스칸의 고백,

"나는 북방의 야만인입니다."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노획물을 나눕니다.



 


메일 내용

징기스칸의 고백, "나는 북방의 야만인입니다."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노획물을 나눕니다. 나는 우리나라를
마치 갓난 아기처럼 보살피고 나의 병사들을 형제처럼 대합니다."

趙甲濟   

      


Klis Fortress, Split.JPG

아드리아 해를 내려다 보는 크로아티아의 클리스 城. 1242년 몽골 기마군단은 이 성에 헝가리의 벨라 4세가 숨어 있다고 판단, 공격했지만 끈질긴 저항에 부딪쳐 점령에 실패하였다. 이 요새와 가까운 곳에 스필릿이란 항구가 있고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해안 궁전이 있다.
유네스코 문화 유산이다.


 징기스칸 경영학 강의
  
 *인구 100만 명으로 1억명 지배----인류 역사상 최고의 생산성 연구 
 *속도(Speed), 간편성(Simplicity), 자신감(Self-confidence)이 몽골 기마군단 常勝의 비결이었다!
 *위선적 명분론과 허례허식을 버리고 조직과 목표와 행동을 간명하게 함으로써 힘의 집중과 돌파가 가능했다. 

 

 요사이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 가는 곳이 크로아티아이다. 아드리아海를 끼고 이탈리아와 對面(대면)하는 이 지역은 옛날부터 그리스, 로마, 베니스, 헝가리, 오스만 터키, 오스트리아 문명권에 속했다. 달마티아 지방으로 불리기도 한다.
  두 해 전 이 지역을 여행하다가 1240년 러시아 남쪽에서 發進(발진)한 징기스칸 손자 바투의 몽골 기마군단이 아드리아해의 크로아티아 지역까지 쳐들어와 초토화시킨 이야기들을, 현지인들로부터 많이 들었다. 몽골인들에 대한 공포심과 외경심은 지금까지도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다. 비슷하게 생긴 韓中日 관광객이 이 지역을 뒤덮고 있다. 다른 모습의 몽골 침략인 셈이다.
  
   1241년 봄 몽골군에 의하여 헝가리 군대가 전멸당하자 왕 벨라 4세는 아드리아 해안으로 도망갔다. 당시 크로아티아 왕국은 헝가리 왕국과 연합국 개념의 동맹 관계였다. 바투가 2만 명의 별동대를 크로아티아로 보낸 것은 정복이 아니라 벨라 4세 체포였다.
   몽골군단은 아드리아 해안 지역인 달마티아(가장 유명한 도시가 두브로브니크)를 쓸고 다니면서 왕을 찾았다. 이곳 귀족들이 왕을 숨겨주었다.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스필릿도 이때 공격을 받았다.  
   두브로보니크에서 비행기로 디나르 산맥을 넘어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로 갔더니 여자 가이드가 몽골군이 그곳을 파괴한 이야기를 했다. 약 800년 전 눈이 작게 찢어진 몽골군이 몰려와 성당을 불태우고 성곽을 부순 뒤 자그레브가 재건된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 사건이 도시의 번영을 가져오는 轉禍爲福(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몽골군의 회군으로 목숨을 구한 벨라 4세는 도시 再建(재건)을 위하여 자그레브 시민들에게 勅令(칙령)을 내려 '왕실 직할 도시'로 지정, 많은 자치권을 주었던 것이다. 

기사본문 이미지

스플릿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궁전은 일부가 파괴되어 성당이 들어섰다. 

  
  아드리아해에서 자그레브로 넘어가려면 디나르 산맥을 지나야 한다. 해발 2000m급의 험준한 山嶽(산악)이다. 몽골군은 여기서 크로아티아군으로부터 매복 공격을 받아 고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2차 대전 때는 크로아티아 출신 티토가 이 산악 지대를 무대로, 게릴라 부대를 지휘, 나치 점령군과 싸웠다. 2차 대전의 가장 성공적인 게릴라전이었다. 티토는 그런 힘으로 스탈린을 거역하고, 세르비아 사람들을 누르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지도, 自主노선을 걸을 수 있었다. 냉전 후 유고연방이 붕괴되고 內戰(내전)이 일어난 한 이유는 티토와 같은 카리스마 강한 지도자가 사라진 때문이다. 

 기사본문 이미지

스플릿 항구. 1242년 몽골군의 습격을 받았다.
  
