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유기고,이야기들

나라 전체가 재난(災難) 구역인 내가 체험한 북한

작성자睦園.박이환(고10회)|작성시간22.11.07|조회수24 목록 댓글 0
나라 전체가 재난(災難) 구역인 내가 체험한 북한
통일은 북한동포 구원(救援)이며 여기에 사건·사고로부터의 해방도 포함된다.
이민복(대북풍선단장)     


  <항상 나라 전체가 재난 구역인 내가 체험한 북한>
  
  북한에서는 사회 재난을 사건사고라고 부른다. 사건사고는 어느 나라에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차이라면 얼마나 많게 또는 적게 일어나는가이다. 북한은 항상 나라 전체가 재난구역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건사고가 일어난다. 폐쇄 특성상 비공개, 공권력으로 알려지지 않게 덮으려 한다. 그럼에도 구전으로 급속히 퍼진다.
  
  1990년 8월 초, 매미소리가 자욱하고 소낙비 계절에 놀라운 전보를 받게 된다. 인민군에 간 건장한 남동생이 병사했다는 것이다. 혹시 한번 와 달라는 핑계가 아닐까 반신반의하며 떠났다. 부모가 세상 떠나도 휴가 가기 어려운 인민군이기에 상대가 통행증 내기 쉽게 이런 전보를 보내는 사례가 흔하다.
  
  북한의 유일한 여객 수단인 기차는 초만원이다. 할 수 없이 군인칸에 올라 전보를 보이니 서서 갈 수 있었다. 도착한 것은 평양-평강행의 마지막 역인 강원도 평강역이다. 여기서 수백 리 떨어진 철원군 대전리에 남동생 군부대가 있었다. 걸어갈 수가 없어 중국 지원군 묘가 곁에 있는 신작로의 초소에 부탁하여 화물차를 겨우 잡아 탈 수 있었다. 화물차는 대부분 군대 차이다. 남쪽으로 향한 신작로에 간간히 대전차 장애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다. 추후 탈북하여 남한에 오니 똑같이 북쪽으로 향한 길마다 있었다.
  
  비포장길에 75마력의 <승리58> 2.5톤 화물차는 느려터져 지나던 사람들이 잡아 타는 것이 보편이다. 한 군인이 달려오는 데 얼마나 맥이 없는지 보기 불쌍할 정도이다. 손을 잡아 끌어올렸는데 뼈가 앙상하다. 이런 몸으로 <일당백>의 영웅적 인민군이 될지 심히 우려스러웠다.
  
  신작로 곁의 옥수수밭마저 군인들이 원두막 쳐놓고 있었다. 왜 그런가고 물으니 중대마다 자업한 텃밭이며 군인끼리 도둑질이 심해 중대별로 경비를 배치한다는 것이다. 주민에 대한 도둑질은 보다 심해 인민군은 <마적단>이라고 한다. 군인이 마을에 나타나면 닭들이 까마귀보고 일제히 소리치듯 경계한다고 한다.
  
  타고 가던 화물 군용차가 고장이 나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도 동생 부대에서 지프차가 마중나왔는데 한참 달리다가 도로 옆으로 숨는다. 저 앞에 군용차가 도로 한 가운데 정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휘발유를 주지 않으면 비켜서지 않는다고 한다.
  
  1990년, 일선 부대도 식량난·유류난이 이 정도였다. 그 후 인민군도 아사되며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북한은 전쟁을 하고 싶어도 못한다. 힘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때부터 저는 느꼈다.
  
  남동생 부대에 도착해보니 동생 사망은 사실이었다. 잘 생기기도 하지만 항상 웃는 낯이고 성격도 착하고 좋아 부모님은 맏아들인 나보다 남동생하고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화승총(개인용 대공미사일) 분대장이었다. 여단 축구 선수였고 군사경기에서 수류탄을 가장 멀리 던진 선수일 만큼 건장하고 건강하였다.
  
  이런 남동생이 여기서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은 사인으로 죽었다. 수열병으로 인한 40도 이상의 고열자를 10일간 방치한 사망이다. 군대 병원에도 약이 없다. 약이 없으면 얼음찜질만 해도 죽지 않는다. 그런데 군부대에 겨우 한두 대 있는 냉장고가 잦은 정전으로 가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나 모범된 군인이었던 남동생의 사망은 군 지휘관들도 특별히 애석해 하였다.
  
  한편 위로차로 남동생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직접 본 례성강 다리 건설장의 사건사고를 말한다. 김일성 생일에 맞추어 완공하여 기쁨을 드린다며 규정을 어기고 공사를 강행한 결과이다. 제대로 굳어지지 않은 다리 위에 인해전술로 작업하던 한 개 대대가 무너지는 콘크리트 더미 속에 사상되었다는 것이다.
  
  총창에 찔리이듯 철근에 몸이 뚫린 채 매달려 살려 달라는 군인들, 콘크리트에 아래 다리가 압착되어 빼달라고 절규하는 군인들. 600마력 탱크로 끌어당겨도 움직이지 않는 구조물 속에 수많은 군인들이 속절없이 죽어갔다고 한다. 그 속에서도 정말 눈물이 나는 것은 불두덩에 털도 안 난 어린 병사의 시체를 치울 때였다고 한다.
  -
  직업특성상 북한 전지역을 출장다녔다. 1987년이다. 출장길에 온성-평양행을 놓쳐 다음 기차를 기다려 탈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나를 천행으로 살릴 줄이야. 먼저 떠난 열차가 신성천 역에 이르기 전 대동강 철교에서 탈선되었다는 것이다. 대동맥선의 철로이기에 하루만에 복구되어 지나가면서 그 장면을 직접 볼 수가 있었다. 부서진 교량과 아직도 강가에 널려 있는 시체들과 허옇게 널려 있는 옷가지들이 수없이 보인다.
  
  1981년이다. 외삼촌이 열차를 탔다가 다시 돌아와 말한다. 평남도 평성시 근처에서 기차가 탈선되어 겨우 살아왔다는 것이다. 자리가 없어 열차 복도에 서있는데 큰 충격과 함께 순식간에 날아가 떨어졌다. 아파 죽겠지만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몸통이 부서진 이들에 비해서는 엄살이어서 신음소리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안전원(경찰)이 출동하여 그 속에서도 도둑질하는 이들을 현장에서 사살하며 사고를 수습한다. 사고자들에게는 얼마간의 교통비를 나누어 주며 어디 가서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서약서까지 쓰고 왔다고 한다.
  
  1983년 함흥 출장길에서이다. 함흥역전에서 시내로 향한 사람 만땅의 버스를 타고 가는데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깨어진 유리가루와 먼지 속에 휩싸인다. 내가 앉은 바로 아래의 뒷바퀴 타이어가 터진 것이다. 먼지가 가시자 옆 좌석의 여인이 저를 보고 일 없는가고 걱정을 한다. 유리 파편에 여러 곳 상처가 낮지만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바퀴를 보면 그때 악몽으로 몸서리쳐진다. 이러한 사례는 북한에서 사건사고도 아니다.
  
  통일은 북한동포의 구원이며 여기에 사건사고로부터의 해방도 큰 자리로 포함된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