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스크랩] 이병철-정주영 회장의 위대한 화해의 용기(상, 하)

작성자예파 성백문|작성시간14.09.22|조회수78 목록 댓글 0
  • 정주영, 이병철 보고 "자기는 부잣집 아들로 고상한 양반이고 나는..."

  • 박정웅
    메이텍 인터내셔널 대표
    E-mail : ltjwpark@gmail.com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담당 상무를 약 14년간 역임하면서 정주영 ..
    더보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입력 : 2014.09.17 07:45
  • 스크랩 메일 인쇄
  • 글꼴 글꼴 크게 글꼴 작게

이병철-정주영 회장의 위대한 화해의 용기(상)

1985년 11월 20일, 전경련은 며칠 앞으로 다가온 정주영 회장의 고희에 앞서 전경련 자체의 고희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평소 검소한 것을 좋아하는 정회장인지라 번거롭게 잔치를 벌이는 것을 극구 사양했지만, 전경련 회장단과 원로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정회장 고희연을 사무국에 준비시켰다. 전경련 회관 20층에 오찬 형식으로 고희연 자리가 마련되었다. 연회장은 정회장의 고희를 축하해주기 위해 재계 중진들이 많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뤘다. 김용완·이원순 명예회장 등 정 회장 보다 연로한 재계 원로들도 자리를 같이 했다. 재계의 현역 중진들과 원로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곧 정주영 회장님의 고희연을 시작하겠습니다. 내빈 여러분께서는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이윽고 사회자가 좌정을 권유했다. 여기저기 둘러서서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정해진 자리를 찾아 앉았다. 전경련 고문을 비롯한 내빈들의 간단한 축하 인사가 이어지고, 마침내 정주영 회장이 단상에 올랐다.

“이렇게들 모여서 축하를 해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축하를 받아도 되는 것이 괜찮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로부터 나이 70이 넘도록 사는 사람이 드물다 하여 고래희(古來稀)라고 해서 매우 드문 일로 축하를 해왔습니다만 이젠 고희가 아니라 고다(古多)라고 해야 할 정도로 칠순을 넘겨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때문에 저는 이런 축하를 받는 것이 격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회장 특유의 재담이었다. 구십 살까지 현역으로 열심히 일하고 그 뒤에나 여생을 즐기겠다는 정회장의 평소 지론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으니 그의 말이 터무니없이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였다. 누군가 뒤늦게 연회장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미 모든 내빈이 자리를 잡고 정돈된 상태였던 지라 자연히 모든 이들의 시선은 들어서는 사람을 향해 쏠렸다. 내빈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뜻밖에도 간호사를 포함하여 두 세 명 의료진의 부축을 받고 아주 어렵게 발걸음을 옮기며 들어오는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이었다. 사람들은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1985년 11월 25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왼쪽)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정주영 회장의 고희기념회장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조선일보DB
1985년 11월 25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왼쪽)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정주영 회장의 고희기념회장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조선일보DB
첫째, 당시 이병철 회장은 어려운 지병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외부 거동을 안 하는 상태인 것을 모두 알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실제 그때 이회장의 얼굴에 나타난 병색이나 몸 거동은 수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을 걱정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인데도 그 자리에 이회장이 나타난 데 대하여 그 자리의 사람들은 놀라움과 함께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 이유는 그때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의 뿌리 깊은 갈등과 반목관계 때문이었다.

이병철과 정주영. 이병철 회장이 1910년생으로 정회장보다 다섯 살이 많았고 둘은 1960년대부터 그 시기까지 한국 재계를 이끌어온 쌍두마차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성장 배경은 물론 주력하는 사업, 경영 스타일까지 어느 하나도 공통점이 없을 만큼 판이했다. 강원도 산골에서 찌들게 가난한 집안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가출 소년으로 상경하여 온갖 거친 노동자 생활을 거쳐 맨손으로 시작해 상상을 초월하는 도전정신과 뚝심으로 재계의 거목으로 우뚝 선 정주영 회장. 그는 매번 모험을 마다 않고 황소와 같은 추진력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건설업부터 시작해 자동차, 조선 공업을 비롯해 한국 중공업 분야의 토대를 이룩한 인물이었다.

