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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에 가서 스탈린과 김일성을 비호했던 문재인!

작성자睦園.박이환(고10회)|작성시간22.06.28|조회수3 목록 댓글 0
유엔에 가서 스탈린과 김일성을 비호했던 문재인!
趙甲濟     


*2017년에 썼던 글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연설은 사실, 헌법, 상식에 반하는 점이 너무 많다.
  
  1. 헌법을 준수해야 할 대통령이 자신의 정부를 촛불혁명이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헌법위반의 소지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쿠데타이든 혁명이든 선거 이외의 방식에 의한 정권 교체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혁명은 초헌법적 발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촛불혁명이 아닌 대통령 선거로 탄생하였다.
  
   <나는 지난 겨울 대한민국의 촛불혁명이야말로 유엔정신이 빛나는 성취를 이룬 역사의 현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촛불혁명은 협력과 연대의 힘으로 도전에 맞서며 인류가 소망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아마 미디어를 통해 목격했던 촛불혁명의 풍경을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수십만, 수백만의 불빛들, 노래와 춤과 그림이 어우러진 거리 곳곳에서 저마다 자유롭게 발언하고 평등하게 토론하는 사람들, 아이들과 손잡고 집회장을 찾는 부모들의 환한 표정, 집회가 끝난 거리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청년들에게서 느껴지는 긍지, 그 모든 장면들이 바로 민주주의였고, 또 평화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촛불혁명은 민주주의와 헌법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시민들의 집단지성으로 이어진 광장이었습니다.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나 자신도 오직 시민의 한 사람으로 그 광장에 참여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운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성취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실체인 국민주권의 힘을 증명했고, 폭력보다 평화의 힘이 세상을 더 크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새 정부는 촛불혁명이 만든 정부입니다. 민주적인 선거라는 의미를 뛰어넘어, 국민들의 주인의식, 참여와 열망이 출범시킨 정부라는 뜻입니다. 나는 지금 그 정부를 대표해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시작은 늦었지만 세계 민주주의에 새로운 희망을 보여줬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2. 그의 6·25 남침 전쟁에 대한 언급은 사실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좌파적이다. 그는 북한정권을 침략자로 규정, 유엔군을 보내 한국을 살려주었던 그 유엔에서 한 번도 한국전쟁이 김일성의 남침에 의하여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한국전을 내전으로 인식하는 것은 한완상 류의 좌파적 인사의 왜곡이다. 6·25 남침 전쟁은 내전이 확대된 것이 아니라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을 업고 일으킨 침략전쟁이란 사실이 세계적으로 확정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브루스 커밍스 류의 反역사적, 反국가적, 反사실적 전쟁관을 갖고 있다는 게 놀랍다. ‘세계적 냉전 구조의 산물이었던 그 전쟁’이라는 말은 김일성의 전쟁범죄 책임을 덮기 위하여 냉전 구조에 책임을 轉嫁한 용서할 수 없는 억지이다.
  
  <나는 전쟁 중에 피난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전이면서 국제전이기도 했던 그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온전한 삶을 빼앗겼습니다. 내 아버지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피난한다고만 생각했던 내 아버지는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 자신이 전쟁이 유린한 인권의 피해자인 이산가족입니다.
  
  그 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세계적 냉전 구조의 산물이었던 그 전쟁은 냉전이 해체된 이후에도,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64년이 지난 지금에도, 불안정한 정전체제와 동북아의 마지막 냉전 질서로 남아 있습니다.>
  
  3. <우리는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의 흡수통일이나 인위적인 통일도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헌법위반이다.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인위적 자유통일을 명령한 것이다.
  
  4. <나는 평창이 또 하나의 촛불이 되기를 염원합니다.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들었던 촛불처럼 평화의 위기 앞에서 평창이 평화의 빛을 밝히는 촛불이 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과 유엔이 촛불이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유엔이 촛불 되면 어떻게 되나? 불타 없어지란 뜻인가? 비유도 분위기를 봐서 해야 할 것 아닌가? 9·11 테러로 폭파된 세계무역회관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유엔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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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상교육 교과서(고교 한국사 2013년 8월 검인정 판): <남한과 북한의 대립은 38도선 부근에서의 잦은 무력 충돌로 나타났다. 그러던중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선전 포고도 없이 전면적 남침을 감행하면서(후략)>
  
