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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철학을 찍는 아웃사이더

작성자예파 성백문|작성시간14.06.16|조회수98 목록 댓글 0
  • [곽아람 기자의 캔버스] 철학을 찍는 아웃사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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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6.14 14:15

'반역과 도발의 사진가' 김아타
“작품 안 팔려도 괜찮다는 건 촌스러운 거짓말… 작가는 안 팔리면 죽는다”


獨學의 사진가, 세상을 놀라게 하다
유리 상자 안의 벌거벗은 인간… 텅 비어버린 세계 대도시 풍경…
‘뮤지엄’ ‘온에어’ 연작 잇단 성공, 세계적 아티스트로… 작품값 뛰어


‘我他’는 예명… 너와 내가 동등하다
80대 老母를 알몸으로 연꽃 좌대에… 공포로 우는 아이까지 피사체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중하다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


빌 게이츠도 반하다
뉴욕 맨해튼 작품 리뷰 보고 화랑에 직접 전화 걸어와…
여섯 점 사려다 값이 비싸 한 점만 8800만원에 사 가


아내는 나의 힘
“작품에 돈 다 쏟아붓느라 이제껏 집 한채 없는데도…
단 한번도 뭐라고 안하더라 세상 버려도 아내는 못버려”


아해 유병언의 사진?
“언급할 가치도 없다 작가란 전시부터 판매까지
전쟁하듯 해야 하는데… 그에겐 그런 전쟁이 없다”

독학의 사진가 김아타는 “내가 만일 사진을 전공했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거다.
독학의 사진가 김아타는 “내가 만일 사진을 전공했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거다.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표현에 한계가 없어서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했다. 김아타의 왼쪽 아크릴판 사이 붉은 물체는 철원 전방부대 사격장에서 포탄에 찢긴 캔버스 조각을 핏빛으로 염색한 것이다. 그가 요즘 몰두하고 있는 ‘자연이 그린 그림’ 프로젝트 중 일부다. /파주=오종찬 기자
유리 상자(가로 3m, 세로 2m, 높이 2.2m) 안에서 처음 만난 남녀가 옷을 벗었다. 배우도, 전문 모델도 아닌 일반인이었다. 남녀는 "본능대로 하라"는 지시에 따라 움직였고, 그 과정을 낡은 비디오 카메라만 지켜봤다. 이튿날 새벽, 남자는 가 버렸고 유리 상자 안에 혼자 남은 여자가 한 시간여 통곡했다. "내게 남아 있던 걸 모두 다 태워버렸다"고 그녀는 울음 끝에 말했다.

2001년 3월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동아시아 작가 27인전에 이 영상이 'The Box(상자)'란 제목으로 소개됐다. 목탁 소리와 반야심경 독경이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가운데 느리게 또는 빠르게 편집된 화면이 펼쳐졌다. 인간과 짐승의 경계를 허문 '교미' 장면을 보려고 관람객들이 전시장 앞에 병목 현상을 이뤘다. 전시는 그해 10월 뉴욕 퀸스 미술관을 거치며 호평받았다. 작가는 2002년 런던 예술 전문 출판사 파이돈 프레스에서 꼽은 '세계 100대 사진가'에 선정됐으며, 2004년엔 세계적 사진 전문 출판사인 뉴욕 애퍼처 파운데이션에서 사진집을 출간했다. 2006년엔 뉴욕 국제사진센터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개인전을 열며 '세계적 사진가' 반열에 올랐다.

사진가 김아타(58)를 지난 10일 경기도 파주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는 트레이드마크인 박박 깎은 머리에 검정 재킷 차림으로 9개월 된 손녀를 어르고 있었다. 출판사 건물에 세 들어 있는 그의 작업실 벽 가득 작품이 걸려 있었고, 책장엔 철학·미술 관련 서적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수차례 사진집과 산문집을 낸 김아타는 최근 산문집 '장미의 열반'(박하)을 출간했다. "손녀에게 주는 책이다. 손녀가 어른이 돼서 정신적으로 이 책과 공감하는 날 내가 부활할 것이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안경 너머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사진가의 잔인한 시선

유리 상자 안의 그 남녀는 3개월 후 결혼 소식을 알려왔다. 부산 해운대 인근 작업실에서 촬영했던 1998년 당시 여자는 미대 시간 강사, 남자는 예술가를 꿈꾸다 진로를 바꾼 청춘이었다. 작품은 김아타가 1995년부터 주력한 '뮤지엄 프로젝트'의 일부다. 김아타는 유리 상자 안에 벌거벗은 인간을, 개와 고양이를, 자신의 정액이 담긴 콘돔을, 작은 돌과 흙을 넣고 사진 찍었다.