   몽골군대는 1258년에 바그다드를 점령, 이슬람 세력의 중심인 압바시드 왕조를 멸망시키고, 1260년대엔 이집트의 맘루크 왕국이 다스리던 시리아, 이스라엘까지 진격하는데, 몽골군의 서양 원정은 약1만6000km의 대장정으로서 지금까지도 깨어지지 않은 最長(최장)의 작전이다.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러시아 원정보다도 더 넓은 작전범위였고 더 성공적이었다. 겨울에도 눈과 얼음을 파내고 풀을 뜯어먹었던 몽골 말 덕분이었다. 이렇게 비유하면 實感이 갈 것이다.

 <13세기 초, 고려 시대에 프랑스와 독일의 기사단이 쳐들어 와서 중국을 초토화시키고 한반도의 동해안까지 진출하였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유라시아 대륙을 뒤흔든 몽골 기마군단의 에너지는 말과 활, 그리고 野性(야성)과 조직의 힘이었다. 개인적인 野性은 역사를 움직일 힘이 없지만 '조직된 야성'은 무섭다.   


 
기사본문 이미지
1242년 몽골군대는 아드리아海岸에서 작전을 하면서 돌산투성이인 디나르 산맥에 걸려 곤욕을 치렀다. 사진은 페리에서 본 달마티아(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 해안 지역) 해안의 돌산 풍경.  


  
  나는 19년 전에 몽골에서 헝가리까지 유라시아의 몽골 벨트 지역 15개국을 약60일에 걸쳐 취재한 적이 있었다.13세기 초 징기스칸의 몽골 기마군단이 高麗에서 헝가리에 이르는 문명세계의 거의 전부를 정복했을 때 몽골 본토의 인구는 1백만에 불과했으나 점령지의 인구는 약1억이었다. 이런 '1당 백'의 정복과 통치가 어떻게 가능했느냐 하는 데 대해서 서양 학자들은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1927년에 영국의 전략사상가 리델 하트가 쓴 '위대한 지휘관들을 벗긴다(Great Captains Unveiled)'라는 책을 읽어보았다.
  그 첫 장이 징기스칸과 그의 휘하 장군 스부데이를 다루고 있었다. 스부데이는 징기스칸의 손자인 바투를 모시고 러시아와 유럽을 원정했던 용장이다. 
  이 章의 결론에서 著者는 몽골 기마 군단 조직의 간편성(Simplicity)을 승리의 근본으로 꼽았다. 몽골 군단은 보급부대가 따로 없는 전원 기병이었다. 기병 한 사람이 말을 4∼5마리씩 몰고 다니면서 짐을 나르는 데뿐 아니라 비상식량이나 물통(사막을 건너갈 때는 말의 피를 빨아마셨다)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느린 보급부대가 따라 다니지 않으면 전투부대의 이동속도는 엄청 빨라진다. 나폴레옹의 유명한 공식에 따르면 <전투력=무장력x기동성>이다. 몽골군단은 全員기병체제 덕분에 농경민족 군대보다 4∼5배나 빨랐다.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서 몽골군단은 갑옷도 가볍게 만들었다.
  
  몽골 군단은 지금도 깨어지지 않는 기록을 두 개 갖고 있다. 그들은 1237∼1238년 겨울, 그리고 1240∼1241년 겨울 두 차례 러시아로 쳐들어가 겨울 작전을 성공시켰다. 수 백년 뒤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굴복시켰던 러시아의 冬장군도 몽골 기마군단의 지구력을 꺾지 못했던 것이다. 몽골 기마군단은 1241년 초에는 헝가리 정복전에서 하루 평균 1백km를 주파했다. 이 속도는 2차세계대전에서 기록된 독일 기갑군단의 돌파속도보다 더 빠른 것이었다.
  
  세계사를 바꾼 간편성의 전략사상
  
  당시 유럽의 騎馬전법은 중무장이었을 뿐 아니라 步兵과 연계된 조직이었다. 성격이 다른 이런 두 조직을 지휘하는 것은 기병 單一 조직보다도 복잡하다. 인간이든 조직이든 복잡하면 기동성이 떨어지게 돼 있다. 기자가 헝가리에 가서 확인 한 바에 따르면 중세 유럽 기사들의 갑옷 무게는 약40kg이었고 말에 덮어씌운 甲胄까지 보태면 1백kg을 넘었다. 이런 말은 넘어지면 혼자서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영화에선 근사하게 보이지만 이런 로보캅 같은 중무장은 결국 죽기 싫다는 방어적인 심리를 반영한다. 이는 복잡한 규정을 많이 만들어 철갑처럼 자신을 둘러싸고는 무사안일을 추구하는 관료조직에 비유할 수 있다. 유럽 기사들은 창과 칼을 主무기로 썼다.
  
