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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산 구암 병원 그가 군산 궁말에서 시작했던 진료소는 그후 병원으로 발전되었고 1899년에 알렉산더 의사가 왔으나 두 달이 못 되어 본국의 부친 별세 소식을 받고 급히 귀국할 때 청년학도 오긍선(吳兢善)을 데리고 들어가서 학비 등 일체를 담당해 주며 의학 공부를 하게 했다. 오긍선은 의사가 되어 귀국해 목포 병원을 위시해 구암 병원에서도 일했고 미션 기관의 병원에서 봉사하였으며, 후에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의 교수로 봉직해 마침내 교장이 되어 훌륭한 의학도를 양성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1904년에는 다니엘(Thomas Henry Daniel, 丹義烈) 의사가 구암 병원에 와서 병원을 건축하고 시설을 확장하여 본격적으로 의료 사업을 전개하다가 1910년에 전주 병원으로 옮겼고, 그 후임으로 패터슨(Jacob Bruce Patterson, 孫培焞) 의사가 부임해 7년 동안 병원을 확충하고 입원실을 온돌방으로 건·개축하였다. 특히 진찰을 정확하게 잘하므로 그 의술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여 구암 병원은 국내 유명한 병원 중 하나가 되었다. 그 다음 1924년에는 브랜드(Louis Christian Brand, 富蘭道) 의사가 내한해 구암 병원에서 농촌 순회 진료를 하는 등 복음 전파에 진력하다가 1930년에 전주 예수병원으로 옮겼다. 2) 전주 병원 1897년 해리슨 목사는 미국에서 의료 기술을 수련하고 내한했기에 전주 서문밖 은송리 초가집에 약방을 차리고 중하지 않은 일반 환자를 진찰하기 시작하였고 이로써 인심을 얻어 전도를 효과적으로 도왔다. 같은 해 11월에 잉골드(Mattie Barbara Ingold) 여의사가 전주로 파송되어 전주 은송리 작은 초가집에 여자 환자를 진찰하기 위한 진료소를 설치했다. 그녀가 오자 해리슨 목사는 환자 진료를 점차로 잉골드 의사에게 맡기고 자기는 일반 선교 사역에 전념했다. 한편 잉골드는 처음에는 여성 환자 만을 진료했는 데 여자 의사에게 진찰받기를 기피하던 남자들이 자기 아내의 치료를 위해 왔다가 자기 병도 진찰받기를 청원하므로 그들을 똑같이 진료하였다. 차츰 다른 남자들도 찾아와서 치료를 받았고 이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갔다. 또 병이 나은 사람들 중에 여럿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중 ‘백만’이라는 사람의 할머니는 점치는 복술인으로서 잉골드에게 병 고침을 받고 난 이후로 예수를 믿어 나중에는 전도 부인이 되기도 했다. 또 유경선 부인이 발목에 독종이 나서 위태로웠는 데 남편에게 업혀 와서 한 달 이상 치료하는 중 한글을 배우며 예수 믿고 온 집안 식구를 교회로 인도하는 등 선교에 큰 성과를 가져왔다. | ||||||||||||||||||||||||||||||||||||||||||||||||||||||||||||||||||||||||||||||||||||||||||||||||||||||||||||||||||||||||||||||||||||||||||||||||||||||||||||||||||||||||||||||||||
![]() 잉골드 선교사가 초기 전주병원(현 예수병원) 에서 진료하는 모습 |
잉골드 의사가 일하던 진료소는 점차 확장되어 오늘날의 전주 예수 병원의 모체가 되었다. 그녀는 당시 전주 선교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던 테이트 선교사와 8년의 열애 끝에 1905년 9월에 결혼하고 남편과 더불어 농촌 선교에 진력하는 한편 부녀자 성경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전주 병원은 1904년부터 포사이드(Wiley H. Forsythe, 保衛廉) 의사가 와서 열성적으로 전도와 치료에 전념했다. 1905년 3월 어느날, 포사이드는 전주에서 군산 방면으로 60리 떨어진 완주군 봉동읍 만동(蔓洞)에 