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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광해군에 대한 글입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작성자집시|작성시간21.12.17|조회수30 목록 댓글 0

광해군에 대한 글입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재평가가 필요한 역사 인물 1위 광해군

1.왜 지금 광해군인가?

風吹飛雨過城頭(풍취비우과성두)
바람 불어 빗발 날릴 제 성 앞을 지나니

瘴氣薰陰百尺樓(장기훈음백척루)
습하고 역한 공기 백 척 누각에 자욱하네

滄海怒濤來薄幕(창해노도래박막)
창해의 성난 파도 저녁에 들이치고

碧山愁色帶淸秋(벽산수색대청추)
푸른 산의 슬픈 빛은 가을 기운 띠고 있네

歸心厭見王孫草(귀심염견왕손초)
가고픈 마음에 봄 풀을 실컷 보았고

客夢頻驚帝子洲(객몽빈경제자주)
나그네 꿈은 제주에서 자주 깨었네

故國存亡消息斷(고국존망소식단)
서울의 친지는 생사 소식조차 끊어지고

烟波江上臥孤舟(연파강상와고주)
안개 낀 강 위의 외로운 배에 누웠네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삼전도의 굴욕’이 있던 1637년 제주에 유배 온 광해군이 읊은 시다.

조선 시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유일한 왕인 그는 19년의 긴 유배생활 가운데 1637년부터 1641년까지 4년여를 제주도에서 보냈다. 그가 생을 마감한 곳도 제주도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거의 유일하게 대의명분보다 실리와 국가 안위를 우선했던 광해군,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세력 판도를 바꾸고 국제질서를 뒤흔든다. 특히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만나고, 주변이 강국으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에게 '외세와의 관계 문제'는 민족이 살아남느냐 소멸하느냐의 생존의 문제다.

총칼 없는 미·중 패권 싸움이 본격화되고 있는 지금 명·청(明·淸) 교체기에 조선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미·중 격돌을 피해갈 수는 없다. 미국과의 굳건한 동맹이 우리 외교의 근간이지만, 중국과 척을 질 수도 없다.

명에 부단히 사신을 보내고, 후금에 투항한 역적과도 밀서를 주고받으며 정세 변화를 읽었던 혜안과 전략적 발상의 광해군,

세력 전환기의 한가운데 들어앉은 지금의 현실에 그의 전략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소중한 거울이냐 아니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위험한 거울이냐 지금도 끝없는 논쟁에 휩싸여 있는 광해군을 통해 우리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살펴본다.

2.광해군묘

숲속의 비탈에 위치하여 음침한데다 사설 공동묘지(영락교회)의 철조망 문을 도둑처럼 열고 들어가야 볼 수 있는 광해군묘,

왕릉을 참배하려면 대개 '올라가야' 하는데 자물쇠가 달린 녹색 철문을 열고 능선을 '내려와야' 참배할 수 있는 광해군묘,

''광해군묘는 조선 제15대 임금인 광해군과 왕비 문성대원군 유씨의 묘이다. 광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 1608년 왕위에 올라 재위 중에 외교·문화 등에 많은 치적을 남겼으나 당쟁에 휘말려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폐위된 후 강화를 거쳐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인조 19년(1641) 67세로 돌아가셨다. 부인 유씨는 인조반정으로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 인조 원년(1623) 유배지인 강화에서 돌아가셨다. 묘는 대군의 예에 따라 장사를 지냈기 때문에 뒤에는 석물이 없고 앞에 비석·상석·망주·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연산군묘와 함께 '유이'하게 조선의 왕릉 중 유네스코 지정문화재에 빠져 있고, 대신 1991년 사적 제363호로 지정된 광해군묘의 비석에 있는 글이다.

''재위 중에 외교·문화에 많은 치적을 남겼으나 당쟁에 휘말려 인조반정으로 쫓겨났다.''

''반정(反正)'', ''춘추와 사기의 '발난세반제정(撥亂世反諸正)'에서 따온 말로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아간다는 뜻.''