  그들은 활이 비겁한 무기라 하여 법으로 금지시키기도 했고 하층민의 무기로 제한했다. 세종대왕이 野人들에 대한 간첩작전을 지시하니까 '오랑캐를 상대로 어찌 속임수를 쓸 수 있겠습니까'하고 들고 일어났던 주자학 선비들의 僞善을 연상시킨다. 도덕을 아무데나 갖다대면 결과는 가끔 非도덕으로 나타난다.
  중무장한 유럽기사들에 대하여 몽골기만군단의 고전적 전법은 200∼300m 쯤의 거리를 두고 활로써 집중사격을 하여 혼란에 빠뜨린 다음 돌격하여 요절을 내는 것이었다. 몽골 군단은 또 퇴각을 위장하여 유럽기병들을 유도, 분산시킨 다음 삽시간에 재집결하여 분산된 적을 각개 격파하는 戰法도 즐겼다. 이것은 기동성에서 앞섰기 때문에 가능했다. 리델 하트는 몽골군단의 全員기병제를 참고하여 영국도 보병에서 독립된 순수한 기갑군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이 책을 통해서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 것은 히틀러의 장군들이었다. 독일 기갑군단의 아버지로 불리는 구데리안은 '나는 리델 하트의 제자다'고 말한 적이 있다. 프랑스의 드골 대령도 독립기갑군단의 창설을 주장했던 사람이다. 2차 세계 대전의 초장에서 독일이 전격전으로써 連戰連勝한 것은 탱크들을 보병사단에 분산시켜 놓지 않고 단일한 기갑군단 조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편 손가락이 아닌 불끈 쥔 주먹을 만들었다는 얘기이다. 이 발상의 근본이 간편성(Simplicity)인 것이다. 리델 하트에 따르면 기동성은 간편성에서 나오고 機動性은 중무장보다도 더 안전한 방법이란 것이다. 즉, 빠르면 산다는 뜻이다.
  
  간편성은 자신감에서
  
  놀랍게도 미국의 가장 성공한 최고경영자 GE의 전 회장 잭 웰치가 몽골 기마군단의 성공 원리와 꼭 같은 내용을 경영의 원리로 삼고 있었다. 그는 GE의 회장일 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신속하려면 (조직이나 경영지침이) 간편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複문장의 脚注가 붙은 경영지침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간편하지 않으면 빨라질 수 없고 빨라지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엔지니어에게 간편성이란 간결하면서도 기능이 우수한 디자인을 뜻합니다. 영업인들에게는 이 간편성의 원칙이 투명한 거래를 의미합니다. 생산현장에서는 모든 작업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상식적인 작업과정을,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쉽게 말하고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또 '자신 없는 경영자들일수록 복잡한 것을 만들어낸다'면서 '겁이 많고 불안한 관리자들은 두꺼운 계획서와 슬라이드가 있어야 안심을 하는데 그 내용은 하나마나한 것들뿐이다'고 했다. 잭 웰치는 그러면서 '신속성(Speed)은 간편성(Simplicity)에서 우러나오지만 이 간편성은 자신감(Self-Confidence)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런 자신감은 관료주의의 충복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다. 직위가 아니라 진정한 성취에서 보람을 찾으려 하는 사람, 정보를 공유하고 자신의 주변, 上下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사람, 그런 다음 대담하게 행동하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조직과 인간관계의) 간편성을 창조하는 자신있는 사람들이다.'
  
  몽골인종의 오기
  
  그러면 웰치는 이런 성공의 3S 조건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직경영에 적용하는가.
  <능력의 한계를 벗어날 정도로 과중한 업무를 맡은 경영진은 가장 능률적이다. 자질구레한 데 신경 쓰고 참견하여 부하들을 귀찮게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사무실 근무자는 현장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현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보고는 사무실에서 현장으로 향해야지 거꾸로가 돼서는 안된다. 우리는 옛날에는 몇년 걸리던 투자결정을 이제는 며칠만에 해치우고 있다.>
  
