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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팔만대장경에 관한 몇 가지 검토 - 백승종

작성자禪海印|작성시간08.06.27|조회수109 목록 댓글 0



팔만대장경의 비밀 천명도 일기
2006/04/17 12:43

http://blog.naver.com/chonmyongdo/50003545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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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연 2006.4.17(월)

팔만대장경에 관한 몇 가지 검토 - 백승종




1. 문제의 제기

1.1 (제작과정이 불투명) 강화도 판각설이 널리 인정되고 있지만, 해인사에서 새겼다는 ‘재래설’, 강화도 경판과 해인사 경판이 따로 있었다는 ‘2벌설’, 분사대장도감이 있었던 ‘남해 판각설’, 주요 사찰에서 나누어 새겼다는 ‘분산 판각설’ 등의 이설(異說) 역시 만만하지 않다. 팔만대장경은 어디서 어떤 과정을 밟아 새겨졌는지 아직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1.2 (관련 사료의 영성) 팔만대장경에 대한 언급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 및 ‘대장경판의 간지’ 등이 전부다. 그나마 표현이 애매해 대장경의 판재, 제작 과정 및 판각지가 뚜렷하지 못하다.

1.3 (연구대상) 이 글에서는 중요 사료 및 대장경의 출간에 관한 제설을 검토하고, 나아가 한국 인물사전의 검색을 통해 고려대장경에 관한 몇 가지 문제를 포괄적으로 살핀다.




2. 관련 사료의 제시

3.1 (대장경의 조판) [고려사] 권 24, 세가 24 고종

“임오(壬午)에 [왕이] 성의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행차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행향(行香)하였다. 현종 때의 판본이 임진의 몽고의 침략으로 불탔으므로 왕과 군신이 발원하여 도감을 세우고, 16년이 되어 마친 것이다.”




3.2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

“임금은 태자와 재상을 비롯한 문무백관과 더불어 목욕재계하고 향을 피우며 먼 하늘을 우러러 온 누리에 무량하신 여러 보살님과 천제석을 비롯한 삼십삼천의 모든 호법영관에게 비옵나이다. 몽고군이 우리에게 가한 난동이 너무 잔인하고 흉악하여 어찌 말로서 나타낼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의 망나니는 다 갖다 모았다 하겠으며 금수보다도 더 혹심하옵니다.

이러하오니 어찌 천하가 다 존경하는 부처님 말씀이 있는 줄을 못된 몽고군이 알 리가 있습니까? 몽고 병의 더러운 말발굽이 지나는 곳마다 닥치는 대로 불상이고 불경이고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다 불살라 없애고 말았으며, 부인사에 소중히 모셔두었든 처음 만든 대장경판본도 역시 이들의 마수에 걸려 하나도 남은 것 없이 재가 되었나이다. 윗대로부터 이어온 수 십 년의 공적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나라의 크나큰 보배를 순간에 잃고 말았습니다. 비록 여러 보살님들과 하늘의 임금님들이 아무리 대자대비하신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온들 이렇게 못된 짓이야 어떻게 참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하여 보건데 우리 중생들이 지혜롭지 못하고 식견이 얕아서 일찍이 오랑캐를 막을 계략을 스스로 세우지 못하고, 힘이 모자라서 불법의 큰 보배를 지키지 못한 것이니 이 모두 저희들의 잘못이므로 이제 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본래 이루어짐과 잃어버림이 없는 것이요, 잠시 대장경판을 머무르게 하신 것일 것입니다. 경판을 만들고 또 망가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로써 망가지면 다시 만들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우리중생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물며 나라를 지니고 있고 집을 가지며 불법을 지극히 숭상하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없어진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일에 주저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 귀중한 보배를 잃어 버렸는데 어찌 감히 공사가 거창할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만드는 작업을 꺼리고 망설이겠습니까? 이제 여러 재상 및 문무백관들과 더불어 큰 소원을 세우고 주관하는 관청으로서 귀당관사(句當官司 대장도감)를 두고 이를 중심으로 공사를 시작하려 하옵니다.