사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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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사이드는 상처가 잘 낫지 않으므로 1906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은 후 1907년에 다시 한국에 와서 목포 병원에 파송되어 의료와 전도 활동을 계속했다. 1907년부터는 독일인 버드만(Ferdinand Henry Birdman) 의사가 전주 병원에 와서 1909년까지 진료를 담당하다가 함경도에 있는 미국인 광산 부속병원으로 떠나자 군산에 있던 다니엘 의사가 1910년에 전주 병원으로 옮겨와 병원과 진찰소를 벽돌집으로 확장 건축하고 밀려오는 환자를 수천 명 치료했다. 다니엘 의사는 1916년 3월 서울 세브란스 의학교로 옮겨 교수로 일하다가 1년 후에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1915년 한국에 들어온 로버트슨(Moor Owen Robertson, 羅培孫, 羅彬孫) 의사가 1916년에 전주에 와서 1922년까지 병원 진료와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3) 목포 병원 1896년 오웬은 한국에 올 때 의사로 와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목사로 전환했다. 그는 벨 목사와 함께 목포 선교부를 개설하고 진료소를 설립해 환자를 진찰하면서 전도에 열중하던 중 1900년에 북장로회 의료선교사인 화이팅(Georgiana Whiting) 여의사와 결혼해 농촌 의료 선교를 열심히 하다가 1904년 12월에 벨 목사와 함께 광주 선교부 설립을 위해 목포를 떠났다. 그는 개인 전도는 물론 많은 교회 개척에 진력하던 중 결국 과로에 폐렴이 겹쳐 고생하다가 1909년 4월 3일에 별세했다. 그의 부인은 그대로 한국에 1923년까지 머물며 이 고장 의료 선교를 담당했다. 오웬 선교사가 광주로 옮겨간 후 목포 병원에는 놀란(Johseph Wynne Nolan) 의사가 와서 진료를 담당하다가 1904년 광주 선교부로 옮겼고 거기에서 1년 6개월 근무한 후 평안도 운산에 있는 미국인이 경영하는 운산 금광 진료소로 떠났다. 그후 버드만(Ferdinand Henry Birdman) 의사가 1년 동안 진료했다. 그는 건강 악화로 치료 차 전주 병원에 갔다가 귀국했다. 다시 그 후임으로 하딩(Harding, Maynard C. 하진) 의사가 왔으나 1년을 근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때 치료 차 귀국했던 포사이드 의사가 건강을 회복해 1907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목포 병원의 진료를 담당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칭송받던 그는 1905년에 받은 상처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1912년에는 아주 귀국해 1918년에 별세했다. 1912년 리딩햄(Roy Samuel Leadingham, 韓三悅) 의사가 오게 되자 그 때까지 목포 병원을 맡고 있던 오긍선은 서울 세브란스 의학교 교수로 가게 되었다. 1914년 목포 병원은 병원 조수의 실수로 알코올 통에 불이 붙어 화재로 병원이 전소되었다. 리딩햄(한삼열) 의사의 활약으로 미국의 프렌치와 성요셉교회 교인들이 의연금(1만원)을 보내와 2층 석조 건물로 다시 훌륭하게 신축하였고 매일 찾아오는 많은 환자로 병원은 활발하게 운영되었으며 목포 지방의 의료 선교 사업은 날로 발전되어 갔다. 4) 광주 병원 1904년 선교사 벨 목사와 오웬 의사가 목포에서 광주로 이사와 광주 선교부를 맡게 되었고 목포에 있던 스트레퍼 여선교사도 광주로 옮겨왔다. 목포 병원에서 일하던 놀란 의사는 광주로 와서 1905년 11월 20일부터 벨 선교사의 집에서 진찰소를 열고 진료를 시작하며 진료소 건축을 하며 1년 반 동안 근무하다가 사임하고 평안도의 미국인이 경영하는 운산 금광 진료소로 떠났다. 1908년부터는 윌슨(Robert Manton Wilson, 禹一善, 禹越遜) 의사가 와서 광주 병원을 운영하던 중 1911년에 미국에 있는 그레이엄(Graham) 장로가 자기의 죽은 딸을 기념하며 일만 원을 기부하므로 그녀의 이름을 붙여 ‘엘렌 레빈 그레이엄(Elen Ravine Graham) 기념병원’을 크게 건축하였다. 