―산 사람 몸뚱이를 유리 상자 안에 구겨 넣고 촬영하다니 '엽기' 아닌가.

"박물관을 생각해 보라. 사소한 유물이 유리 진열장 안에 들어감으로써 가치를 부여받는다. 내 '뮤지엄 프로젝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소중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사적인 박물관을 만들어 나와 동시대의 살아 있는 것들을 영원히 살게 하고 싶었다."

―전문 모델이 아닌 일반인 지원자를 쓴다. 옷을 벗기기가 쉽지 않을 텐데.

"촬영 일주일 전부터 사람들이 잠도 못 자고 고민하지만 현장에선 10초면 무장해제된다. 옷이라는 게 결국 '관념 덩어리'라 벗어버리는 건 순간이다."

―그래도 설득이 필요할 텐데.

"물론. 1년 이상 설득하기도 한다. 전쟁 기념비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려 월남 참전 상이용사들을 유리 상자에 넣었을 땐 석 달간 보훈병원에 찾아가 그분들 안마해 드리며 계속 설득했다. 결국 부인들까지 스태프로 작업에 참여했다."

―법당에 가부좌 튼 사람이 든 유리 상자를 설치한 '니르바나 시리즈' 땐 80대 노모(老母)를 알몸으로 연꽃 좌대 위에 세웠다.

"니르바나 시리즈는 '인간이 곧 부처'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알몸 모델이 법당에서 곧 석가모니불이 되고, 아미타불이 되고, 비로자나불이 된다. 연세 드신 어머니는 모든 걸 다 포용한다는 듯 염화미소(拈華微笑)를 지었다. 다만 그날 저녁 그 얘기를 전해들은 큰형님이 '꼭 그래야 되나' 하며 울었다."

김아타의 ‘뮤지엄 프로젝트 #026, 홀로코스트 연작’.
김아타의 ‘뮤지엄 프로젝트 #026, 홀로코스트 연작’. /김아타 제공
1994년 겨울, 경북 포항의 조용한 해변 마을. 김아타는 살얼음이 언 논바닥에 알몸의 모델들을 부려 놓았다. 자연이라는 '밭'에 인간을 '씨앗'처럼 뿌려놓는다는 개념이었다. 촬영 직전 한 모델의 네 살짜리 아들이 갑자기 논두렁에 엎드린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엄마 집에 가" 하며 울기 시작했다. 아이 역시 알몸이었다. 마음속에서 한 조각 후회가 스쳐 지나갔지만 김아타는 그대로 셔터를 눌렀다. 움직일 수 없었던 모델들은 논바닥에 엎드린 채로 그냥 울었다. 엄마 머리채를 잡은 아이의 뒷모습이 담긴 이 사진은 '해체 시리즈 047'이란 제목으로 그의 작품집에 남았다.

―추위와 공포로 우는 아이까지 작품으로 삼다니, 당신은 정말 잔인한 사람 아닌가. 인간까지도 '피사체'로만 인식하는 것 같다.

"맞다. 나, 잔인하기 짝이 없다. 정말 나쁜 놈이다. 그 일이 마음에 걸려 그 아이, 석준이의 성장 과정에 관심을 가졌다. 다행히 건강한 청년으로 잘 자라주었다. 이번에 낸 책에 그 에피소드를 썼다. 석준이 엄마에게 '책이 나왔다'고 알려주었더니 며칠 전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책을 펼치니 첫 얘기에 준이 모습이 보이네요. 20년이 지난 이 시간에 이렇게 생생한 감동으로 눈물이 맺힙니다'라고 하더라. 드라마 같지 않은가."

