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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른 사람의 의견으로 지면을 낭비하십니까?"

작성자睦園.박이환(고10회)|작성시간22.05.07|조회수13 목록 댓글 0

"왜 다른 사람의 의견으로 지면을 낭비하십니까?"

엄상익(변호사)

<글을 잘 쓰려면?>

중학교 이학년인 손녀와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할아버지 학교에서 수필 쓰기가 있어요.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나는 아버지에게 배운 게 있다. 그걸 손녀에게 전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내가 초등학교 사학년 봄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손을 잡고 소년한국일보에서 주최하는 제1회 어린이 글짓기대회에 데리고 갔다. 대회 시작 전에 아버지는 내게 가르쳤다. 절대 글을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마음을 쓰라고 했다. 나의 글이 입선이 되고 상장과 메달을 받았었다. 나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손녀에게 전한다.

“겸손하고 착한 마음이 정직하게 흘러나와야 한단다.”

세월이 흐르고 삼십대 중반쯤이었다. 우연히 알게 된 시사잡지 월간조선의 편집장이 수필 한 편을 써보라고 했다. 그 무렵 나는 건방졌다. 고시에도 합격했는데 수필 한 편이 뭐가 어려울까 싶었다. 공자님 말씀을 인용하고 세상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글을 써서 잡지사로 가지고 갔다. 내가 써 온 원고를 본 편집장이 나를 구석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필요한 건 자신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의견으로 지면을 낭비하십니까? 저희는 잡지의 귀중한 지면을 제공하는 겁니다. 이 원고는 잡지에 싣지 못하겠습니다.”

순간 나는 자존심이 상하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편집장은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언론인이었다. 글을 잘 쓰는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었다. 그의 표정에서 나는 거절보다는 선의와 성실성을 읽었다. 한풀 꺾인 내가 물었다.

“수필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단 다른 사람의 잘 쓴 글들을 몇천 편은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원고지가 자기 키 정도 쌓일 정도의 분량은 직접 써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날 저녁 나는 대형서점에 가서 그곳에 있는 수필집 몇십 권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필을 써보기 시작했다. 스승같은 말을 한 편집장의 말대로 연습을 하니까 글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신문과 잡지에서 원고청탁이 들어왔다. 사진과 함께 커다랗게 난 글을 보면 성취감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자 나는 왜 글을 쓰나하고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세상을 향해 외치는 나 자신은 공명심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상을 비방하고 공격하고 쾌감을 느끼는 나 자신이 거짓 개혁자였다. 질책은 악인의 마음을 더욱 완고하게 하고 부메랑이 되어 증오심으로 되돌아왔다. 스스로 선을 행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악을 들추어내는 나는 가짜 의인이었다.

민들레씨 같은 작은 글을 쓰기로 했다. 그게 나의 작은 그릇에 맞는 것 같았다. 시공간을 비슷하게 살아온 사람들중 몇 명과 위로와 기쁨을 나누면 될 것 같았다. 글을 통해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친구를 얻으면 될 것 같았다. 글을 쓰는 의미를 그렇게 바꾸었다.

어떤 글을 쓸까 생각해 봤다.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한 여러 책을 읽어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은 그가 죽은 지 천팔백 년 가까운 지금도 애독되고 있다. 번연의 ‘천로역정’은 그 속에 미문은 별로 없지만 출판된 지 오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독자들의 사랑이 옛날에 못지않다. 단테의 대 저작은 모형은 로마고전에서 땄지만 내용은 믿음이고 진리였다. 그 책들의 생명의 원천은 성경이었다. 성경 속의 언어와 구절들이 세계사상 속에 깊이 침투해 있어서 성경을 모르면 문학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떤 소설도 시도 어떤 정치론도 성경만큼 애독된 것은 없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 국민의 기본적 사상인 그 책을 애독했다. 비스마르크 재상도 그 책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성경은 왕궁에서도 엄숙하게 읽히고 나무꾼의 오막살이 안에서도 즐겨 읽혔다. 그런 성경은 무엇을 가르쳤을까. 성경은 특별히 겸손을 가르쳤다. 사람들 마음 속에 욕심과 우월감을 가지지 못하게 했다. 성경을 읽으면서 남의 단점만을 보고 그 장점에 대해서는 무감각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경은 큰소리로 외치지 않고서도 정의를 실천하게 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내용은 봄의 햇살이다. 그것이 비치는 곳에 새 생명이 움튼다. 한 사람의 선인을 만들어내어 사회와 국가를 개조한다. 나는 나의 글의 심지를 성경으로 삼는다. 불경이나 고전의 진리로 보충하기도 한다. 한 가지 꽃이 아니라 여러 종류 색깔의 진리의 꽃들을 글로 묶으면 더 아름다운 꽃다발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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