장기간 성심으로 병원을 경영하던 중 1912년에는 나병원을 설립해 나환자를 치료했고 또 치과를 개설하고 폐결핵 환자 요양소도 설치해 결핵 예방에도 공헌하였다. 순천 지방에까지 순회 진료를 하며 전도 사업을 하다가 여천군 율촌에 애양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5) 순천 병원 1912년에 전주 병원에서 근무하며 우리말 공부를 하고 있던 티몬스(Henry Loyola Timmons, 金로라) 의사는 1913년에 순천 진료소를 열고 환자를 진찰했으나 환자가 많아지므로 1915년에 현대식 건물로 병원을 건축했다. 티몬스 원장이 건강 관계로 미국에 돌아갔을 때는 광주병원의 윌슨 원장이 겸무를 하며 의료 선교 사업에 지장이 없게 운영하였다. 티몬스는 1922년에 한국에 다시 와서 전주 예수 병원장으로 수고하다가 1926년에 아주 귀국했다. 순천 병원에는 1917년부터 로저스(James McLean Rogers, 魯宰世, 노재수) 의사가 부임해 간호실, 전염병실 및 기타 설비를 확충하고 건물도 4층으로 증축했다. 특히 극빈 환자들의 치료에 심혈을 기울여 그의 별명을 ‘노제세(魯濟世)’라고 불러 불신인들에게도 칭송을 들었다. 일제 말기 강제 출국 때까지 순천에서 의료 선교 사역과 전도 사업을 계속했다. 6) 나병원 1909년 광주의 오웬 선교사가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포사이드(보위렴) 의사가 그를 진찰하기 위해 목포에서 말을 타고 광주로 오는 도중 길에 누워 있는 여자 나환자를 보고 불쌍히 여겨 자기 말에 태우고 광주로 데려왔다. 그러나 수용할 곳이 없으므로 벽돌 굽는 가마에 그녀를 두고 정성껏 돌보며 치료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선교사들이 특별 모금을 해 우선 세 칸 집을 짓고 그녀를 수용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나환자들이 모여 들었고 이에 선교사들은 45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나환자 병동을 건축했다. 광주 기독 병원장 윌슨 박사가 이 병원장까지 겸했고 병원을 더 크게 건축해 모여드는 나환자를 수용하고 치료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유명한 병원이 되었다. 한편 1921년 광주 병원을 거쳐 1927년에 순천 병원으로 옮긴 엉거(James Kelly Unger, 元佳理) 의사가 순천 지방에도 나병원을 설치해 줄 것을 선교부에 청원한 것이 허락되어 1928년 광주 나병원과 합병해 순천 지방 한 곳에 큰 나병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엉거(원가리) 의사와 광주의 윌슨(우일선) 원장의 민첩한 활동과 정성을 다한 노력으로 나환자 천국이라 불리는 여수 애양원과 소록도 요양원이 이루어졌다. (2) 학원을 통한 교육 선교 사업 한국의 개신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던 선교 초기에, 의식 있는 사람들은 예배당 건물을 세우면서 대개 교육 기관도 함께 세웠다. 당시 신문화에 대한 선각자였던 교회 유지들의 교육 목적을 살펴보면 첫째, 한국인으로 하여금 더 나은 자주 국민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고, 둘째, 한국인이 자기 나라 문화에 대해 긍지를 가지도록 하며 이를 지킬 때 외부로부터 어떠한 도움을 받지 않고 자주적 정신과 자율 행동으로 각각 연보하기를 힘쓰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몸으로라도 나가서 참여함으로써 자신과 사회와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가진 자유인을 양성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그 당시 각 선교사회에서도 적극적인 협력을 하며 직·간접으로 학교를 세우는 일과 경영하는 일에 참여했다. 