獨學의 사진가

김아타는 '한국 사진의 영역을 확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사진심리학자 신수진씨는 "김아타 작업의 개념은 '현대 예술'과 상통한다. 그의 사진은 '무엇을 찍었느냐'보다는 '어떤 철학을 가지고 어떤 개념을 사람들에게 공감시켰느냐'의 영역에 있다"고 했다. 그 말대로 김아타의 작업은 '재현' 혹은 '기록'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무대를 설정하고 스토리와 관념을 만든 후 모델들을 배치해 찍어왔다.

카메라는 그의 개념을 담는 '도구'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2010년부터 진행 중인 '자연이 그린 그림' 연작에선 아예 카메라를 놓았다. 그는 산타페 사막, 석가모니가 성불한 부다가야, 강원도 인제의 원시림 등 세계 곳곳에 대형 캔버스를 설치하고 캔버스가 2년간 풍화된 흔적을 '작품'으로 수거하고 있다. 

'반역'과 '도발'의 연속. 정작 그는 사진 전공자가 아니다. 창원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사진은 독학했다. 학맥으로 얽힌 예술계, 해외 유학파가 수두룩한 사진계에서 그는 '아웃사이더'다. '아타(我他)'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뜻으로 지은 예명. 본명은 김석중이다. 작품 못지않게 '인간 김아타'가 궁금했지만 그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휴먼 스토리'다. 내 철학과 작업에만 집중해 달라"며 개인사를 털어놓길 꺼렸다.

―맨 처음 카메라를 잡은 건 언제인가.

"이런 얘기 재미없다. 꼭 물어봐야겠나. 중학교 2학년 때쯤일 거다. 당시 우리 동네(그는 경남 거제 출신이다)에서는 사진이 흔치 않았다. 올림푸스 자동 카메라를 빌려와 감나무에 매달려 있던 조카 불알을 찍었다. 사진관에 필름을 갖다줬는데, 다음 날 가 보니 필름이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었다. 초점이 안 맞으니 버린 모양인데, 그 아웃포커스 된 장면이 내 눈엔 정말 재밌는 거였다."

김아타의 대표작
김아타의 대표작.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뮤지엄 프로젝트 #149, 니르바나 연작’ ‘온에어 프로젝트 110-7, 뉴욕 연작’ ‘온에어 프로젝트 153-1, 아이스 파르테논’ ‘자연이 그린 그림’의 일환으로 강원도 인제 숲 속에 세워 놓았던 캔버스. /김아타 제공
―1980년대엔 정신병원, 곡마단 등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찍었다. 사진이 왜 그렇게 매력적이었나.

"카메라 뒤에 숨을 수 있었으니까. 카메라가 먼저 다가가면 사람과 소통하기가 쉬웠다. 남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 항상 콤플렉스였다. 카메라는 그런 내게 무기(武器)였다."

―아버지가 교사였다. 교사 아들이라니, 당신의 도발성과 어울리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예인(藝人) 기질이 있었다. 한학에 조예가 깊어 우리 면에 초상이라도 나면 밤새 만장(輓章·죽은 이를 애도하며 적은 글)을 쓰셨다. 졸면서 먹을 가는 내 눈엔 빨간 천 위에서 검정 먹물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길 가는 모든 사람에게 아버지는 농담을 던졌는데, 돌이켜보니 그 말들이 내가 사진을 하며 붙잡고 있는 화두와도 비슷하다."

김아타는 1992년 사진집 '아버지'를 출간했다. 사진가의 길로 들어섰을 때 반대한 아버지에게 제출하는 '숙제' 같은 작품이었다. 비단 보자기에 곱게 싸서 드린 그 책을 친구들과 함께 펼쳐 보던 아버지는 슬그머니 책을 덮었다. 그리고 다시는 책을 펼쳐 보지 않았다. 주름진 가슴을 드러낸 어머니의 누드 사진이 실려 있어서였다. 그는 "'아버지' 책이 내게 평생 상처로 남았다. 사과, 소통, 화해할 기회 없이 아버지는 세상을 뜨셨다"고 했다.

―아무리 '예술'이라지만, 연로한 아버지에게 어머니 누드 사진까지 이해해 달라는 건 무리 아닌가.

"이해해 달라고 한 건 아니었다. 다만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다. 돌이켜보니 어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작업이었던 것 같다. 그런 무리수를 두다 보니 결국 아버지와 소통하는 데 실패한 거지."

