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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탐방및 인물

조선 당쟁의 본질-고12회 정소성(소설가,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작성자睦園 박이환|작성시간16.04.13|조회수69 목록 댓글 0

조선 당쟁의 본질

 

정소성(소설가,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조선당쟁의 본질은 그것이 단순한 개인간의 권력투쟁이 아니라, 파당을 지어 대를 이어가며 권력을 잡기 위해 싸운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조선의 벼슬아치들은 본질적으로 선비 출신으로 그들의 생활기반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토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이 토지는 비단 한양 인근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퍼져 있어서 중앙정계에 진출한 선비가 권력투쟁에 져서 벼슬을 잃어버려도 귀향하여 다음의 권력투쟁을 준비할 수 있는 힘이 비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는 그가 중앙에서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그의 혈족들이 그 토지를 중심으로 뭉쳐서 힘을 비축하고 서원을 세워서 자손들을 가르쳐서 다음 과거에 대비하고, 아울러 자신들의 부를 축척하여 힘을 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벼슬아치들은 결코 자신의 학맥과 무관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조선의 당쟁은 당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대를 이어서 계속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당파가 틀리면 서로 내왕을 하지 않았고, 혼인조차 하지 않았다.

 

농장과 족당적인 기반 위에 학문적인 인연으로써 뭉친 집단이 바로 붕당이며 이들이 곧바로 정권 획득을 위해 싸웠던 것이다. 이것이 조선의 당쟁이다.

 

그러나 조선의 당쟁이 이런 특징만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다.

 

아울러 조선 당쟁의 다른 큰 특징의 하나가 왕실 외척을 중심으로 한 내부 갈등에 이들 벼슬아치들의 붕당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반정을 하여 왕을 몰아내지 않는 한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왕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벼슬을 차지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이 길을 찾기 위해 혼자의 힘으로는 안되기 때문에 붕당을 지어서 대를 이어가며 투쟁하는 것이 당쟁이라고 보면 된다.

 

성종 때까지는 그래도 이들 붕당들의 노골적인 대립은 노정되지 않았다. 연산군 시대에 야기되기 시작한 벼슬아치들의 싸움을 당쟁이라고 보지 않고, 사화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있다. 성종이 명군으로서의 역량을 한껏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존재하고 있었을 뿐이다.

 

연산군 시대부터 당쟁의 싹은 움트기 시작했다.

 

선조 초년에 벼슬아치 추천권을 가지고 있는 이조전랑을 둘러싸고 벌어진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이 조선 당쟁의 시발이다.

 

이조전랑은, 정랑(5)과 좌랑(6)을 아울러 가리키는 말로, 벼슬아치 추천과 심사에 전권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전랑이라고 부른다.

 

조선의 벼슬아치의 임명은 삼공 육경도 관여하지 못하고, 삼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도 간여하지 못했다. 이조 정랑과 좌랑이 주로 관여하였다. 그리고 이 자리는 누가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임자가 후임자를 스스로 추천하는 자천권이 인정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했다. 이 자리를 두고 붕당들이 싸움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김효원은 이조정랑으로 추천되었으나 당시 이조참의 심의겸이 이 자가 권신에게 아부하는 자라고 반대하였다.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효원은 이조정랑에 임명되었다. 김효원이 임기만료되어 자리를 떠나면서 후임으로 이조참의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여러사람들의 후보군에 올랐다. 조정의 중론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임 정랑의 후임 자천권이 있다고 하지만 조정 전체의 중론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 이 자천권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김효원은 심충겸을 반대하였다.

 

그래서 여기서 김효원과 심의겸은 극단적으로 대립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조정의 거의 모든 벼슬아치들이 김효원 지지파와 심의겸 지지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즉 동 서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김효원의 집이 동대문 근처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이 서대문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인에는 이황 파와 조식 파가 있었고, 서인에는 이이 파와 성혼 파가 있었다.

 

이들은 임진왜란 중에도 서로들 물고 싸웠다. 이순신 장군의 통제사 파면도 이들 당파들의 싸움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남인인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왜란 당시 조정은 정인홍 등 북인이 광해군을 중심으로 뭉쳐 주류로서 정권을 잡고 있었다.