  자신감(Self-Confidence)-간편성(Simplicity)-신속성(Speed)의 3S 공식에서 몽골인종과 자신감의 문제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기자가 하바드 옌칭 도서관의 어두침침한 書庫에서 찾아낸 '위험한 변경(The Perilous Frontier)'이 그 해답을 안고 있었다. 북방 유목민족 전문학자 토마스 J.바필드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기마유목민족들은 가장 발달된 정착문명인 중국과 인접하여 살면서도 중화적 문화와 이념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속으로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경멸했다. 돔의 천장 같은 광활한 하늘 아래에서 말젖과 말고기를 먹으면서 천막에서 나고 죽고 전쟁과 모험을 동경하는 자신들의 삶이 농경민족보다도 더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목축생활이 유지될 수 있었고 이에 기초한 기만군단의 우세도 계속될 수 있었다.>
  
  高麗史에는 몽골장군 흔도가 고려 장군 金方慶에게 한 이런 말이 실려 있다.
  <내가 보건대 고려 사람들은 모두 글도 알고 불교를 믿는 것이 漢族과 유사한데 매양 우리를 멸시하면서 '몽골 사람들은 살륙만 일삼으니 하늘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다'라고들 한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에게 살륙하는 풍속을 준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뜻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에 불과하니 하늘은 그것을 죄로 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몽골 사람들에게 굴복하게 된 까닭이다.>
  
  먹물 먹은 사람들에 대한 武士들의 경멸과 '우리식'에 대한 자부심을 담고 있는 흔도의 이 오기서린 一喝(일갈)은 몽골기마군단의 파괴력이 자라난 정신적 토양을 보여주고 있다.
  
  간편성이 선진국의 브랜드
  
  기자는 해외 여행을 여러 번 한 뒤에 이런 원리를 발견했다. '선진국은 제도와 사람이 간편한 곳이다'는 원리가 그것이다. 예컨대 선진국 사람들은 넥타이를 안 매는 경우가 많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여행했을 때 종일 돌아다녀도 넥타이 맨 사람을 세 사람 보았을 뿐이다. 이 나라는 국왕도 공식석상에 나와 넥타이를 풀어버린다고 한다. 제도가 간편하고 사람들이 소박하면 살기가 편리한 것이다. 허례허식과 후진국이 친하고 편리함은 선진국의 브랜드이다. 
    
  효율성의 핵심되는 단어는 간편성일 것이다. 이 복잡한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간편하게 살 것인가. 간편해지려면 일과표의 많은 부분을 잘라내야 하므로 이것은 결단이다. 冠婚喪祭의 문제, 소비성향, 인간관계, 복장, 話法, 예절,회의, 업무처리 방식 등등 많은 부분에서 무엇을 줄이고 없애야 기자 본연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도로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하루에 해야 하는 일들의 가지수를 줄이는 대신에 좁은 주제를 붙들고 깊게 파고들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것인가. 당당한 정신을 가지고 간편하게 살면서 기민하게 일하는 3S型 인간! 하나의 話頭로서 던져보았다.
  
  
  주체세력
  
  징기스칸은 서양학자들에 의하여 학살자로 불리다가 요사이는 세계제국을 만들어 세계사를 연 사람이란 평을 듣는다. 몽골을 통일한 뒤 50년 동안 그와 자손들이 정복하여 세운 몽골제국의 영역은 고려, 중국, 중앙 아시아, 이란, 이라크, 러시아, 인도 북북에 걸쳤다. 약3000만 평방킬로미터로서 지금 중국의 세 배 규모였다. 유교, 불교, 이슬람, 기독교 문명권을 다 포괄했다. 비로소 서양과 동양이 하나의 역사 단위로서 통합된 것이다. 징기스칸과 후손들은 유럽에서 고려까지의 유라시아 지역에 평화와 질서를 가져왔다. 팍스 몽골리카의 시대였다. 평화와 질서 속에서 동서양의 교류와 무역이 꽃피었다.
  몽골은 전쟁은 무자비하게 했지만 통치는 너그럽게 했다. 그들은 종교나 언어의 차별을 금지했다. 피정복지 사람들은 세금을 잘 내고 반란만 일으키지 않으면 많은 자율권을 누릴 수 있었다.
  인류역사상 가장 생산성이 높았던 징기스칸의 세계 정복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조직 운영 시스템의 각도에서 더 연구해보기로 하자.
  