그런 그가 지난해 손녀를 봤다. 손녀의 이름을 '소울(soul·영혼)'이라 지었다. '영혼이 맑은 아이'라는 뜻이다. "아이의 눈물이 얼마나 맑은 줄 아는가. 수정(水晶)이다. 아이의 침은 또 얼마나 맑은지. 다이아몬드가 따로 없다." 카메라 렌즈처럼 냉철한 이 사진가의 눈이, 손녀 앞에선 착시(錯視)를 일으키고 있었다.

"팔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건 촌스러운 거짓말"

2006년 뉴욕 국제사진센터 개인전 이후 김아타 작품 값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이 '온 에어(On-Air) 프로젝트' 중 '8시간 연작'. 김아타는 뉴욕, 베를린, 파리, 베이징 등 전 세계 대도시 중심가에 카메라를 세워놓고 아침 9시부터 8시간을 노출시켜 단 한 컷을 찍었다. 카메라 앞을 지나갔던 사람, 자동차는 다 사라지고 텅 빈 도시만 남았다. 사진은 이렇게 말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빠르게 사라지고, 느리게 움직이는 것은 느리게 사라진다.' 인류 멸망 직후처럼 적막한 이 풍경에 컬렉터들이 열광했다.

'8시간 연작' 중 맨해튼 파크 애비뉴를 찍은 한 점은 빌 게이츠가 우리 돈 8800만원에 사 갔다. 뉴욕타임스에 실린 전시 리뷰를 보고 화랑에 전화를 걸어온 그는, 원래 여섯 점을 사려고 했지만 화랑에서 값을 올리자 한 점만 샀다. 김아타는 "반면 들판에 나신(裸身)을 뿌려놓은 '해체'는 지금까지 한 점도 못 팔았다"고 했다.

―사진 한 점이 1억원에 가깝다니, 지나치게 비싸다.

"비싼 건 아니다. 예전에 나와 함께 그룹전을 했던 중국 작가들 작품이 지금 내 작품 값의 몇 배에 팔린다. 자본주의 사회의 예술이란 철저히 자본 논리에 따라 흘러가는 거다."

―'팔리지 않아도 괜찮다. 예술은 자본 논리에 종속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예술가들도 있다.

"안 팔려도 괜찮다는 건 촌스러운 거짓말이자 허황된 수사다. 작가는 안 팔리면 죽는다. 작품이 안 팔리면 얼마나 구질구질해지는데. 팔려야 한다. 어떻게 '팔리는 작품'을 만드느냐가 문제다."

경기도 파주의 작업실 통로에 걸린 ‘온에어, 8시간 연작’ 사이에 선 김아타. 왼쪽은 베이징 천안문, 오른쪽은 인도 올드델리의 찬드니 초크 시장을 찍은 것이다.
경기도 파주의 작업실 통로에 걸린 ‘온에어, 8시간 연작’ 사이에 선 김아타. 왼쪽은 베이징 천안문, 오른쪽은 인도 올드델리의 찬드니 초크 시장을 찍은 것이다. /파주=오종찬 기자
지난 2012년 '아해'라는 한국인 사진작가가 프랑스 남부 시골 마을을 52만유로(당시 환율로 약 7억7000만원)에 사들인 사실이 외신에 보도됐다. 많은 사람이 이름의 유사성 때문에 '아해'가 '아타'가 아닐까 생각했고, 기자도 확인차 김아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처음 듣는 사진가"라며 의아해했던 그는 "'아해'의 실체를 몰랐던 그때엔 그가 정말 부러웠다. 자신만의 영지(領地)를 갖는 건 예술가의 꿈이기 때문이다. '대체 누굴까' 정말 궁금했다"고 털어놓았다.

―그 '아해'가 결국 유병언 전(前) 세모그룹 회장으로 밝혀졌다. 그의 사진도 예술인가.

"언급할 가치도 없다. 예술에 정석은 없지만 예술에 이르는 '길'은 있다. 창의적일 것, 비평의 대상이 될 것, 그리고 컬렉션이 될 것. 프로 작가들이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아트페어에서 작품을 파는 과정은 그야말로 전쟁이다. 그래야 작가가 살아남고, 예술이 역사가 되는 거다. 그런데 유병언에겐 그런 '전쟁'이 없었다. 베르사유에서 전시하고 판매도 했지만 그의 작품이 '역사'가 될 수 없는 건 그런 차이 때문이다."