 

서인 정철의 소위 말하는 건저의사건은 당쟁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즉 정철이 선조의 후계자 즉 세자를 빨리 세워야 한다는 건의를 한 것이다. 당시 선조는 왕후에게서 난 정통의 원자가 없었고 후궁들과의 사이에 난 아들들만 있었기에 세자를 책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말을 왕 앞에서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좌의정 정철은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류성룡과 함께 어전에 나가서 건의하자고 뜻을 모았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동인과 서인들의 감정의 골이 깊어 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기축옥사로 동인 정여립의 모반사건 시 좌의정 정철의 주장으로 동인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동인 정여립 일당과 관련된 동인들은 능지처참 되었고, 삼족이 멸해졌었다. 이 사건 이후 호남은 반역향이라 하여 조선 조성에서 자취를 감추는 계기가 되었다.

 

기축옥사 때문에 감정의 골이 깊어진 동인들은 정철의 건저의사건을 당쟁적 정략으로 이용하여 기축옥사의 원한을 갚았다.

 

즉 사전약속에도 불구하고 이산해는 세자책봉의 건의의 어전회의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오히려 선조의 총비이던 김빈의 오빠 김공량을 꼬득여, 정철이 세자 책봉을 건저의하여 김빈의 아들을 죽이려 한다고 모함했던 것이다. 김빈은 침실에 든 선조에게 읍소하여 선조는 대노하게 되었고, 정철을 귀양보내고 서인들을 일망타진하였다.

 

정철에 어느 정도 죄를 주느냐로 동인들은 갈라지게 되었다. 온건파가 남인이 되었고, 강경파가 북인이 되었다. 이들은 학파와 연결되어 있는데 남인은 퇴계 이황의 문인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북인은 남명 조식의 문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 영남 유자들은 두 개의 거봉을 중심으로 갈라져 있었다. 퇴계와 남명이었다. 퇴계는 워낙 유명하였으나, 남명 역시 퇴계에 못지 않는 유명세를 가지고 있었다. 남명은 과거를 보지 않았으나 이언적과 류성룡의 천거로 몇 차례 선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물리쳤으며, 일생 두류산에 웅거하면서 독서와 사색 그리고 교육으로 일관하였다. 그의 고결한 학행은 많은 남부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사후 선조에 의해 대사간으로 추증되었고, 광해군은 그를 영의정으로 추증하였으며, 시호 문정공을 내렸고, 남명서원을 지어 그를 제향하게 하였다.

 

그러나 남명 조식을 추종하는 북인들은 다시금 대북과 소복으로 분열된다.

 

그 계기는 선조 32년 북인 홍여순이 대사간이 되려고 할 때, 같은 북인인 남이공이 반대하였다. 그래서 홍여순 지지파를 대북파, 남이공 지지파를 소북파라고 한다.

 

소북파에서 영의정 유영경이 나와 선조 말년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다가 소북은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있던 광해군을 패하고, 선조의 뜻대로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려는 기도를 하다가 좌절되어 힘을 잃었다. 영창대군 옹립의 죄를 대북파의 정인홍에게 떠 넘겨 다행히 몰락을 면했지만, 전성기를 넘기고 말았다. 소북파는 다시금 청소북과 탁소북으로 갈라진다. 청소북은 남이공을 중심으로 모인 정파였고, 유영경을 중심으로 모인 파를 탁소북이라고 하였다.

 

남인 북인, 다시 소북 대북으로 갈라진 동인에게서 정권이 서인으로 넘어온 결정적인 계기는 인조반정이었다. 선조 시대를 동인의 시대라고 한다면, 인조시대를 서인의 시대라고 할만하다.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 그 중에서도 대북파의 이이첨 정인홍 등이 광해군을 옹위하고 세력을 떨치고 있을 때였다. 정권 탈취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서인들은 광해군의 인목대비유폐사건을 좋은 기회로 삼고 아버지 선조의 후비를 유폐시킨 폐륜적인 제왕이라는 허물을 내세워 무력으로 왕을 바꾸려고 쿠데타를 일으켜 어렵게 성공하였다. 이것이 인조반정이다.정변을 일으켰던 서인 이귀, 김유, 김자점, 이괄 등이 주도 세력이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이들은 대북파의 이이첨, 정인홍, 이위경 등을 참형에 처하고 200 여명을 귀양보냈다.