  징기스칸은 몽골을 통일한 뒤 수많은 부족들의 집단적 이기주의를 누르고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을 만들기 위하여 친위대를 조직하였다. '케식'이라 불린 이 친위대는 약 1만명의 장병들로 구성되었다. 친위대원은 몽골의 모든 부족을 다 망라하였고 특히 부족장이나 귀족 아들들 중에서 많이 뽑았다. 부족의 利害관계에 종속되지 않고 오로지 징기스칸과 국가를 위해서만 충성하는 정예 부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징기스칸은 귀족들의 아들들을 이 부대로 끌어들임으로서 부족장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일종의 인질로 삼았다. 친위대는 통일과 정복 시대의 지도세력을 배출했다.
  

 이는 통일신라의 화랑도와 같은 조직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몽골 군대는 이 1만명의 친위 사단 출신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일종의 몽골판 '하나회'가 된 것이다. 민주 국가에서는 군대 내의 사조직이 逆機能을 하지만 '힘이 곧 正義'이던 시절의 하나회는 정권을 안정시키고 권력을 지도자로 모이게 하여 전쟁 지휘에 일사불란하게 만드는 중심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징기스칸은 이 친위대를 하나의 손잡이로 삼아 20만명의 몽골 기마 군단을 아주 간편하게 부릴 수 있었다. 큰 톱니나무를 돌리려면 작은 톱니바퀴가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어야 하듯 친위 그룹은 지도자와 多衆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작은 톱니바퀴인 것이다.
  
  동원력
  
  징기스칸이 친위대를 주체 세력으로 하여 몽골을 통합했다는 것은 국가 동원력이 증강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인구 100만명이 20만명의 기마군단을 편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는 인구 4800만명의 한국에서 1000만명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징기스칸은 군대와 사회를 밀접하게 연결하는 편성을 했다. 분대(10명)와 소대(1백명)는 부족 단위로 조직되었다. 그들은 친족이자 戰友이기도 했다. 그 대신 연대(1천명)와 사단(1만명)은 반드시 각기 다른 부족 출신의 분대와 소대들로 복합 구성이 되도록 했다. 부족적 분열성을 군대를 통해 융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런 부대는 同苦同樂하는 집단이 되어 전우애를 바탕으로 전투력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同苦同樂
  
  몽골이 통일된 뒤 반포되었던 일종의 율법인 '야사'에는 '징기스칸께서는 다른 사람이 있는 데서 혼자 음식을 먹는 것을 금하셨다. 먹으려면 다른 사람과 같이 먹어야 한다. 또 전우보다도 많이 먹는 것을 금지한다'고 적혀 있다. 이들의 軍律은 엄했다. 보초를 서다 잠이 든 두 기병이 붙잡혀 왔는데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고 처형되는 것을 본 한 페르시아인이 놀랐다. 몽골 지휘관은 '너희들은 그런 경우에 거짓말을 한다. 우리 몽골인은 1000명의 목숨이 달려 있다고 해도 거짓말을 할 바에야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고 일갈했다.
  
  敵에서 배운다.
  
  몽골 기마 군단은 草原에서는 잘 싸웠지만 농경 민족군대가 성문을 닫고 지구전을 시작하면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당황하는 것이었다. 북방 유목 민족 군대는 중국을 칠 때 항상 큰 성의 주변만 노략질하다가 돌아가곤 했다. 징기스칸도 북중국의 금나라와 서하(西夏)를 공격할 대 애를 먹었다. 그는 금나라로부터 기술자들을 잡아가서는 공성(攻城) 무기를 개발하여 이슬람권을 칠 때부터 써먹기 시작했다. 징기스칸 군대가 이란에 있던 니샤푸르라는 도시를 공격할 때 동원한 무기 목록을 보면 굉장하다.
  창을 쏘는 기계 3000, 노포(弩砲) 즉 화살을 쏘는 일종의 대포 300, 석유에 불을 붙여 던지는 장치 700, 사닥다리 4000, 돌을 던지는 장치 2500개로 되어 있다.
  
  이런 장비를 갖춘 몽골군단은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포병 공병 기갑 보병의 복합 편성이었다. 몽골 기마 군단이 기병 전술에만 의존했더라면 중앙아시아나 중국의 성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의식화
  
  징기스칸과 몽골인들은 샤머니즘적 세계관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세계를 정복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확신했다. 기독교 신도들이 이 세상을 악의 구렁텅이로부터 구원하라는 사명을 받았다고 믿은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몽골에 저항하는 세력은 惡이며 이들을 학살하는 것은 善이 된다. 징기스칸이 반포한 '야사'는 징기스칸의 지배적 위치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를 모두 역적으로 규정했다. 전쟁에서는 도덕적 명분이 큰 전투력이다.
  