―당신이 요즘 몰두하는 '자연이 그린 그림' 연작이 과연 잘 팔릴까. 솔직히 포탄에 찢긴 캔버스 조각, 비바람에 부식된 천 조각을 누가 살까 싶다.

"정말 답답하다. 언제까지 사진이 처음 발명된 19세기적 정의만 붙잡고 있을 건가. '빛이 그린 그림' 이상의 사진이 어디 있겠나.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 끝없이 진화하면서, 자신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진화하며 성찰 중인가.

"그런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아침 문득 생각해 보니 나를 '경영'하는 데는 실패했더라. 이 나이가 되도록 한 번도 내 집을 가져본 적이 없다(그는 서울 상암동의 32평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다). 집을 사려면 살 수 있었지만 그 돈을 몽땅 작업에 쏟아부었다. '자연이 그린 그림' 프로젝트에 20억원이 들었다. 가평에 작업실 지으려고 사놓은 땅 1000평이 유일한 재산이었는데, 그것도 이 프로젝트 한다고 몽땅 다 팔았다."

―아내가 아무 말 안 하나.

"단 한 번도 내 작업을 멈추게 한 적이 없다.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세상은 버려도 그 여자는 못 버린다. 내가 부산에서 작업할 땐 미술 학원을 운영하며 생계를 책임졌다. 2001년에 서울 올라와서 도봉동 살 땐 집에 쌀이 없는 날이 허다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인간극장' 류의 이야기가 굉장히 싫다. 사람들 기억 속에 그것만을 남기며 본질을 호도한다. 만일 이런 이야기 중심으로 기사를 쓸 거라면 오늘 인터뷰는 그만두자."

―개인사를 배제하고 철학만 강조하는 건 지적으로 보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인가.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 생각이 그러니까. 한 인간의 삶이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Who is… 김아타
―까다롭고 오만하다는 평판이 있다. 전시를 열었던 화랑·미술관 관계자들이 모두 힘들었다고 하던데.

"내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스스로를 지나치게 통제하는 편이다. 전시할 때 까다롭게 구는 건 이유가 있다. 내 작업이 액자가 커서 제작비가 많이 든다. 작품에 손상이라도 가면 내 돈으로 다 해결해야 한다. 이 인터뷰에선 차마 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나중에 자서전에 다 쓸 거다."

―당신 삶에서 사진이란 뭔가.

"아무것도 아니다. (작업실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저 '온 에어-뉴욕'이 꽤 비싸단 말이다. 마지막 에디션이라 2억5000만원 정도 한다. 당신이 만일 저걸 산다면―물론 안 사겠지만―무엇을 사는 걸까? 사진? 종이? 프로세스? 이미지? 아니다. 결국 내가 가진 어떤 것, 고급스럽게 말하면 '철학', 편하게는 '예술'을 사는 거다. 사진을 사는 게 결코 아니다. 그런데 아직도 관람객, 비평가, 사진가들이 그 정도 수준에만 머물러 있다. 작가는 작품으로 경전(經典)을 쓰고, 그걸로 세상과 소통하려 한다. 사진이라는 '도구'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실어 보내는 거다. 그런데 그 '도구'가 먼저 나오면 주객이 전도된 거지."

―특별하게 보이고 싶어서 남들이 하지 않은 걸 하는 거 아닌가.

"허, 참. 왜 그렇게 삐딱한가. 예술가를 싫어하나? '나만의 것'을 가지고 싶은 건 당연한 거지."

세 시간 마주 앉아 있는 동안 그는 "예술가를 싫어하느냐"고 수차례 물었고, "너는 내 본질을 읽지 못했다"며 몇 번이나 투덜거렸다. '예술가는 역시 괴팍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녹초가 되려는 찰나 그가 "2억5000만원인데 당신은 안 사겠지"라고 했던 뉴욕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카메라가 지워버린 공(空)의 거리에 자동차 후미등의 흔적이 붉은 먼지처럼 남아있었다. 그 적요함이 신비롭게도 아름다워서, 그가 "예술가를 사람으로 안 보지요?"라고 물었을 때 "신(神)으로 봅니다"라고 무심코 내뱉고 말았다. 그는 비아냥으로 여겼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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