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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원한 삶에의 진리를 찾은 전직 대사

작성자예파 성백문|작성시간14.10.24|조회수34 목록 댓글 0
  • 대사에서 목사가 된 장기호씨…이라크대사 800일, 총탄 쏟아지는 생사 기로서 삶의 진리 찾았다

  • 조성관
    주간조선 편집위원
    E-mail : mapl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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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0.24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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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서울 왕십리교회 선교목사 장기호씨. 그는 2007년 5월까지 WTO대사(제네바), 아일랜드대사, 캐나다대사, 이라크대사로 일했다.

1945년생이니 69세. 현직에서 은퇴한 이들 상당수는 남아도는 시간에 뭘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답답해 하고 있을 연배다. 그는 지난 4월 목사 안수를 받고 새로운 꿈에 부풀어 있다. 장 목사는 “20년 전에는 지금 나의 모습을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1996년까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본가나 처가에 목회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곡절이 있었길래 그는 목사가 됐을까. 첫 번째 계기는 1990년대 중반이다. 그는 1996년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에서 1년간 연수를 했다. 보스턴 집에서 하버드대를 오가며 연구활동을 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보스턴한인교회가 있었다. 어느 일요일 그는 아내와 함께 보스턴한인교회를 찾아갔다.

“오며가며 교회를 바라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평화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에 평안이 깃들었다. 언젠가 저기를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아내와 함께 교회를 찾았다. 오전 10시 예배에 갔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오니까 교인들이 궁금해 하면서 맞아주었다.”

이게 기독교와의 첫 만남이었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외무고시를 거쳐 직업외교관의 길을 걸어온 장기호씨. 1994~1995년 스위스 제네바 주재 WTO(세계무역기구)대사로 일할 때도 한인교회에 나와 달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보스턴에서 제 발로 교회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영길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다. 처음 들어본 설교가 내 마음을 쳤다. 목사님은 2차대전 당시 유대인들이 독일군에 의해 강제수용소 가스실에서 처형을 당하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고난 속에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며 죽어간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감동을 받았다.”

그는 이영길 목사의 권유로 성경공부반에 등록했다. 6개월 뒤에 세례를 받고 정식 교인이 되었다. 하버드대 연수를 마치고 외교부로 복귀해서는 서울 새문안교회에 등록해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본부대사를 거쳐 아일랜드대사로 부임했다. 교민 사회가 크지 않은 아일랜드에는 한인교회가 없었다. 그는 관저에서 가까운 성공회 교회에 다니며 3년간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대사 임기를 마친 뒤 귀국해서는 다시 광화문 새문안교회에 다녔다.
/사진=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사진=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여기까지는 특기할 만한 게 없다. 착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직업외교관일 뿐이었다. 그러다 2002년 캐나다대사로 나가게 된다. 그 사이 한국은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로 정권이 넘어간다. 캐나다대사 임기 3년째인 2004년 초. 그는 예기치 않은 투서사건에 연루되어 2년1개월 만에 귀국하게 된다. 승승장구하는 인생을 살아오던 그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이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작성해 청와대에 제출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당시 외교부 장관이었다. 청와대는 탄원서를 바탕으로 투서의 진위를 조사했고 결국 음해성 투서였다고 확인했다. 그는 대통령으로부터 재신임을 받게 된다.

반기문 당시 장관은 본부대사로 있는 그에게 공석인 이라크대사 일을 제안했다. 그는 처음에는 이라크대사 자리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생명이 위험한 이라크에 왜 가느냐고 생각했다. 며칠 뒤 그는 전쟁터인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로 가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선교사 김선일씨가 이슬람 무장단체에 참수된 지 불과 6개월 후였다. 그렇게 되어 2004년 12월부터 2007년 2월까지 바그다드에서 근무했다. 장 목사는 “폭발물이 수시로 터지는 이라크에서 나는 새롭게 제조되었다”고 말했다.

“처음 이라크대사를 제안받고 거절한 다음날 새벽기도 때 자꾸만 이라크가 떠올랐다. 정말 이상했다. 마음을 바꿔 이라크로 가기로 했다. 나는 바그다드 부임 첫날부터 시내를 관통하는 티그리스강에서 처형당한 시신 100여구가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죽음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한국대사는 미국과 동맹을 맺은 나라의 대사이기 때문에 반미세력의 테러 목표물이었다. 언제 어디서 테러공격을 받을지 알 수 없었다. 대사관저 밖으로 나갈 때마다 앞뒤 양옆으로 무장경호 차량을 붙여야만 외출이 가능했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2005년 5월 일요일이었다.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집이 흔들리며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대사관이 공격을 받은 줄 알았다. 알아보니 500m 앞에서 자살폭탄 차량 두 대가 폭발했다. 500m 떨어졌는데도 집무실 유리창이 박살이 났다. 한번은 쿠르드족 장관을 만나고 헬기를 타고 바그다드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테러리스트들이 헬기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총탄의 섬광이 눈앞에서 번쩍거려 도무지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죽었다고 생각하며 기도했다. 그때 비로소 인생에서 교만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느꼈다. 절망과 죽음의 땅에서 회복과 소망의 빛을 찾았다. 이라크에서 제2의 인생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라크대사로 800일을 보냈다. 800일은 하루하루가 죽음과 삶의 갈림길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신에게 의지하며 힘든 시간을 견뎠다. 동시에 이라크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면 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라크대사 이전 과거 내 삶은 높은 데로만 지향하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게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 이라크 800일은 낮은 데로의 삶을 내게 일깨워주는 시간이 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출세를 하기 위해 남을 험담하고 비방하고 거짓말을 한다. 또 돈을 벌기 위해 남을 속이는 경우도 있다.”

