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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서울상대 교수 김수행 회상

작성자예파 성백문|작성시간15.09.19|조회수394 목록 댓글 0
전 서울상대 교수 김수행 회상|자유게시판
성백문(NY)|조회 41|추천 0|2015.09.19. 04:32http://cafe.daum.net/snua10/4Ixw/6951 

한국 역사에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이념으로 갈등하던 시절, 사상의 자유를 찾아서 영국으로 유학해서

칼 맑스를 전공하고 귀국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펴는 일에 이론가로 서울 상대교수로 활동하던 김수행교수가 

최근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의 활동과 수고가 한국의 발전에 어떻게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알지 못하나

경북중학교 한교실에서부터 알아 온 그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본다.  


경북 중학교 1 학년 5반에 61번 이었던 김수행, 혹시 어렸을 때 단 것을 많이 먹었는지 앞니들은 많이 상해 있었다. 

항상 웃으면 눈이 보이지 않는 그얼글, 그러나 한번은 저보다 큰 애들이 (62-73,4번들) 떠들 때, 이새끼들 조용히 안하면 죽여 버린다고 역정을 냈는 데, 어느 누구도 감히 그에게 댓꾸하지 않았지. 


우리들의 1학년 첫 소풍을 고산골이던가 수성못으로던가 간 적이 있었는 데, 수행이가 내집을 방문하겠다고 해서 수집어 한 내가 대답않고 따로 집에 오니 그는 여러명과 함께 이미 우리집에 와 있었지.그중의 하나는 안기성이었다. 

우리들의 공민시간은 학생이 받은 제목을 공부해 와서 발표하고 질문을 받는 토론식이었다. 내가 한국의 의무교육에 관해 발표하고 나니 그가 질문을 했다. 의무교육 나이가 입학나이냐 졸업나이냐? 


나는 이질문을 지금도 가끔 생각해 보는 데, 의무교육이 17세면 이것이 졸업하는 나이인가고 아직도 자문한다. 

그는, 총명해도 진학 못하는 제주위 친구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기회마다 글마다 언급하던 것들을 기억한다. 

그의 글에 의하면 그가 대구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이유는 상고가 서울대에 입학하면 전액 대학 장학금을 준다는 것때문이었다. 


그가 대학원 경제과생 박현채 (한국의 농촌자본의 권위, 빨찌산 출신, 내아내의 일가)에게서 영향받고 그의 1년 선배인 박성준 (한명숙의 남편, 부모가 일찍 월북해서 삼천포에서 할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성장)와 함께 빈곤에 대한 관심과 연민을 품고 고민한 것이 그들이 함께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점에서 공통된다.

(박성준은 1966년 크리스마스전야에 종로에 있는 유명한 음악감상실, 르네쌍스에서 통금시간까지 나와 나눈 밀담을 통해서 그의 대학가를 포섭하는 전략을 밝힌다.)

김수행은 한국에서 공산당사상에 관련된 서적이 금지된 당시 박정희 군대정권의 숨막히는 현실에서 살다가 영국 런던 주재 외환은행에 근무하는 기회에 사회주의와 사상의 자유가 공공연한 영국에서 한국의 금서목록인 공산주의, 사회주의 서적, 특히 칼 맑스의 자본론이 즐비한 서점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으며 그것이 그로 영국 유학을 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수행이가 박성준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가졌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이 1년차이로 경제과에 다녔으며 상대 교수중에 사회주의적인 사상이 있었으며 또 상대생들중에 적지않은 촉망있는 일류교 출신들이 한국 대학생선교회내에 박성준-한명숙들이 중심한 경제사회복지회 구릅이 형성되는 시작부터 그들이 자의반 타의 반으로 대학생 선교회를 탈퇴해서 당시 자유주의 신학 목사인 강원용 목사 교회로 옮긴 것과 또 박성준이 나와 한 밀담이후 비원입구 그들의 아지트를 방문하고 그들의 활동을 본 것들에서 김수행의 이름이나 활동은 없은 것으로 그당시는 아무 관계가 없은 것으로 단정된다.


그후 1965-67기간에 극렬했던 한일협상반대 데모나 활동은 내가 입원하는 것과 졸업하는 것으로 그들과의 관계는 사실상 끝난다.


나는 얼마전부터 한국방문시 수행이를 만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와 같은 성공회대학에 있는 박성준도 가능성을 재고 있었다.


김수행, 전국체육대회에 대표로 나갈 만큼 테니스를 잘 친것은 그가 그만큼 건강했던 표시이고, 항상 그보다 불우했던 사람들을 생각한 친구였다. 어딘선가 그의 종교가 기독교인 것도 발견하는 데, 아마도 그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와 동정을 순수하게 갖는 모습이리라.

우리 세대가 1961년 대학입시고사에 함격했을 때, 그해에 출판된 대학입시문제집에 실린 서울대학교 각대학 최고 득점자들의 입시공부 경험 수기에서 김수행은 "죽을 힘을 다 해서 공부했다"고 썼다. 


우리의 중학교 2학년시절 학업에 낙후된 학생들을 위하여 특수 학급 2학년 5반을 편성했는 데, 우리들의 수학 선생, 이을기선생님이 담임이 되고 이선생님이 그에게 특별 부탁을 해서 반장으로 그반을 이끌었다고 한다.


깊은 생각과 배려를 할 줄 알았던 김수행. 그일찍 성숙했던 그를 이땅에서는 다시 만날 길이 없다. 

내가 바라기는 그가 학문적으로는 칼 맑스를 존경했더라도 (그가 가족과 함께 맑스의 묘지를 방문한 사진이 있음) 

인생의 황혼에서 인간의 가난도 고통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사상으로 해결되지 않음을 깨달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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