결국 그의 묘비명을 보면 외교와 문화에 많은 치적을 남긴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인조의 즉위를 '정란(靖難)'이 아니라 '반정(反正)'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따라서 아직 확실한 복권은 되지 않은 것이다.

예컨대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친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을 '세조반정'이 아니라 '계유정난 (癸酉靖難)'으로 부르듯이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는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3.임진왜란 때의 분조(分朝) 활동

당시 세계 최강 육군 일본과 세계 최강 해군 조선이 맞붙은 7년간의 국제전쟁 임진왜란,

참혹한 전쟁으로 온 나라는 폐허가 되었고 숱한 사람이 죽었지만 전쟁을 막지도, 전쟁 동안 민중을 보살피지도 못한 왕과 조정은 건재하였던 역설적 전쟁 임진왜란,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의병, 명군의 참전 등 전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 중에 꼭 포함시켜야 할 것이 바로 광해군의 분조활동이다.

분조란 말그대로 조정을 나눈다는 뜻인데 선조가 머물던 평양이나 의주 외에 전쟁극복을 위해 광해군이 주도하던 조정을 말한다.

그는 전쟁기간 중 평안도나 강원도 등을 돌며 민심을 수습하는 것은 물론 경상도나 전라도 등지로 내려가 군량을 모으고 군비를 조달하는 등 상당한 공로를 세웠는데 그의 분조활동이 임란극복의 주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는 점에는 거의 견해가 일치되어 있다.

무엇보다 선조가 분조를 설치한 이유가 광해군만 위험한 국내에 남겨두고 자신은 장차 요동으로 망명(도망)할 목적이었으니 전쟁 후의 선조의 콤플렉스를 충분히 알 수 있겠다.

참고로 왜란이 끝난 뒤 정탁, 윤두수, 이항복 등 광해군 분조에 호종하여 공이 있는 사람에게 '위성공신(衛聖功臣)'을 책록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폐삭(廢削)되었는데, 아무 한 일도 없는 선조를 따라간 '호성공신(扈聖功臣)'과 비교하면 균형이 전혀 맞지 않는다.

4.위협받는 세자 지위

중종(中宗)의 서자였던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로 조선왕조에서 왕의 직계가 아닌 왕실의 방계에서 처음 왕위를 계승한 조선 제14대 왕 선조,

치세 초기에는 안정적인 국정 운영과 백성을 위한 정치, 탁월한 인재 등용으로 ‘목릉성세(穆陵盛世)’로 불렸지만, 왜란 후 무능하고, 어리석고, 사리분별을 하지 못해 나라와 백성을 위기에 빠뜨린 ‘암군(暗君)’으로 평가되는 선조,

전쟁 중 그는 광해군과 신료들의 자세를 떠보기 위해 15번이나 선위소동을 벌이는데 태종 등 조선의 거의 모든 왕들이 선위소동을 벌인 적이 있지만 그는 그 도가 지나쳤다.

선위소동은 무능한 선조가 나름대로 생각해낸 절묘한 생존술이었지만 이런 명석한 두뇌(?)를 국가발전이나 백성들을 위해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 후 엎친데 덮친격으로 1602년 51세인 선조는 당시 광해군보다 9살이 어린 19세의 처녀와 국혼을 하는데ᆢ

흔히 광해군에게 부친과 아들을 잃은 불쌍한 폐모로 평가되지만, 광해군의 실질적 정적이었으며, 또 인조반정에도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한 왕실의 만만치 않은 여인이었던 인목대비,

그녀는 광해군과는 운명적으로 악연을 맺기 위해 나타난 여인이었다.

1606년 드디어 선조와 그녀 사이에 왕자가 태어나는데 후계자로서 하자가 전혀 없는 적자 영창대군이다.

평소에 광해군을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선조는 영의정 유영경 등과 함께 어떻게든 세자를 바꾸어 보려고 하였으나, 행운의 여신은 광해군 편을 들어 1608년 선조가 승하함으로써 광해군은 우여곡절끝에 결국 왕위에 오르게 된다.