이라크대사를 마지막으로 그는 2007년 5월 외교부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후 한동안 그는 이라크를 계속 드나들었다. 한·이라크 석유컨소시엄 회장을 맡아서였다. 한·이라크 석유컨소시엄은 석유공사, SK, GS칼텍스가 출자한 유전개발사업이었다. 목숨을 걸고 구축한 인맥을 바탕으로 그는 이라크를 다니며 유전개발사업의 토대를 만들었다.

그는 한·이라크 석유컨소시엄 회장을 맡으면서 2008년부터 매주 월요일 밤,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신학공부를 했다. 2011년에는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총신대 신학대학원은 경기도 용인의 양지에 있다. 본격적으로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 107회 대학원생 중 내가 최고령자였다. 400명의 동기생은 30대가 주류를 이뤘고 40대는 올드보이 취급을 받았다. 교수는 65세인 내게 ‘스승 같은 제자’라고 했다. 1학년생은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했다. 1학년 내내 젊은 친구들과 똑같이 하루도 안 빠지고 새벽기도에 참석했다. 젊은 사람들과 경쟁을 한다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과제를 하려면 잠을 4~5시간밖에 잘 수 없었다. 그때마다 ‘왜 내가 이걸 하고 있나’ 하는 회의가 몰려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참아야만 했다. 결국 평균 A학점을 받아 성적 장학금도 받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궁금해졌다. 부인은 남편이 편안한 노후를 즐기지 않고 애써 ‘고생길’로 들어서는 것을 뭐라 했을까. 남자가 나이가 들수록 아내 말을 거역하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만일 부인이 반대한다면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라도 쉽지 않은 법인데. 그는 웃으면서 부인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집사람이 ‘지금까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셨는데, 목회자가 되고 나서는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말아달라’고 했다. 나도 그러겠다고 했다.”

3년간의 신학공부를 마치고 그는 지난 4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현재 그는 장로교 왕십리교회 선교목사이다. 이와 함께 고등부 전도사와 장년부 전도사도 겸한다. 장 목사의 기억에 따르면 전직 대사 출신으로 목회자의 길을 걷는 사람은 임대택 전 튀니지대사, 이영현 전 오만대사 등 4~5명이다.

목사 안수를 받은 뒤 그는 낮은 곳을 찾아다니고 있다. 서울역 노숙자들의 쉼터를 찾아 설교를 하고, 정신질환이나 우울증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을 찾아가 위로한다. 20년 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다. 2개월 전에는 한국위기관리재단 대표를 맡아 재외 국민의 안전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기도 한다.

“지금에 와서 보면,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라크에 갈 때까지만 해도 목회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단 1%도 하지 않았다. 캐나다대사 시절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나 이라크대사로 나가 생사의 고비를 넘긴 것 모두가. 그래서 가끔은 내가 지금 엉뚱한 곳에 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웃음)”

외교관으로 승승장구할 때의 삶과 현재의 삶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목회자가 되기 전, 과거의 나는 나만의 만족을 찾는 삶이었다. 이제는 남의 아픔을 찾아 위로하고 보살피는 삶을 살고자 한다. 이 세상의 삶은 나그네의 삶이다. 한순간의 삶에서 영생을 살 수는 없다.”

그는 새로운 타입의 개척교회를 준비 중이다. 일요일만 여는 카페형 교회가 그것이다.

“한번은 고교 동기들 모임에서 설교한 후에 카페에서 신도들과 커피를 마시며 가족처럼 지내는 교회를 열고 싶다는 얘기를 지나가는 말로 했다. 그랬더니 가족이 운영하는 병원에 커피숍이 있으니 일요일마다 그곳을 쓰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별안간 꿈이 현실로 다가왔다.”

장 목사는 현재 11월 중에 친지와 지인 40여명을 초대하는 설립준비 예배를 준비 중이다. 성경 출애굽기 15장 27절에 나오는 ‘엘림’의 지명을 따서 강남엘림교회라는 이름도 지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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