처음 대장경을 새기게 된 연유를 살펴보면 현종 2년에 거란 병이 대거 침입하여 난을 피해 남쪽으로 가셨으나 거란 병은 송도에 머물러 물러가지 않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합심하여 큰 원을 세우고 대장경을 새기기 시작하였더니 놀랍게도 거란 병이 스스로 물러갔나이다. 생각하건대 오직 대장경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이며 판각하는 것도 다를 바 없으며 임금과 신하가 합심하여 발원함도 또한 마찬가지이니 어찌 그 때에만 거란 병이 물러가고 지금의 몽고 병은 물러가지 않겠습니까? 다만 모든 부처님과 하늘의 보살피심이 한결같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제 지성을 다하여 대장경판을 다시 새기는 바는 그때의 정성에 비하여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모든 부처님과 성현 및 삼십삼천께서 이 간절한 기원을 들으시고 신통의 힘을 내리시어 저 추악한 오랑캐 무리들의 발자취를 거두어 멀리 달아나 다시는 이 강토를 짓밟지 못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나라 안팎이 모두 편안하고 모후와 태자가 만수무강하시며 나라의 운이 영원무궁케 하소서. 우리 중생들은 마땅히 더욱 노력하여 불법을 지키어 부처님 은혜의 만분의 하나라도 갚고자 할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들은 엎드려 비나니 굽어 살피옵소서.




3. 대장경과 팔만대장경

3.0 (대장경의 뜻과 유래) 대장경이란 ‘세 개의 광주리’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트리 피타카’를 번역한 말로서 ‘삼장경’ 혹은 ‘일체경’이라고도 한다. 여기엔 부처의 가르침인 ‘경장’과 불자나 교단이 지켜야 할 계율인 ‘율장’, ‘경장’과 ‘율장’에 관한 다양한 해석인 ‘논장’의 세 가지 내용이 포함된다. 애초 인도에서 불전을 나뭇잎에 새겼기 때문에 일괄해서 ‘패엽경’이라고 불러오다가 경장과 율장, 논장을 세 개의 광주리에 나누어 보관했다는 데서 ‘대장경’이란 이름이 유래됐다. 이러한 불전을 영구보존하기 위해 중국 송나라를 비롯한 동양 각국에서 경문을 나무에 새기기 시작했는데, 그 종류가 20여 종에 이른다. 그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완벽한 것이 <고려대장경>이다.




3.1 (대장경의 편찬 목적) 불교에서는 초기부터 모든 경전들을 분류하고 정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다 더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것을 교상판석(敎相判釋) 또는 '교판(敎判)'이라 한다. 다양한 불교 경전을 학설에 따라 분류하여 부처님들의 가르침을 체계화하려는 교상판석의 노력은 그러나 배타성이 적었다. 자파의 학설이 절대적이라 고집하기보다는 교리와 경전에 대한 다양한 논쟁을 거치면서 여러 종파가 발전할 계기를 마련했다.

3.2 (고려대장경의 역사) 처음 만들어진 것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또는 《초판고본대장경(初板古本大藏經)》이라고 한다. 1011년(현종 2) 거란(契丹)의 내침을 계기로 시작되어 1087년(선종 4)까지 77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이 초장경(약칭)은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도감(都監)을 두고 송(宋)의 개보판(開寶板) 및 거란본(契丹本)과 종래부터 전해 내려오던 국내본(國內本) 등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대반야경(大般若經)》(600권), 《화엄경(華嚴經)》, 《금광명경(金光明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 6,000여 권의 경판(經板)을 만들었다.

그 후 문종(文宗)의 제4왕자인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송나라에서 각종 장서 3,000여 권을 모아 가지고 돌아와, 1073년(문종 27)부터 1090년(선종 7)까지 이 교장(敎藏)과 불서(佛書) 모은 것을 엮어 이를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라 하고 이 목록에 의하여 차례대로 인간(印刊)한 것을 《속장경(續藏經)》이라고 한다. 그 후로도 흩어져 있는 불서를 모아 간행하였는데, 그 일은 그가 죽기 2년 전인 1099년(숙종 4)까지 계속되어, 모두 1,010부 4,740여 권이 인간되었다.

부인사에 소장되던 대장경은 1232년(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나, 일본 교토[京都]의 난젠사[南禪寺]에 1,715권이 남아 있다. 《속대장경》은 순천 송광사(松廣寺)와 고려대학교 도서관 및 일본 나라[奈良]의 도다이사[東大寺], 나고야[名古屋]의 신후쿠사[眞福寺] 등에 흩어진 채 47권이 남아 있다.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고려는 부인사의 《대장경》이 소실되자 다시 대장경을 통해 불력의 가호를 빌 목적으로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새로이 설치하고, 1236년(고종 23)부터 1251년(고종 38)까지 재조(再雕)대장경을 완성시켰다. 이것은 처음 강화도성(江華都城) 서문(西門) 밖의 대장경 판당(板堂)에 수장되어 있었다. 뒷날 강화의 선원사(禪源寺)로 옮겨졌고, 조선 초기에는 다시 서울의 서대문 밖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로 옮겨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것이 팔만대장경이다.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하는데 구목록(舊目錄)의 천(天)∼동함(洞函)에 이르기까지 639함(函)에 엮어져 부수는 1,547부(部), 6,547권(卷)이다. 추가목록의 동(洞)∼무(務) 및 중복된 녹(祿)∼무함(務函) 24함에 들어있는 15부, 231권(혹은 236권)을 합하면, 모두 663함 1,562부, 6,778권(혹은 6,783권)이고, 경판 수는 8만 1258판이 되는데 앞뒤에 새겨져 있으므로 16만여 쪽이다.