5.왕이 된 후의 광해군의 정치

조선 역사상 전쟁을 몸소 치르고 그 복구까지 맡은 유일한 왕 광해군,

그는 7년이나 지속된 전쟁을 최전선에서 실질적인 지휘자로 몸소 겪으며 철저히 유린된 국토와 피폐한 민생을 일으켜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갖게 된다.

아울러 비록 패전으로 물러갔지만 일본의 실력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세계를 좌지우지해 온 명나라의 실체도 파악할 수 있었으며, 명의 간섭을 뚫고 동북아시아의 새 강자로 일어서는 여진족의 실체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위와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왕이 된 그는 어떻게 하면 나라와 백성을 일으킬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하는데ᆢ

"어리석고 사리판단도 할 줄 모르는 내가 나라의 대업을 이어받긴 했지만 나는 지혜도 모자라고 현명하지도 않다. 깊은 못과 살얼음을 건너야 하는데 건너갈 방법을 모르듯, 지금 당장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시급하게 인재를 불러모아 나랏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선비들은 의견이 달라 서로의 차이를 조정할 길이 없고, 서로 마음을 다해 공경과 화합을 이루려는 미덕도 찾아볼 수 없다. 그대들은 모두 뛰어난 인재들이다. 필시 마음 속에 북받쳐 오르는 뜻을 품고 있었을 테이니, 저마다 자기 생각을 다 표현해 보라. 내가 직접 살펴보겠다."

즉위 3년째인 1611년, 그가 직접 출제한 과거의 시제다.

한편 쫓겨난 군주들에 대해 서술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자료의 편파성, 이른바 승자의 역사왜곡과 흔적지우기다.

실록을 읽을 때는 사실(fact)을 기술한 부분과 사관(史官)의 의견(opinion)을 개진한 부분을 분리해서 읽지 않으면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뜻이다.

광해군의 업적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닌 것, 따라서 이하에서는 어떠한 주관적 가치판단 없이 객관적 사실만 나열해 본다. 광해군을 긍정평가 하는 쪽이나 부정평가 하는 쪽이나 모두 인정하는 사실들이다.

1608년 대동법실시,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유영경 사사, 친형 임해군 유배, 명나라 사신 광해군의 즉위과정 조사하러 입국, 종묘 중건

1609년 일본과 기유약조 맺어 통상재개

1610년 동의보감,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

1611년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비판, 창덕궁 중건

1612년 파주(교하)로 수도이전 논의

1613년 영창대군·김제남사사, 폐모논의 시작

1614년 조선왕조실록 보관을 위해 적상산사고 건립

1617년 경덕궁·인경궁건설 시작

1618년 명의 원병요청 거부, 인목대비 서궁 유폐

1619년 강홍립의 조선군 심하전투에서 패전

1621년 모문룡이 가도로 들어감

1623년 인조반정 일어나 광해군 폐위

6.인조반정

율곡 이이의 학문을 계승한 서인(西人)이 주도하고,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남인(南人)이 동조하여 일으킨 인조반정,

1623년의 인조반정은 조선의 역사에서 큰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다.

정치적으로는 북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었고, 사상적으로는 서인들에 의해 성리학 중심주의가 굳어졌으며, 외교적으로는 친명배금(親明排金)과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이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된다.

즉, 인조반정은 단순한 왕의 교체가 아니라 명·청 교체기에 동북아 세력 균형을 통해 조선의 국익을 최대한으로 도모하려 했던 대중 자주노선의 붕괴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반정이 성공한 후 인목대비는 반정의 명분을 위해 광해군의 죄악을 나열한다.

첫째,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인 자신을 폐하고 동생 영창대군을 살해한 패륜을 저질렀다.

둘째, 궁궐공사 사업을 비롯하여 무리한 토목공사를 통해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셋째, 망해가는 조선을 되살려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망각하고 명에 대한 사대를 소홀히 하고 후금과 밀통함으로써 명을 배신했다.