각 지방 교회에서도 교육 시설을 세우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위와 같은 교육 목표 덕분에 이후 일제 침략하에서 기독교 학교는 민족 정신을 보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 기독교회 역사상 1886년(미국 개신교회의 두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온 지 1년이 되었을 때) 미국 북감리회 아펜젤러 선교사의 배재(培材)학당, 스크랜턴(Mary F. Scranton) 여선교사의 이화(梨花)학당 설립을 위시해 1887년에 서울 새문안의 선교부에서 구세학당(救世學堂)을 설립하고 송순명(宋淳明)·안창석(安昌錫)·김유순(金裕淳) 등 몇 사람의 학도를 모집해 윤치경(尹致景)·목원홍(睦源弘)이 교수한 것이 한국 교회 교육의 창시였다. 또 1887년에 북장로회 선교사회에서 서울 연지동에 여자 교육 기관을 창설해 연동(蓮洞)여학교를 시작했고, 다음해 새문안 교회에는 영신학당(永信學堂)을 설립하여 경영했으며, 같은 해 평북 용천군(龍川郡) 신창(新倉) 교회와 정주읍(定州邑) 교회와 박천군(博川郡) 남호(南湖) 교회에서는 사숙(私塾)을 일으켜 교회 교육을 시작한 것이 점차 확장되어 학교로 설립되었다. 이렇게 한국 선교 초기에 교회들은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경향 각처에 교육 기관을 설립했다. 1898년에는 평양 부중 교회와 평북 의주군 남산 교회에서도 학교를 세웠고, 1900년에 평북 의주읍 교회·선천읍 교회·박천읍 교회·황해도 황주군 용연 교회에서도 사숙을 시작하여 교회 교육을 발전시켰다. 이상의 모든 학교는 각 지방 교회에서 자율적으로 설립되어 민족 교육을 담당했는 데 선교부의 주도로 재정과 교사를 갖추어 학교를 설립하고 경영하게 된 학교 중 전라노회 산하의 유수한 학교의 설립 내력을 살펴보자. [표 3] 초기(1885~1909)선교사들의 학원 건립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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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흥 학교 1899년 해리슨 선교사가 전주 선교 초기 주일에 소년 몇 명을 따로 모아 교회 교육을 시켰고 주중에도 그의 어학 선생과 더불어 8명의 소년을 교육하였다. 1900년부터는 레이널즈 선교사를 설립자로 하여 그 사택에서 그 부인(Patsy Bolling)과 함께 교과 과정을 정해 가르쳐왔다. 1907년 3월에는 교육을 담당할 선교사로 니스벳(John Samuel Nisbet, 柳瑞伯) 부부가 전주로 파송되어 와서 정식으로 학교를 운영하며 교사로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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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슨 부인과 최중진(崔重珍)·김명식(金明植)·김필수(金弼秀) 등이 수고했고, 1908년에 교명을 신흥학교로 명명했다. 1909년에 한국 선교 후원자인 그레이엄(C. E. Graham)의 기부금으로 2층 벽돌 건물을 신축했으며 역대 교장으로 니스벳· 레이널즈·해리슨·에베솔·린턴이 시무했다. 2) 기전 여학교 1902년부터 매티 테이트는 12명의 소녀들을 모아 자기 집에서 주간(週間)에 두 번씩 교회 교육과 일반 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04년 전킨 선교사의 전주 부임 이후, 그 부인(Mary Leyburn)이 교육을 담당하였고, 다시 1907년 2월에는 교육 전문가인 랭킨(Nellie Beekwith Rankin, 엄언라) 여선교사가 파송되어 와서 본격적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그녀는 학교를 교육의 본궤도에 올려놓기도 했거니와 서문밖 교회에서 소아회(小兒會)라는 명칭으로 소년·소녀 주일학교 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기도 했다. 그는 열심히 활동하던 중 불행하게 병에 걸려 1911년 8월 13일 이 고장에서 별세했다. 학교의 이름을 기전(紀全)으로 한 것은 학교 설립 초기 힘써 일하던 전킨 선교사가 이곳에서 1908년 1월에 병으로 별세하였으므로 이를 기리어 ‘전킨을 기념한다(紀全)’는 뜻으 정한 것이다. 랭킨 다음으로 바크랜드(S.M.Bakland, 朴世理)와 콜턴(Colton Susanne Avery, 孔貞純) 여사가 역대 교장으로 시무했다. | ||||||||||||||||||||||||||||||||||||||||||||||||||||||||||||||||||||||||||||||||||||||||||||||||||||||||||||||||||||||||||||||||||||||||||||||||||||||||||||||||||||||||||||||||||