이 재조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을 그대로 새긴 것은 아니다. 그것을 저본으로 한 것은 사실이나 송본 및 거란본과 대교(對校)하여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고쳤고, 빠진 것은 그것을 보완하였다. 또한 초장경 때에는 없었던 《송조신역경(宋朝新譯經)》과도 대교(對校) 고감(考勘)하였고, 《개원록(開元錄)》, 《속정원록(續貞元錄)》 등의 불서목(佛書目)도 참고하여 본문을 다양하게 보완하였다.

이 대장경은 중국 북송(北宋)의 《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版大藏經)》 이후 출간된 어느 대장경보다도 본문이 오탈(誤脫)이 적고 내용이 충실하다. 일본에서도 이를 저본으로 하여 《축쇄장경(縮刷藏經)》을 만들어내었고, 잇달아 중국에서도 청나라 말에 《빈가정사장판(頻伽精舍藏板)》을 내놓았다. 《대장경》은 장구한 시일에 걸친 거국적 대사업으로 인쇄술과 출판 기술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4. 대장경 조판 사업의 주역과 조역

4.1(총지휘) 최우(崔瑀 1249고종 36년 사망). 고려 무신정권의 집권자. 아버지는 충헌(忠獻). 1219년(고종 6)에 최충헌이 죽자 그 뒤를 이어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고 자기가 축적하였던 금은(金銀) 진완(珍玩)을 왕에게 바치고 아버지가 빼앗은 공사(公私)의 전민(田民)을 각각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한사(寒士)를 많이 선발해 등용하는 등 인심을 얻기 위해 많이 노력하였다. 1221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이병부상서(吏兵部尙書)·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되어 집권자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고 몽고(蒙古)에 대비하여 의주(宜州 지금의 德源)·화주(和州 지금의 永興)·철관(鐵關 지금의 鐵嶺) 등 요지에 성을 쌓게 하였다.

1223년 몽고의 침입에 대비하여 은병(銀甁) 300여개, 쌀 2천여 석을 내고, 가병(家兵)을 동원, 개성의 나성(羅城)을 수리하였으며, 황금 200근으로 13층탑과 화병(花甁)을 만들어 흥왕사(興王寺)에 안치하였다.

1225년에 사제(私第)에 정방(政房)을 설치하고 문무백관의 인사행정을 처리하였는데, 정방에서 백관의 전주(銓注)를 헤아려 비목(批目)에 써서 왕에게 올리면 왕은 그것을 결재하여 내릴 뿐이었다.

1227년에 사제에 서방(書房)을 두고 문객 가운데 명유(名儒)를 소속시켜 3번(番)으로 나누어 숙직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도방(都房)과 더불어 최씨정권의 숙위기관(宿衛機關)으로 쌍벽을 이루었다.

도방은 아버지 때의 것을 계승, 강화하여 내외도방(內外都房)을 개편하였으니 내도방은 최우 자신과 그의 저택을 호위하게 하고 외도방은 그의 친척과 외부의 호위를 맡게 한 것 같다.

1228년에 오대진국공신(鼇戴鎭國功臣)에 봉하여졌다.

이듬해 이웃집 수백 호를 강제로 철거하여 격구장(擊球場)을 만들고 매일 도방과 마별초(馬別抄)를 모아 격구를 하게하고 그 자신 격구장에 나가 5, 6일에 걸쳐 구경을 하였으며 재추(宰樞)와 기로(耆老)들을 맞아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마별초는 최우에 의하여 설치된 기병대로서 최씨정권의 호위 및 의장대로 활약하던 사병집단이다.

또 그는 야별초(夜別抄)를 조직하여 야간순찰과 도둑을 단속하게 하였는데 이 야별초는 후에 삼별초(三別抄)로 발전, 개편되어 최씨정권의 사병집단으로 경찰과 전투의 임무를 맡았다.