  몽골은 여러 나라들 중 한 나라가 아니고 모든 나라 위에 군림하는 세계 제국이었다. 야사는 다른 나라에 서신이나 使者를 보낼 때에는 몽골 군대의 위세를 자랑하여 협박하지 말고 이렇게만 쓰도록 하라고 문틀을 아예 정해놓았다.
  <당신네들이 순순히 복속하고 나오면 좋은 대우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만약 저항한다면 영원한 하나님께서는 당신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계신다.>
  종교적 사명감과 도덕적 우월감을 가진 군대는 강력하다. 전쟁에 대한 자기 정당성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敵의 사령탑을 마비시켜라
  
  몽골 군대는 적의 지휘부를 끝까지 추격하여 말살하는 것을 정책으로 삼았다. 징기스칸은 호레즘 황제를 추격하기 위해 맹장 체베를 장수로 삼아 2만명의 별동대를 파견하였다. 이 逮捕組는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를 무대로 약 2만㎞의 추격전을 전개하였다. 호레즘 황제(술탄)는 카스피해 섬에 숨어 들어가서 죽었다. 몽골군이 1241년 유럽을 쳐들어갔을 때는 헝가리의 벨라 왕이 패전한 뒤 지금의 크로아티아(구 유고연방)로 도망가자 몽골군이 기나긴 추격적을 벌였다. 벨라왕은 아드리아해의 섬으로 도피하였다. 몽골 추격대가 오고데이 황제의 사망으로 회군하는 바람에 그와 유럽이 살았다. 몽골 군대는 승전의 지름길은 지휘부를 마비시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창조성
  
  몽골 군대의 戰法은 그때까지 문명 국가에서 통용되던 보병 중심의 일차원적 전법을, 기병 포병 보병을 배합한 입체적 전술로 발전시킨 혁명적인 것이었다. 여기에다가 스파이망(網)에 의한 정보 수집, 몽골 군대가 가기 전에 敵地에 공포를 먼저 확산시키는 심리전, 연막을 이용한 교란 작전, 위장과 매복, 회피와 반격의 되풀이, 포로를 화살받이로 이용하기 등등.
  이런 기상 천외하고 변화무쌍한 창조적 발상이 가능했던 것은 야수와 같은 몽골인들이 어떤 이념의 포로가 되지 않고 오로지 '전쟁은 이기기 위하여 하는 것'이란 실용정신에 충실하였던 덕분이다. 
  
  유럽 기사단의 도덕주의
  
  반면에 유럽 기사들은 전쟁에 기독교적 명분론을 개입시켰다. 전쟁도 스포츠처럼 당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매복·회피·우회 전술은 비겁한 것으로 매도당하였다. 영국을 제외하고는 많은 나라에서 활은 멀리서 상대를 쏘아 쓰러뜨리는 비겁한 무기라 하여 배척당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 기사들은 '로보캅'같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나왔다. 말에게도 甲胄를 뒤집어 씌웠다. 이런 방어적, 패배적, 위선적 전쟁 개념은 자기들끼리의 싸움에서는 통했지만 '전쟁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야수 같은 몽골군의 공격적, 창조적, 실용적 전략 앞에서는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傭兵의 한계
  
  이슬람 군대는 8세기 중반 고려인 高仙芝가 이끄는 唐軍을 중앙아시아의 탈라스 강변에서 격파한 다음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잡았다. 그 이후 이슬람 군대는 지하드(聖戰) 의식으로 무장하여 기독교 문명권을 위협하고 스페인을 수백년간 지배하였다. 징기스칸 시대에 들어와서는 이슬람 세계도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었다. 호레즘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몽골족과는 인종적으로 가까운 투르크족을 傭兵으로 쓰고 있었다. 투르크족은 문화적으로 친근한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집단적으로 투항해버렸다.
  징기스칸 원정 군대는 그 뒤 몽골·투르크 혼성 부대로 변질된다. 장교단은 물론 몽골족이었으나 병사들 중에서는 투르크족이 더 많아 전체 인원수에서는 몽골족이 소수였다.
  
  징기스칸은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은 敵을 추격해 쓰러뜨리고 그들 소유물을 독차지하여 그 여자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것이야. 그들의 말을 빼앗아 타고다니고 그 여자들의 몸을 침대와 베개 삼아 노는 것, 이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일세.'
  