![]() 초기의 기전학교 학생들과 선교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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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흥(永興) 학교 목포에서 여성 교육이 시작되자 1902년 9월 1일 양동 교회 이남규는 남학교를 설립하였다. 1903년에 내한해 목포 지방으로 파송되어 온 프레스턴 선교사가 1905년부터 교장으로 취임하고, 1908년에는 그의 활동으로 학교 교사(校舍)를 근대적 석조 건물로 신축하고 기구를 확충했다. 한편 프레스턴 선교사는 목포를 중심으로 해남·강진 지방에 교회를 개척 설립했다. 그후 광주로 이전해 숭일학교 초대 교장이 되어 교육선교에 진력했다. 5) 숭일(崇一) 학교 광주 선교와 더불어 1907년 벨 선교사는 처음에는 광주 선교부 직원의 자녀와 교인 자녀들을 자기 집에 모아 놓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목포에서 학교 교육과 일반 선교를 담당하던 프레스턴 선교사를 광주로 불러와 학생 교육을 담당하게 하며 오웬 선교사와 함께 광주 선교부 일을 맡게 하였다. 그간 배유지 선교사가 임시 교장으로 있던 남학교를 1908년 2월에 학교 이름을 숭일(崇一, ‘하나님 한 분만 섬긴다’는 뜻)로 하고 프레스턴 선교사가 초대 교장에 취임했다. 그의 활약으로 1909년에 교사 건물을 기공해 4층 건물을 준공하고 점차 발전했다. 6) 수피아(須彼亞) 여학교 광주에 옮겨 온 벨 선교사는 교육 선교 사업에 착수해 남학생들을 모아서 가르쳤고 한편 자기 집 사랑채에서는 자기 부인(Magaret Bell W.)이 소녀들을 따로 불러모아 교육을 개시하였다. 1907년에 목포에서 옮겨와 광주 선교에 합류한 프레스턴 선교사의 부인(Annie Preston S.)이 또 이를 도왔다. 1908년 봄에는 여학교가 정식 인가를 받았고 1909년에는 교육 전문 선교사인 그레이엄(엄엘라) 여선교사가 교장에 취임했다. 1911년에 그녀의 활동으로 미국 스턴니 스피어(Sternsnee Speer) 여사의 기부금으로 3층의 교사를 짓고 교명은 기부자의 뜻에 따라 수피아여학교(Jennie Speer memorial Girls School)로 이름하였다.
7) 영명(永明) 학교
군산에서는 1900년에 교회가 시작되었다. 이때 전킨 선교사의 부인이 주일학교 교육의 연장으로 집에서 아이들 3∼4명에게 성경 교육을 시켰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일반 기초 교육도 실시했는 데 바로 이것이 학교의 시작이라 하겠다. 학생이 증가되자 1902년에는 전킨 선교사를 설립자 겸 교장으로 해 군산 궁말(구암동) 선교 기지에 5∼6칸의 집을 세우고 소년들을 모아 교육을 시작했다. 교사로는 전킨 선교사와 다른 선교사들, 장인택 조사, 양종국, 그리고 때 마침 공주에서 이사 온 교인 오인묵 등이었다. 전킨 선교사가 전주로 옮겨 간 이후는 불·해리슨 선교사에 이어 이얼(Alexander Miller Earle, 어아력, 魚목사) 선교사가 학교책임자가 되어 미국 교회의 보조를 받아 학교 건물을 3층으로 신축했다. 지방에서 오는 학생을 위해 기숙사를 건축해 운영하니 많은 학생들이 찾아왔다. 이 학교는 군산과 충청남도 일대에서 건실한 교사들이 청소년을 가르쳤던 곳으로 기독교와 민족 의식 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8) 메리 볼딘 여학교