반면 이병철 회장은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한 엘리트 출신으로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확인하며 꼼꼼하고 치밀한 경영 방식을 기조로 하며 주로 가전제품과 소비재 사업을 근간으로 하여 삼성을 한국의 거대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이처럼 두 사람은 삼성이 나중에 참여한 조선과 건설 정도를 제외하곤 사업 영역은 물론 성장과정과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이런 두 사람이지만 무엇이 단초가 되었고 누가 먼저 감정 싸움을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여러 면에서 둘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 현대는 동아일보, 삼성은 중앙일보 지면을 통하여 각기 창업 초기에서부터 사소한 사업 상의 일 등 개인 신변의 일까지 들춰가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불행한 감정 싸움을 오래 지속해오고 있었다.
“그래 자기는 부잣집 아들로 자라 유학도 가 보고 기업을 일궈서 국보급 골동품으로 가득한 서재에 앉아서 고려자기를 쓰담으며 정원에 노는 공작새를 감상하는 고상한 양반이고 나는 막 노동자 출신이라 무식한 사람이라 이거야!”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악화 일로에 있던 시기 측근들과의 어느 사석에서 감정이 북받친 끝에 노기에 찬 정회장의 표현이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주고도 남는다. 이러던 끝에 두 사람 모두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던 당시 김용완 전경련 명예 회장의 중재로 겨우 표면상 휴전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차였다.(하편에 계속)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획 '이봐, 해봤어?'(28)]정주영 회장의 19금 농담 '돌쇠와 아씨' 박정웅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획 '이봐, 해봤어?'(27)]정주영이 '쨍하고 해뜰 날' 부를 때 이명박은 손 흔들며 박자 맞추고... 박정웅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획 '이봐, 해봤어?'(24)]정주영 회장에게 "병신 같은 거, 나가 죽어" 소리 들은 현대중공업 황전무, 그 후… 박정웅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획 '이봐, 해봤어?'(22)]대학교수가 "어떻게 그렇게 말을 잘하시냐?"고 묻자 정주영 왈... 박정웅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획 '이봐, 해봤어?'(21)]영어 못한 정주영 첫 국제무대 데뷔 연설에서... 박정웅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획 '이봐, 해봤어?'(19)]정주영 회장, 호텔서 슬리퍼 끌고 다니던 사우디 현장소장 보자... 박정웅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획 '이봐, 해봤어?'⑪]정 회장, 올림픽 유치 방해공작하는 북한 사람들에게… 박정웅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획 '이봐, 해봤어?'⑧]외국 경제사절단이 오면 정주영 회장이 꼭 데려간 곳 박정웅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획 '이봐, 해봤어?'①]정주영 회장, 경부고속도로 공사상황을 묻는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박정웅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획 '이봐, 해봤어?'⑦]해외유학파 관료,"(초등학교 졸업한) 정 회장이 조선소 사업을 성공시키면 내 열 손가락에 장을 지지고 하늘로 오르겠소." 박정웅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획 '이봐, 해봤어?'(14)]정주영이 고분고분하지 않자 신군부 "공수부대 동원해 현대그룹 싹 쓸어 버리겠다" 박정웅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획 '이봐, 해봤어?'(25)] 정주영, 터널공사 때 인부들이 겁에 질려 물러서자 자기가 직접… 박정웅
  • 이병철이 타계 2년전에 정주영 회장에게 준 선물

  • 박정웅
    메이텍 인터내셔널 대표
    E-mail : ltjwpark@gmail.com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담당 상무를 약 14년간 역임하면서 정주영 ..
    더보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입력 : 2014.09.22 09:02 | 수정 : 2014.09.22 09:52
  • 스크랩 메일 인쇄
  • 글꼴 글꼴 크게 글꼴 작게

이병철-정주영 회장의 위대한 화해의 용기(하)