 

이들은 이귀, 김유 등 33인을 3등급으로 나누어 훈호를 주었고, 그것에 따라 벼슬을 나누었다. 그러나 이것이 공평하지 않다하여 말썽이 났는데, 1년 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서인들은 집권하면서, 자기와 똑같은 신세로 대북파에 의해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남인에게도 자리를 양보하여 태종의 후손으로 유생들의 존경을 받던 남인 이원익을 영상으로 세웠다.

 

이원익은 이이와 이황으로부터도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서인들의 집권 하에서 영상이 되어, 인조반정의 공신들과 인목대비가 한결같이 패주 광해군을 죽일 것을 주장하였으나 영의정 이원익의 적극적인 옹호로 광해군은 참형을 면하고 귀양가게 됨으로써 목숨을 구했다.

 

서인들은 인조반정에 공이 있는 자를 훈서, 공이 없는 자를 청서라 하여 다시 분리 되어 싸웠다.

 

그러다가 산당(山堂)이라고 불리는 송시열이 등장하면서, 훈서와 청서는 전부 우암 송시열의 휘하로 통일 되었다.

 

이원익이 영상으로 서인정권에 입상 하였으나, 남인 전체가 정권을 획득하여 벼슬을 나누어가진 것은 아니었다. 남인은 여전히 정권에서 소외되어 있었고 그들은 재집권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674년 효종이 죽자 모후 조대비의 복상이 문제가 되었다. 즉 상복을 몇 년을 입어야 하는 가가 문제가 되었다. 서인 송시열은 기년설(일년)을 주장하였고, 남인 윤휴등은 3년설을 주장하였다. 왕인 현종에 의해 기년설이 채택됨에 따라 서인들은 정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종의 비가 죽었을 때, 역시 모후 조대비의 복상을 몇 년으로 해야하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서인은 대공설인 9개월을 주장하였고, 남인들은 기년설인 1년을 주장하였다. 아들인 숙종은 남인의 기년설을 채택하였다. 서인들이 서리를 맞은 것이다. 정권이 남인으로 넘어갔다.

 

이 때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어떻게 벌주느냐를 두고 남인들이 분리되었다. 대공설을 주장하여 왕실의 격을 떨어뜨린 송시열을 참형으로 처해야 한다는 청남과 관대하게 귀양 보내야 한다는 탁남으로 분리되었다.

 

청남의 대표적인 인사는 우의정 허목이었고, 탁남의 대표적인 인사는 영의정 허적이었다.

 

당시 조선사회를 지배하던 예학의 힘은 대단하여 정권을 교차할 수 있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조선은 원래가 성리학을 통치의 기본으로 하는 나라였고,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충과 효를 바탕으로 하기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의 근원적인 의식이 주자가례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당시 김장생같은 예학자들은 임금의 예에 대한 질문에도 노 할 수 있었다. 집권자인 인조가 자기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고자 김장생에게 질문한 결과 그는 노 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쟁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예학도 역시 당쟁에 이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집권한 남인들은 정치에 전횡함이 심해 숙종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예송논쟁에 이겨 정권을 잡았지만 숙종은 남인정권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당시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이었던 허적의 서자 허견이 왕실이던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과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서인 김석주, 김익훈등이 고발하였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남인은 일망타진되었다. 허견 본인은 물론 종실 3인과 허적 윤휴 등 남인의 거물들이 전부 참형에 처해졌다. 정권이 서인에게 넘어간 것이다.

 

서인 김수항이 영의정이 되었고, 고변자 김석주는 우의정이 되었다. 송시열은 영주추부사로 복위되었다. 이것이 경신대출척이다(숙종6).