전킨 선교사는 군산 선교를 전개하면서 먼저 영명학교를 시작하였고 그의 부인(Leyburn Junkin Mary)은 인근 동리 가가호호를 심방해 소녀들을 오게 하여 자기 집에서 따로 가르쳤다. 이것이 여학교의 시작이었다. 1904년 전킨 선교사가 건강 관계로 전주로 가게 되자 1900년에 군산에 와서 불 선교사의 부인이 된 앨비(Libbie Elizabeth Alby) 여선교사가 여학교를 맡아 운영하는 중 자기 모교회(버지니아 렉싱턴 장로교회)와 미국의 메리 볼딘(Mary Baldwin) 대학에 학교의 건축 보조를 호소하자 교회와 그 대학의 학생들과 졸업생들이 모금 운동을 펴서 건축 기금을 보내왔다. 이로써 구암동 선교기지 내에 3층 벽돌 건물로 교사를 신축할 수 있었다. 그 때 교사 건축을 위해 미국의 학생들이 끼니를 걸러가며 성심으로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매월 학교 운영비로 1,000달러씩 보내주는 것을 기념해 학교의 이름을 메리 볼딘 여학교라고 하였다. 교사들은 옆에 있는 영명학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와 민족 교육에 전념했다. 이외에도 1904년 서울 상동(尙洞)교회에서 전덕기(全德基) 목사의 청년 학원(新民會-安昌浩가 주도한 구국 운동 체의 훈련 기관), 도산 안창호의 대성 학교(大成學校, 평양), 이승훈(李昇薰)의 정주 오산 학교(五山學校)를 비롯, 황해도 안악, 평안도 선천, 충청도 한산에 김인전(金仁全)이 설립한 한영 학교(韓英學校) 등 민족을 깨우치는 사학(私學)교육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일본도 시인하고 있었듯이 기독교야말로 ‘是實로 今日의 新敎育制度의 淵源’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 사학이 기독교와 민주주의 정신과 민족 의식을 배양하여 한국 교회의 외부에 펼치려는 목적을 이루었던 것이다. 남장로회 선교부 지역인 호남 지방에서도 1903년에 익산군 고내리(益山郡 高內里) 교회에서 학당을 설립하고 교인 자제를 교육했고 뒷날 학부(學部)의 인가를 받아 정식 학교로 설립해 많은 젊은이들을 양성하였다. 1905년에는 충남 서천군 구동(九洞) 교회와 부안군 대수리(大水里) 교회에서도 소학교를 설립했고, 김제군 월성리(月成里) 교회에서는 남학교를 세웠으며, 1906년에는 김제군 두정리(豆亭里) 교회에서 용광(鏞光)학교를 설립해 청소년 교육을 실시했다. 1907년 1월, 한국 기독교 역사에 기억될 대부흥운동이 평양 장대현(章臺峴) 교회에서 불붙기 시작해 교세가 요원(遼原)의 불길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장되었다. 그해 9월 17일에는 역시 같은 예배당에서 전국 각 지역의 대표들이 모여 미국 남·북장로회와 캐나다 및 호주 장로회 등 네 교파의 선교사들이 합력해 단일 조선예수교장로회(독노회)를 비로소 조직하게 되었다. 초창기 독노회 안에 전국 각 지역을 나누어 7개 대리회(平北·平南·咸鏡·黃海·京忠·慶尙·全羅)를 조직하니 남장로회 선교부 지역인 전라 대리회 지방 안에서는 각처에 교회와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다. 1907년에는 광양군(光陽郡) 신황리(新黃里) 교회와 장성군(長城郡) 영신(永信) 교회에서 소학교를 설립하고 1908년에는 보성군(寶城郡) 이만리(貳萬里) 교회에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순천 경내의 교육 사업 전개에 촉진제가 되기도 했다. 1909년 전주군 삼례 교회에서 영흥(永興)학교를 세웠고 익산군 동련(東蓮) 교회에서는 계동(啓東)소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나주군 방산리(芳山里) 교회에서도 소학교를 설립했다. 서문밖 교회에서는 서문 안에 여자 소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다가 경영이 확실한 기전여학교에 인계했다. 1910년 전주군 제내리(堤內里) 교회는 함녕(咸寧)소학교를 세웠고, 옥구군 구암리(九岩里) 교회와 군산 개복동 교회가 연합해 안락(安樂) 소학교를 세우고 경영하다가 구암 영명(永明)학교에 인계했다. 같은 해에 화순 대포리(大浦里) 교회에서는 영창(永昌)학교를 세웠다. 1910년 8월 한일 합방조약에 조인함으로 민족적 비운을 겪게 되는 데 기독 교회에서는 전국적으로 100만명 구령운동을 전개하여 각 교회들이 대대적인 전도 운동을 펼쳤다. 