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치아노 <성령강림>, 1570년경, 유화, 베네치아, 구원의 성모 성당
궁륭형의 천장 아래 반원으로 뚫린 창이 있으며 그 창을 통해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찬란한 광휘를 내뿜고 있습니다. 그 찬란한 빛은 어둠 속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마치 혀의 모양과 같은 불길이 됩니다.
사람들 한가운데 비둘기에서 바로 수직으로 내려온 곳에 두 손을 모으고 눈을 하늘로 향한 성모님이 계십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 대부분의 시선은 그 성령이 오는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맨 왼쪽의 두 손을 하늘로 모으고 있는 사람과 오른 쪽 끝에서 두 팔을 대각선으로 벌리고 뒤로 넘어질 듯 무릎을 굽히고 있는 사람은 화면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기쁨에 넘친 모습을 생동감 있고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베네치아에 있는 구원의 성모 성당(S. Maria della Salute)에 있는 이 그림을 그린 티치아노는 베네치아의 르네상스의 정점을 이루는 동시에 바로크로의 전이(轉移)를 보여주는 화가입니다. 또한 그는 다채로움을 넘어선 호사스러운 색채와 철저히 계산된 화면 구성으로 ‘회화의 왕자’라 불리기도 합니다. 특히 신성 로마 황제인 칼 5세가 자신의 초상을 그리던 티치아노가 떨어뜨린 붓을 손수 집어준 일화는 그의 위력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출처 ; 기쁨을 전하는 사람 - 정은진)
6월 8일 (성령 강림 대축일)
“그리고 숨을 불어 넣어 주시며…”(요한20,19-23)
혜화동에 자리잡고 있는 대신학교의 교정은 지금 푸르른 녹음과 각종 꽃들의 향 내음, 여러 새들의 노래 소리로 계절의 아름다움을 화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귀공자와 같은 장끼(수꿩)의 현란한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연못에는 어쩌다 백로(白鷺)마저 날아와 둥지를 트려고 하니 새들에게도 낙산동산(駱山東山)이 그들의 서식지로써 매력을 주는가 보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마음을 배우며 자라나는 선한 눈망울의 신학생들이 사는 곳이기에 풀도, 나무도, 꽃도, 새들도 이들을 닮아 기뻐 용약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닐까?
동양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은 스스로 이루어 진 것임에 비해, 신앙인이 보는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아니 철두철미하게 하느님의 창조 위업 안에서 대자연을 보고 있다. 그러기에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은 ‘사랑을 얻기 위한 명상’ 에서 ‘어떻게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땅 위의 모든 피조물 안에 일하시고 수고 하시는지 생각할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무생물, 생물, 식물, 곡물, 가축 따위의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성장케 하시고, 감각하게 하심으로써 마치 일꾼처럼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것을 생각하고 내 자신에 반영해 볼 것이다.’(영신수련236) 라고 권고하신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성령(聖靈)” 에게 드리는 많은 칭호와 상징이 있지만 그 중에서 ‘하느님의 손가락’ 이라는 표현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 위업 안에서 성령의 역할을 잘 간직하고 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으니, 과연 하느님 나라가 당신들에게 와 있습니다.”(루가 11,20) 인간의 노동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제품들, 또는 예술가들이 이룩하는 작품들의 제작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작가의 생각과 구상이 먼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이 이데아(idea)를 완성하는 것은 그 분의 혼과 얼이 깃들여 있는 손놀림에서 가능하다고 볼 때 하느님의 예술품인 우주의 삼라만상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지혜의 손길이신 성령의 역사하심을 감지할 수 있지 않을까?
주님, 우리가 만나서 보는 이웃 형제들과 대자연의 아름다움 안에서 그리고 인간 지혜의 산물인 제품들 안에서 당신 성령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하소서!
(구요비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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