 

그러나 서인도 분열했는데, 송시열을 영수로 받드는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이 그것이다.

 

숙종 경종 대는 유난스레 당쟁이 치열했다.

 

서인이 정권을 잡은 경신태출척(숙종 6, 1680)으로부터 시작하여,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은 기사환국(숙종 15,1689), 소론에게 다시 정권이 돌아간 갑술옥사(숙종20,1694), 경종 대로 넘어가 세제(영조)의 책봉문제를 둘러싸고 다투다가 결국 소론이 정권을 유지한 신임사화(경종 1, 1721)가 계속 이어졌다.

 

기사환국은 경신대출척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일망타진되는 정변이다.

 

숙종에게는 원자가 없었는데, 장희빈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다. 숙종은 이 아이를 원자로 삼고 장희빈을 왕후로 삼으려 하였으나 당시 집권파이던 송시열들은 왕후 민씨가 아직 젊으니 더 기다려보자고 하였다. 그러나 숙종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아들의 세자로서의 명호도 결정되었다. 계속 불가를 주장하는 송시열을 괘심하게 생각하던 차 남인 이현기 남치훈 이익수 윤빈 등이 송시열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숙종은 이들의 의견을 쫓아 송시열을 귀양보냈다가 사사하였다. 송시열을 따랐던 김수흥 김수항 형제가 귀양을 갔고, 남인 권대운, 김덕원,목내선, 여성제 등이 등용되었다. 기사환국에서 갑술옥사까지 5 년간 남인이 집권하였다.

 

갑술옥사는, 장희빈을 왕비로 등극시킨 공으로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들이, 장희빈에 혹해 민씨를 왕비에서 몰아낸 사실을 후회하고 있던 숙종의 심기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데서 야기된 정권의 교체였다. 야권에 속해 속을 태우고 있던 소론 김춘책 한중혁등은 숙종의 심기를 간파하고 민비 복위운동을 일으키고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당시 집권자들인 민암 등은 이들 복위운동파인 소론들을 붙잡아놓고 경을 치면서 일대 위압을 가했다.

 

이런 남인 집권파에 기분이 상한 숙종은 민암을 사사하고, 기사환국 때 벼슬을 받았던 김덕원 목내선 권대운 등을 귀양보냈다. 복위운동을 하였던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등을 등용하고, 기사환국 때 사사되었던 송시열과 김수항을 복권하고 작위를 내렸다.

 

신임사화는, 세제 연잉군(영조)의 옹립에 적극적이었던 노론 4대신(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을 소론이던 우의정 조태구,사간 유봉휘 등이 시기 상조론으로 맞서다가, 실패하자, 소론일파가 작당하여, 노론 4대신을 모반죄로 몰아 참형에 처하고, 소론이 집권한 정변을 말한다.

 

당시 소론이 동원한 정치공세는 승지 김일경으로 하여금 노론 4대신을 4원흉으로 몰아 실정과 부패를 고발함과 동시에, 묵호룡으로 하여금 4대신을 역모로 몰아 고발하는 것이었다. 이런 소론의 공격이 성공하여 묵호룡은 동성군의 작위까지 받았고, 소론이 집권하였다. 즉위한 영조는 소론을 전부 귀양보내고 노론에게 정권을 주고 탕평책을 써서 당쟁의 완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당쟁의 비참함을 실제로 겪었던 영조는 당쟁완화를 정책의 제일로 삼았다. 이것이 또한 영조 조의 가장 큰 변란이던 이인좌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이인좌는 소론으로 김일경 묵호룡의 사람이었다. 명제상 이준경의 후손이다. 자파의 몰락을 보고 거병하여 청주를 장악하고 북상하였으나 오명항의 관군에 사로잡혀 목이 베였다.