이 기간에도 교회는 민족이 배우고 깨어야 산다고 계도하며 각지에서 학교 설립 운동을 계속했다. 1912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의 지방 대리회에 불과했던 교회 조직이 7개 노회(평북·평남·함경·황해·경충·경상·전라)로 확장 개편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창립 전인 1911년 10월 11일에 전주 서문밖교회에서 전라 노회가 창립되었다(노회장 마로덕, 서기 이승두, 회원 목사 13명, 장로 19명). 이와 같이 교회 조직이 확장되자 각 지교회들은 전도와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전국 각처에서 남녀 학교를 계속 설립하며 인재 양육을 도모했는 데 전라 노회 산하 교회에서도 자발적으로 협력하였다. 1913년 광주군 송정리(松汀里) 교회에서 남선의숙(南鮮義塾)을 설립해 가난한 학생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고 1915년 전주군 삼례(參禮) 교회에서 경영하던 영흥(永興)학교는 증축 후 교명을 영신(永新)학교로 변경해 일백 명의 학생을 교육했다. 익산군 고현리(古縣里) 교회에서는 여자 소학교를 설립해 50여 명을 교육했고 대붕리(大鵬里) 교회는 부용(芙蓉) 학교를 설립해 많은 학도들을 교육했다. 1916년 광주군 봉선리(鳳仙里) 교회와 장성군 소룡리(小龍里) 교회에서 각기 소학교를 세우고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7년 나주군 삼도리(三道里) 교회에서는 기독교 광명의숙(光明義塾)을 설립했다. 같은 해 9월 2일, 총회 개최지인 경성 승동 예배당에서 임시 전라 노회를 열고 그 동안 전라도의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노회 분립안을 논의한 후 분립 청원을 하니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는 전라 노회를 전북 노회와 전남 노회로 양분할 것을 결정해 1917년 9월 20일에는 전남노회가 목포 양동 예배당에서 창립되었다(회장 유서백, 서기 김영국, 회원 목사 10명, 장로 13명). 역시 같은 해 10월 10일 전주 서문밖 예배당에서 전북 노회가 창립되었다(회장 이원필, 서기 홍종필, 회원 목사 15명, 장로 20명). 1918년 임실군 옥정리(玉井里) 교회에서는 남·여 소학교를 세워서 가르쳤고 1919년 전주군 고산읍 교회와 김제군 난산(卵山) 교회는 각기 남녀 소학교를 설립해 신자의 자녀 교육을 맡았다. 1920년 정읍군 천원 교회에서는 은성(恩成)소학교를, 임실군 삼길(三吉) 교회에서는 양춘(陽春)소학교를 세우고 경영하다가 경제난으로 한때 문을 닫았으나 이후 유지들의 찬조로 다시 운영할 수 있었다. 1921년 익산군 남전리(南田里) 교회에서는 신성(信成)소학교를 설립해 70여 명의 어린이를 가르쳤고, 1922년 익산군 장등(長登) 교회와 전주군 밀파리(密波里) 교회와 남원군 신풍리(新豊里) 교회도 각기 소학교를 세워서 많은 어린이들을 교육했다. 1923년 전주군 남문밖(南門外) 교회에서도 소학교를 설립해 남학생들을 가르쳤고, 군산 개복동 교회에서도 영신학원(永信學院)을 세우고 보통과 생도 1·2학년 70여 명을 모아 가르쳤다. 1904년의 선교 보고서에 의하면, 전주·군산·목포 등 세 선교부 내에 각기 남·여 중학교가 하나씩 설립되었고 그 학생 수는 126명이었다. 그러나 3년이 경과한 1907년에는 인가받은 정식 학교가 44개교였고, 학생 수는 497명이며, 3년이 경과한 1910년에는 64개교에 1,740명의 학생 수를 보이고 있다. 1910년 한일 합방 당시 그 동안 정부 인가의 사립학교 총수는 2,250여 개교였는데 장로회 계통이 501개교, 감리교 계통이 158개교, 가톨릭 계통이 137개교, 기독교 계통이 796개교였다. 이때 교회가 사회 교육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기울여 투자에 힘썼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915년에 조선 총독부가 사립학교 규칙을 제정·발표하고 기독교 교육을 억제하기 위해 단속을 강화함으로 인해 정식으로 인가받은 학교의 설립이 주춤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