요컨대 교서에 나타난 광해군의 죄악이자 폐위명분은 천리(天理)를 멸하고 인륜을 끊어서 위로는 명나라에 죄를 지었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정 후 조선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참화를 겪게 되었으니 이 또한 승자의 기록으로 봐야겠다.

7.평가

"노력한 15년 vs 잃어버린 15년"

지금까지도 그의 집권 15년에 대해 자주 외교노선과 민생안정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15년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민생 회복, 사회 통합, 재정 확보, 군비 확충, 문화 발전 등 어느 것 하나 이룬 것 없는 잃어버린 15년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대부분의 역사적 패배자의 경우 그 일차적 책임은 분명 그 자신에게 지울 수 밖에 없는 것, 역사적 인물평가에 있어 '모든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다' 라는 편견은 버려야한다.

광해군이 역사적 패배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동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광해군을 처음으로 탁월한 외교전문가로 복권한 사람이 일본인 이나바 이와키치이고 그 후 식민사관의 대표적 학자인 이병도 교수가 광해군을 긍정평가했다는 사실도 전혀 고려대상이 안 된다.

일본인이 어떤 의도로 복권했던 그것이 사실이라면 배척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럼 광해군을 평가함에 있어 과연 어떤 기준을 적용해야 할까?

''백성이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임금은 가볍다.'' 맹자 '진심장(盡心章)'에 있는 구절이다.

'백성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민생, 부국강병을 통한 자주독립,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문화발전'

필자가 일관되게 역대 왕들을 평가하는 기준이다.

이러한 필자의 기준에 의하면 광해군의 폐위명분 중 폐모살제는 거의 고려요소가 되기 어렵다. 당태종 이세민이 형과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가 되어도 '정관의 치(貞觀之治)'로 칭송받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당시 국제정세를 볼 때 명의 몰락과 청의 흥기는 필연적인 것, 광해군이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펴려고 노력한 것은 폐위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높이 평가할 점이다.

마지막으로 궁궐건설은 아무리 당시 법궁인 경복궁이 불타버린 상황임을 고려하더라도 창덕궁·창경궁 외에 인경궁·경덕궁까지 무리하게 건설한 것은 민생의 관점에서는 문제가 있었다.

그 외 임진왜란 과정에서 분조를 통한 활동, 대동법 실시, 화약도감 설치, 일본과 국교정상화, 동의보감 편찬 등 모든 요소들을 고려할 때 필자는 광해군을 세종, 영·정조, 태종, 성종 등에 이어 조선의 역대 27명의 왕 중 랭킹 6위 정도를 주고 싶다.

그리고 '선조'는 원래대로 '선종'으로 돌리고 아직 묘호조차 갖지 못한 그에게 '성조(成祖)'라는 묘호를 바치고 싶다.

고려시대 외교의 달인 서희를 통해 강동6주를 획득한 성종과 닮았기 때문이다.

아 훈신들이여 잘난 척하지 말아라
그들의 집에 살고 그들의 토지를 차지하고
그들의 말을 타며 또다시 그들의 일을 행하니
당신들과 그들이 돌아보건대 무엇이 다른가

당시 백성들이 인조와 반정공신들의 행태를 풍자한 '상시가(傷時歌)'다.

역사 교사들을 대상으로 '가장 재평가가 필요한 역사 인물'을 꼽는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위대한 패배자 광해군,

"경들은 이 오랑캐들을 어찌할 것인가? 우리나라 병력으로 1초라도 이를 막을 만한 형세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경들이 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한갓 내 말을 틀어막아 우리 군사가 투항한 사정을 명나라에 알리려고만 드니, 어찌 이런 어그러진 사리가 있는가? 내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이를 절통해 하는도다."

국가의 안위를 위해 명과 후금 사이에 중립을 추구한 그의 절통한 외침이 과연 그의 시대에만 유효한 것인지··

지금이야말로 광해군의 길을 걸을 것인지, 인조의 길을 걸을 것인지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지ᆢ
서정욱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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