  문제제기: '무력 충돌'이란 표현이 문제이다. 38도선을 둘러싼 무력 충돌은 북한군의 도발에 대한 한국군의 방어전 성격이었다(아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 그렇다면 '잦은 북한군의 도발'이라고 적어야지 '잦은 무력 충돌'이라고 하여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흐려선 안 된다. 비상교육 교과서는 '그러던중'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여 학생들에게 6.25 남침이 잦은 무력 충돌의 연장선에 있는 자연스러운 사건인 것처럼 그릇된 역사를 가르칠 위험이 있다.
  좌편향 교과서는 북한이 불리한 경우엔 '무력 충돌' 식으로 책임 소재를 흐리는 기술을 한다. '북한에 의한 천안함 폭침'이라 하지 않고 '천안함 사건'이니 '천안함 침몰'이라고만 적어 누가 범인인지를 밝히지 않는 것과 비슷한 수법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북한의 38도선 도발과 국군의 대응은?
  
  
  무력충돌은 1 9 4 9년 3월 중순에 접어들면서부터 격화됐다. 그 대부분
  
  은 경비대간의 소규모 충돌로 발생한 것이었지만, 어떤 경우는 보병대
  
  대 규모로 확대된 적도 있었다. 충돌격화의 원인은 북한이 대규모 병력
  
  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미 1 9 4 7년 7월부터 소련군으로부터
  
  3 8도선 경비임무를 인수해 북한‘3 8경비대’가 경비를 맡아왔고, 1949
  
  년 초부터는 그 규모를 3개 여단으로 증편해 전술상의 요지를 장악한
  
  후 강력한 진지를 구축해놓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진행된 주한미군 철수는 북한의 도발을 부추길 가능성
  
  이 높았다.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해온 한국정부는 주한 미국대사 무초
  
  로부터 한국군의 전력증강을 위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약속받고 철군에
  
  동의했다.
  
  그러나 4월 1 8일 뉴욕타임즈 등 외신을 통해 철군예정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자 사회여론은 비등했고, 남침 위기감이 사회전반으로 확산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의 위기의식을 가라앉히기 위해 북한이 남침해오
  
  면 강경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단호한 의지를 내보였다. 정부도 국민이
  
  동요하지 않도록 여론을 진정시킴과 동시에 한반도 철군 후 힘의 불균
  
  형을 메워줄 안전보장의 확약이라는 측면에서 미국 행정부에 안보공약
  
  을 요구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남침위기설과 대북 강경대응 입장이 집중적으로 표
  
  명되던 1 9 4 9년 5월 초, 개성, 옹진, 춘천을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 전투
  
  가 발발했다. 특히 개성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는 심각한 위기상황이라고
  
  평가될 만큼 격렬했다. 이 전투는 개성 북서쪽의 2 9 2고지에서 시작됐
  
  다. 발단은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이 북한군의 진지 앞에 진지를 구
  
  축하자 북한군이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은 국군 제1사단 제1 1연대 예하 제2대대
  
  는 2 9 2고지뿐만 아니라 그 남쪽의 유엔고지, 비둘기고지 마저 빼앗겼
  
  다. 이로 인해 개성이 위협받게 되자 제1 1연대장은 즉시 문산에서 교육
  
  을 받고 있던 중인 제1대대 제3중대와 제4중대를 제2대대에 증원함과
  
  동시에 황해도 연안방면으로 행군훈련을 나간 하사관교육대를 개성으
  
  로 복귀시켜 반격할 태세를 갖췄다.
  
  다음날 특공대로 자원한 용사들이 1 2 : 0 0시 포병의 지원사격 하에 비
  
  둘기고지로 돌진했지만, 북한군의 각 토치카에서 뿜어져 나온 기관총사
  
  격 때문에 목표지점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각 특공대
  
  원들은 오후 1 4 : 0 0시 지정된 북한군의 특화점으로 박격포탄을 들고 돌
  
  입하여 장렬하게 자폭함으로써 마침내 목표물들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
  
  다. 뒤이어 후속 지원된 하사관교육대 병력이 비둘기고지를 탈환했으
  
  며, 이내 2 9 2고지도 무난히 탈환했다.
  
  이를 계기로 개성부근 전투는 북한이 다시 옹진지역을 공격함으로써
  
  크게 확대돼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 벌어졌다. 그러한 상황은 소규모
  
  전투와 포격전을 반복하면서 6·2 5전쟁이 발발하기전까지 이어졌다.
  
  알아봅시다! 6·2 5전쟁사(제1권 배경과 원인)
[ 2022-06-24, 17: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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