1232년에 몽고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에게 강화천도(江華遷都)를 청하고 나서 녹봉거(祿俸車) 100대로 가재(家財)를 강화로 옮기고 개성 사람들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는 한편, 제도(諸道)의 백성을 산성과 해도(海島)로 피난하게 하고 드디어 왕으로 하여금 천도를 단행하게 하였다.

1243년에 국자감을 수축하고 양현고(養賢庫)에 쌀 300곡(斛)을 바치는 등 장학에 힘썼다.

또 사재(私財)를 희사하여 강화에서 대장경 재조(再雕)에 착수하게 하여 그가 죽은 2년 뒤인 1251년에 완성을 보았다. 이때부터 차츰 횡포와 사치가 심해져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샀다.(高麗史, 高麗史節要)




4.1.1(총지휘 보조)고종(高宗): 46년의 재위기간 대부분은 최씨(崔氏)의 독재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였으며, 잦은 민란과, 거란과 몽고의 침입에 대한 항쟁 등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어야 하였다. 1218년, 당시의 최고실력자 최충헌(崔忠獻)이 70세로 치사하려고 하자 궤장(几杖)을 주어 계속 정사를 돌보게 하였으며, 이듬해 왕씨(王氏)의 성까지 주었다.

같은 해 최충헌이 궤장과 사성을 반납하고 죽자, 그의 아들 우(瑀)가 실권을 잡고 정방(政房)을 통하여 백관의 인사를 전단(專斷)하였으므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1258년 3월 대사성 유경(柳璥)과 별장 김인준(金仁俊)이 의(竩)를 살해함으로써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표면상으로는 왕권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실권은 여전히 김준과 임연(林衍)부자에게 있었다.

대외적으로도 즉위 초기인 1216년부터 3년간 계속된 거란의 침입과 뒤이은 몽고의 침입으로 재위기간은 최대의 국난을 겪은 시기였다. 특히 1231년부터 30여 년간에 걸친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도(江都 江華)로 천도하며 28년간 항쟁하였으나 막대한 인명손실과 국토의 황폐를 가져왔다. 1232년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된 현종 때의 대장경판(大藏經板)이 소실되고, 1235년 경주의 황룡사구층탑이 소실되는 등 귀중한 문화재의 손실을 입었다. 1236년 몽고항쟁 당시 불력(佛力)에 의하여 몽고군을 격퇴하려고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 소실된 대장경판의 재각(再刻)에 착수하였다. 이에 앞서 1227년 감수국사 평장사(監修國史平章事) 최보순(崔甫淳), 수찬관 김양경(金良鏡)·임경숙(任景肅)·유승단(兪升旦) 등으로 하여금 《명종실록》을 편찬하게 하여 사관(史館)과 해인사에 각각 보관하게 하였다.(高麗史, 高麗史節要)




4.1.2(학문적 주역) 수기(守其) 생몰년 미상. 화엄종(華嚴宗)의 승려로 수진(守眞)이라고도 한다. 도승통(都僧統)으로 개태사(開泰寺)의 주지였다.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정밀하였다. 고려대장경을 재조(再雕)할 때 고종의 명으로 착오된 것을 교정하였는데, 마치 자기가 번역한 것처럼 능란하였다. 그의 저서 《고려국신조대장경교정별록 高麗國新雕大藏經校正別錄》 30권은 대장경에 수록되었는데, 이는 고려판본과 거란 및 송나라본 대장경을 대교(對校)하면서 경문(經文)의 잘못된 것을 정정하고 그 사실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이밖에 《대장경목록 大藏經目錄》 3권을 저술하였다.(補閑集, 韓國佛敎撰述文獻總錄, 佛敎文化硏究所, 東國大學校出版部 1976)




4.1.3(판각사업의 주역) 용득의(龍得義) 용씨의 시조로 고려 때 팔만대장경 만드는 일을 총지휘하였다.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에 용수사(龍遂寺)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이에 후손들이 홍천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곳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http://kdaq.empas.com/koreandb/history/bon/html/bon_o26.htm)




4.1.4(사업의 후원자) 정안(鄭晏): 본관은 하동(河東). 초명은 분(奮). 자는 화경(和卿).