  나는 야만인이다
  
  징기스칸을 생전에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에 다르면 그는 키가 크고 몸집이 탄탄하게 생겼으며 눈은 고양이 눈이고 老年에도 흰 머리가 없었으며 性慾이 대단했다고 한다. 몽골 기마 군단의 말발굽에 짓밟힌 농경 및 도시 문명권의 사람들에게는 악마 같았던 징기스칸이지만 그는 부하들을 골육지정으로 사랑한 사람이었다. 부하들은 이렇게 평했다.
  <그는 자신의 옷으로 부하들을 입히고 자신의 말에 부하들을 태운다.>
  징기스칸은 아주 검소한 생활을 한 사람이다. 징기스칸은 말년에 도교에 호기심을 가졌다. 그래서 중국 금나라의 장춘진인(長春眞人)이란 道人을 중앙아시아의 軍營으로 초청하여 말씀을 듣기도 했다. 징기스칸은 귀국길의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하느님께서는 중국의 오만과 사치에 싫증이 났습니다. 나는 북방의 야만인입니다. 나는 소와 말을 치는 사람과 같이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습니다. 우리는 독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노획물을 나눕니다. 나는 우리나라를 마치 갓난 아기처럼 보살피고 나의 병사들을 형제처럼 대합니다.>
  
  野性이 부른다
  
  敵에게는 무자비하고 부하들에게는 너그럽다. 이 단순 명쾌한 彼我 구분이 징기스칸 리더십의 핵심이고 전장과 시장에서 통용되는 불멸의 승리 제1조인 것이다.
  몽골인들은 목축과 수렵을 통해서 동물의 생리를 잘 파악한 민족이었다. 몽골인들의 視力은 평균 4.0 이상이고 수십리 밖에서 짓는 밥의 증기를 냄새 맡을 수 있다. 날씨의 변화를 기가 막히게 感知할 수 있었고 추위와 더위를 견디는 데에 초인적이었다. 몽골인들은 체력과 생리뿐 아니라 사고방식도 동물화되어 있었다.
  그들은 권력 투쟁이나 전쟁에도 이 동물 세계 법칙을 적용하려고 했다. 弱肉强食, 適者生存의 무한 경쟁이 자연의 법칙이고 이것이 바로 野性의 본질인 것이다. 이런 야성을 소유한 사람이 투쟁에서 강한 것은 승부에 철저한, 정직한 정신 자세 때문인 것이다.
  
  몽골인들의 이 체력과 정신력은 수많은 전쟁을 통해서 프로로 단련되고 조직이란 그릇에 담기면서 엄청난 폭발력을 비축하게 되었다. 야성의 본질은 경쟁과 자연스러움이다. 인공적 환경에서 살다보면 이 야성을 잃게 된다. 검소한 생활 태도가 중요한 것은 인간을 人工에서 벗어나게 하여 투지 직관력 본능 등 야성을 되찾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등산, 낚시, 골프 등을 통해서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도 野性의 회복을 위한 본능의 부름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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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魔王, 漢武帝와 징기스칸(1998년 글)

 아시아 역사에는 두 魔王(마왕)이 있었다. 漢武帝(한무제)와 징기스칸. 한무제는 중국농경정착문명의 생산성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제국을 건설했고, 징기스칸은 몽골 유목기마문명의 기동성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대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엄청난 파괴와 인명희생에 대해서 두 魔王은 눈도 깜짝 하지 않았다. 악마적 파괴와 살육, 賢君(현군)의 건설과 관용, 이 두 가지 얼굴을 공유하는 것이 마왕이기에 이들은 통상적인 윤리와 평가를 뛰어넘어서 세계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사람으로 우뚝 서있는 것이다. 
   
18세에 즉위하여 서기 전 140년에서 87년까지 53년간 황제 자리에 있었던 漢武帝는 북방초원의 흉노제국에 처음으로 결정적 타격을 안겨주었다. 그 1300여년 뒤에 등장한 징기스칸은 흉노의 계통을 잇는 초원의 제국을 건설하고 손자대에 가서 북방 유목민족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全土를 지배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武帝는 진시황과 한고조의 형식적 통일을 계승하여 내부적 통합을 완성함으로써 그 뒤 2000년간 계속될 국가체제의 모델을 만들었다. 武帝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확정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老壯(노장)사상, 法家 사상, 유학이 각각 국가경영의 방략으로서 각축하고 있었다.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학을 官學(관학)으로 선택하였다. 유교만이 夏(하) 殷(은) 周(주)에서 현세에 이르는 중국의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논리체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유교만이 중국이란 무엇이며 중국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중국과 중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줄 수 있는 논리는 유교만이 갖고 있었던 것이다. 
   