☜ 상편에서 계속

이런저런 사연들을 모두 알고 있는 재계 중진들에게 이병철 회장의 등장은 실로 의외의 사건일 수 밖에 없었다.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일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이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이병철 회장이, 다른 사람도 아닌 정주영 회장의 고희연에 나타난 심중은 무엇일까 하는 데에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가라앉은 분위기가 잠시 계속되었다. 어느 정도 침묵이 흐른 뒤, 이 회장의 손이 조금 움직였다고 느껴진 순간 수행원 중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잘 포장된 상자 하나였다. 그는 조용한 걸음으로 정주영 회장 앞으로 다가가더니 두 손으로 공손히 상자를 바쳤다.
“저희 회장님께서 정주영 회장님의 고희를 맞아 준비한 축하의 선물입니다. 약소하지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제 상자 속의 내용물이 무엇인가 하는 데에 쏠렸다. 좌중에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상자 속에서 나온 물건은 큼지막하고 우아한 모양의 하얀 백자였다. 어느 도공에게 부탁을 했는지 평소 미술품과 골동품에 대한 안목이 남달랐던 이병철 회장의 선물답게 언듯 보기에도 고아한 품격이 배어 나오는 멋진 작품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뭇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 속에서 백자를 살펴보던 정주영 회장의 얼굴에 환하게 웃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의 미소는 호탕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백자에는 한국 재계를 이끌어온 견인차로서 정주영 회장에 대한 헌사가 가득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상상치도 못했던 이병철 회장의 등장, 거기에 뜻밖의 선물. 정 회장으로부터 백자를 건네 받은 사회자가 그 내용을 좌중에게 읽어주었다. 이윽고 정 회장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하하하, 이거 진정한 우리 재계의 지도자이신 이병철 회장님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고 보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백자에 쓰여진 내용을 들으셨겠지만, 사실 이런 헌사는 바로 저기 계신 이 회장님께나 어울리는 것입니다. 이 회장님은 일찌기 전경련의 토대를 마련해주셨고 제가 이나마 전경련 회장으로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알게 모르게 다 이 회장님과 같은 분의 성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 이렇게 부족한 저의 고희연에 직접 참석을 해 주시고 과분한 선물까지 주시다니 정말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정주영 회장의 고희기념회장에서 만나 담소하고 있다./조선일보DB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정주영 회장의 고희기념회장에서 만나 담소하고 있다./조선일보DB
정 회장의 감사 인사가 끝나자마자 실내는 온통 박수 소리가 울렸다. 오랜 동안 끌어왔던 재계의 두 거목,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의 해묵은 감정의 앙금이 한 순간에 녹아 내리는 것을 축하하는 박수였다. 두 사람의 감정적 반목과 대립은 현대그룹과 삼성그룹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결속을 필요로 하는 한국 경제계 전체의 분위기에도 여러모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한국 재계의 두 거목 사이의 이러한 감정적 갈등은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 한때의 하찮은 계기로부터 응어리질 수 있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두 기업 그룹간에 이것이 풀어지지 않고 그대로 승계된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일 것이다. 또한 두 그룹 간의 관계를 보더라도 그렇다.

70 고희를 맞았다고는 하지만 50대 못지 않는 건강과 활력, 지치지 않는 열정과 적극성이 넘치는 사람으로 현직 전경련 회장인 그는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명성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아직 절정기의 현역이었다. 반면 이병철 회장의 뒤를 이은 이건희 회장은 기질적으로도 밖으로 잘 나서지 않는 내향적 성격에 당시 나이도 아직 40대 중반으로 창업 1 세대인 정 회장에 비하면 한 세대의 차이가 있었다. 재계 중진들의 모임인 전경련의 회장단에도 삼성은 그룹 창업 원로 중 한 사람인 조우동 회장을 대신 삼성그룹 대표로 참석시키고 있었다.

이런 정황에서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 사이에서 비롯된 감정의 응어리를 그대로 남겨두지 않고 더 늦기 전에 결자해지 해야 되겠다는 결심이 섰음직도 하다. 그러나 막상 서로 용서와 화해가 얼마나 위대한 용기가 필요한가는 역사의 여러 사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때로는 살상을 수반하는 전쟁을 결심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태 후에 이병철 회장은 76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 회장은 그의 말대로 “90에나 현역에서 손을 놓고 그 다음부터 여생 동안 쉬겠다”는 의욕에는 못 미쳤지만 이로부터 그가 타계할 때까지 약 15년간 계속하여 식지 않는 의욕을 과시하며 사업의 도전, 대통령 출마, 소떼를 이끈 방북 등으로 상징되는 대북 사업에 열정을 쏟았다.
자신의 고희 및 연설문집 출판기념회장에서 부인 변중석 여사와 함께 케이크를 자르고 있는 정주영 회장./조선일보DB
자신의 고희 및 연설문집 출판기념회장에서 부인 변중석 여사와 함께 케이크를 자르고 있는 정주영 회장./조선일보DB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가창초등학교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