 

1768년 영조 30년에 야기된 사도세자 폐위 및 아사사건은 턍평책을 써서 당쟁의 완화에 노력하였던 영조에게는 가장 비극적인 당쟁이었다. 사도세자를 존경하고 받들던 정파는 주로 남인 계열이었다. 사도세자가 왕으로 등극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가 어려워질 것을 두려워한 노론은 사도세자를 음해하기 시작하였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게 되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인 남인 시파와 자신들의 정략적인 허위보고를 옹호하는 노론 벽파간의 싸움의 희생양이 된 사람이 사도세자였다.

 

사도세자의 아내이던 혜경궁홍씨는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었고, 삼촌이 좌의정 홍인한이었으나, 이들이 전부 노론으로 사도세자의 제거에 동정적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정조가 등극하자 자연히 아버지를 옹호하였던 시파를 가까이 하였다. 명제상 체제공도 시파였고 이들은 당시 시파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천주교신자들을 아주 노골적으로 탄압하지는 않았다. 방임상태였다. 그래서 한양일대에는 약 만명 이상의 천주고 신자가 생겼고 천주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생겨났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데려다가 조선에서 직접 세례를 주도록했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려서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대리청정으로 권력을 잡았다. 정순왕후 뒤에는 오라버니인 노론의 거두 김구주가 있었다. 그리고 사실상 정조의 집권시에도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 영조의 후비인 정순왕후 사이는 법률적으로는 모자간이지만 사이가 나빴다. 정순왕후는 조정을 서서이 노론으로 채우기 시작하여 노론의 영수 심환지를 영의정으로 앉혔다.

 

직접적으로 시파를 공경하지 않고 종교탄압을 통하여 시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시파를 신서파라 하였고, 벽파를 공서파라고 하였다. 서양종교를 공격한다는 뜻이다. 신서파와 공서파의 싸움은 일견 종교적인 갈등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남인과 노론의 싸움이었다.

 

일명 진산사건이라고 하는 당쟁은, 전라도 진산의 선비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여 주자가례에 의한 상례를 치르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고 하여, 무부무군(아비도 없고 왕도 없는 종교)이라고 하여 윤지충과 권상연을 참형에 처했다.

 

1801년에 야기된 신유사옥에서는 정순왕후를 배경으로 하는 공서파들(노론)의 신서파(남인)에 대한 공격이 노골화하였다. 이가환 권철신이 옥사하고,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등이 목이 베였고, 정약전 정약용 형제가 귀양을 갔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목도 베었다. 마침 터진 것이 유명한 황사영의 백서사건이었다. 교인 황사영이 중국에 주둔하고 있는 서양인들에게 군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조정에서는 황사영 백서 사건을 가지고 자신들이 주문모를 참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여 청국의 양해를 얻어냈다. 신유사옥 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이 300명을 넘었다.

 

조선 당쟁의 근원적인 이유는 백성의 복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세자책봉 문제나 복상문제로 그들은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렸던 것이다. 그들의 극한의 대립은 국력을 극단적으로 약화시켰고, 민생을 토탄에 빠뜨렸다. 그들은 백성들간의 협력과 상호존중의 정신을 말살시켰고, 혼인의 범위를 같은 파당 안으로 국한시킴으로서 우생학적으로도 민족에게 큰 죄악을 지었다. 이런 정치상황 아래서 문화민족으로서의 성장과 국력의 적극적인 신장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조선의 망국은 이 당쟁에서 근원적인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최근 대한민국의 정국을 보면, 언뜻 조선의 당쟁을 연상케하는 구석이 없지 않다. 집권당이 오만 어려움을 무릅쓰고 65세 이상 노인 70%에게 20 만원 상당의 노령연금을 지불한 것은 장하다. 세계 7대 무역대국으로 우뚝 선 조국이 대견스럽다. 최근에 유럽(스웨덴)에 나가 있는 한국대사관의 참사관으로 재직하고 있는 분을 만났는데, 한국을 완전히 선진국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격을 위한 공격이 아니라, 국민의 복리를 위한 공격을 하라. 그래야만 국민은 표를 준다.이번 총선에서 국민들의 의중을 알았을 것이다. 정권을 잡기 위한 두 혓바닥만의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 자신과 자파의 사리사욕을 위한 정치는 필패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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