징기스칸도 몽골을 통일한 뒤에 '야사'라는 법률을 만들어서 無道- 無法천지의 草原에 질서를 가져왔다. 그는 위구르 포로를 시켜서 위구르 문자를 참고로 하여 몽골문자를 만들게 했다. 징기스칸의 이 두 발명 - 법률과 문자는 그 뒤 몽골인들이 정체성을 갖고 민족과 나라를 유지하도록 한 기본틀이 되었다. 징기스칸 자신은 문맹자였지만 몽골민족엔 세종대왕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漢武帝와 징기스칸은 위대한 시스팀 구축자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漢高祖(한고조)는 흉노를 토벌하러 갔다가 포로가 될 뻔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 前漢의 황제들은 흉노와 정면대립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武帝 시절에 이르러 그 동안 축적된 國富(국부)가 모험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조정의 재정에 여유가 생기고 창고에는 해묵은 쌀이 넘치며 동전이 쌓여 녹쓸고 있었다. 경제관료들은 이처럼 재물이 死藏(사장)되면 경제가 불황에 빠지게 될까 걱정했다. 이런 때 전쟁을 일으키면 돈과 물자가 유통되고 이것이 고용을 창출하여 다시 생산을 증대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武帝는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수십만의 부대를 편성할 수 있었다. 투항해온 흉노병을 선봉으로 삼았다. 內地에서 말을 길러 대부대의 기병을 양성하였다. 무제가 물량으로 밀어붙이니 흉노는 흩어져서 게릴라전으로 대항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제는 흉노와의 전쟁에서 20대 젊은 지휘관을 썼다. 황후의 동생 위청, 황후의 언니의 아들 곽거병, 무제가 총애하는 李부인의 오빠 이광리가 지휘부를 구성했다. 통계상 젊은 장군과 나이 많은 장군이 대결하면 젊은 편이 이긴다는 것 이 동서양 戰史(전사)의 공통점이다. 
   
무제는 지금 몽골지방에 근거지를 둔 흉노를 협공하기 위하여 지금 중앙아시아 지방의 나라들과 손을 잡으려고 했다. 장건이란 사람을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으로 파견하여 외교교섭을 벌이게 했다. 장건은 13년 만에 귀국하여 西域(서역:지금의 신강성과 중앙아시아지역)에 관한 견문보고를 했다. 
   
武帝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의 페르가나 지방에서 나온다는 駿馬(준마) 이야기에 특히 호기심이 동했다. 무제는 西域과의 통상을 장려하기로 결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흉노를 北으로 밀어 올리고 西域의 도시국가들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무역로의 안전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武帝의 서역경영이 시작되고 실크로드라는 동서 무역로가 개통되는 것이다. 
   
징기스칸도 전쟁과 경제를 잘 결합시킨 사람이다. 그는 몽골을 통일한 이후 그의 주위에 몰려든 戰士들에게 나누어줄 약탈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남쪽의 金나라, 서쪽의 이슬람 문명권 국가들이 그의 사정권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약탈물을 얻기 위해 시작한 정복전쟁은 너무나 성공적이 되어 징기스칸은 동서양에 걸친 大제국을 건설함으로써 경제통합과 팍스 몽골리카를 이룩했다. 
   
징기스칸은 하느님을 모시는 샤머니즘의 신봉자였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의 모든 세계'를 정복하라는 사명을 받았다고 확신했다. 이런 사명감이 경제적 實益(실익)과 한 덩어리가 되면서 (마치 청교도정신과 자본주의의 윤리가 통합되었듯이) 그의 정복욕에 거대한 추진력을 부여하였다. 
   
漢武帝는 북방의 흉노뿐 아니라 남쪽의 월남을 정복하고 동쪽으로 는 한반도까지 진출, 漢四郡(한사군)을 설치함으로써 중국의 판도를 당시의 세계제국 로마 이상으로 넓히고 중국문명을 동서남북으로 확산시켰다. 서양의 로마와 동양의 漢은 인류문명의 저수지가 되었다. 
   
징기스칸은 북방유목민족문화에서는 금기가 되어 있었던 권력의 세습을 성공시켰다. 武帝는 죽음이 다가오자 아들(소제)에게 帝位를 넘기기 전에 生母를 죽여서 아들의 妻族(처족)들이 발호하는 것을 차단하여 주는 惡役(악역)을 자임했다. 권력과 제국, 두 魔王에게 있어서는 이 두 단어만이 正義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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