형부상서 세유(世猷)의 손자로, 평장사 숙첨(叔瞻)의 아들이며, 최우(崔瑀)와 처남 매형(부)의 관계이다. 총명하여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였고, 음양·산술·의약·음률에도 정통하였다. 진양의 수령이 되었으나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인 하동에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집권자 최우의 추천으로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었고 1241년(고종 28)에 동지공거(同知貢擧)로 과거를 주관하였으며, 최우의 횡포가 날로 심하여지자 화가 미칠까 두려워 남해로 은퇴하였다. 불교를 독신하여 명산대찰을 순방하고 사재를 희사하여 당시 간행 중이던 대장경의 일부를 펴내기도 하였다. 은퇴 후에도 권귀(權貴)에게 아첨하며 사치를 좋아하여 저택·기명 등이 매우 호화로웠다.(高麗史, 高麗史節要)

4.1.5(사업의 조역) 일연(一然): 1249년 정안(鄭晏)의 청으로 남해의 정림사(定林社)로 옮겨 이를 주재하였다. 이 절에서 대장경 주조 중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의 작업에 약 3년 동안 참여하였다. 1268년에는 조정에서 선종과 교종의 고승 100명을 개경에 초청하여 해운사(海雲寺)에서 대장낙성회향법회(大藏落成廻向法會)를 베풀었는데, 일연으로 하여금 그 법회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의 물 흐르는 듯한 강론과 설법으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4.2 한국인과 대장경의 만남

4.2.1(최초의 대장경 사본) 자장(慈藏): 643년 선덕여왕은 당 태종에게 글을 보내어 자장을 환국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귀국길에 본국 신라에 불상과 불경 등이 미비함을 생각하고 대장경 한질과 번당(幡幢)·화개(華蓋) 등을 골고루 마련하여 7년 만에 귀국하였다. 왕은 그를 분황사(芬皇寺)에 머무르게 하고 대국통(大國統)으로 임명하였다.

4.2.1(대장경의 국내 유입) 보요(普耀): 신라 말 두 차례 중국 남쪽의 오월(吳越)에 가서 대장경(大藏經)을 가져왔으며, 해룡왕사(海龍王寺)를 창건하였다. 고려 의종 때 팽조적(彭祖逖)이 지은 보요에 관한 시(詩)의 발문에 보면, 보요가 처음 오월에서 대장경을 구하여 돌아오다가 해풍(海風)이 갑자기 일어나서 표류하게 되었다. 신룡(神龍)이 대장경을 이곳에 멈추게 하려는 것으로 여기고 정성껏 축원하면서 용의 공덕까지를 빌었더니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귀국하여 대장경을 안치할 곳을 찾아 두루 다니다가 산 위에 상서로운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제자 홍경(弘慶)과 함께 해룡왕사를 창건하였다. 이 절에는 용왕당(龍王堂)이 있어 영험이 많았는데, 용왕이 대장경을 따라와서 머무른 것이라고 한다. 또한 보요의 진영에 대해서는 1094년(선종 11) 어떤 이가 찬을 남겼고 팽조적이 찬시를 남겼는데, 현재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4.2.1.1(대장경의 독서) 개청(開淸): 사굴산문(闍堀山門)의 선승. 성은 김씨. 경주출신. 유차(有車)의 아들. 8세 때 취학하여 유학을 공부하다가 25세 때에 화엄사(華嚴寺)의 정행(正行)에게 가서 승려가 되었다. 강주(康州)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대장경을 읽다가 옥축일음(玉軸一音)이 들려 금강삼매(金剛三昧)의 진리를 얻었다. 혼자 3년 동안 수선(修禪)하다가 통효(通曉)의 도성(道聲)을 듣고 굴산사(堀山寺)로 찾아갔다. 통효는 그를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하면서, 곧 입실(入室)을 허락하고 심인(心印)을 전하였다. 940년(태조 23)에 세워진 비가 강원도 강릉 개청사(開淸寺)에 있다. 시호는 낭원(朗圓), 탑호(塔號)는 오진(悟眞)이다.(朝鮮金石總覽)




4.2.2(고려 초의 대장경 수입) 홍경(洪慶): 928년(고려 태조 11)에 후당(後唐)으로부터 대장경(大藏經) 1부를 얻어 배에 싣고 예성강(禮成江) 하구에 이르자, 태조가 친히 마중 나와 환영하, 대장경은 제석원(帝釋院)에 모셨다. 《삼국유사》에는 928년 묵화상(默和尙)이 당나라에 가서 대장경을 싣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 둘이 같은 연대이고 같은 곳에서 대장경을 가져온 것으로 되어있어 홍경과 묵화상은 동일 인물로 간주된다.




4.2.2.1(고려 초의 대장경 수입) 여가(如可): 989년(성종 8)국서를 휴대하고 송나라로 가서 대장경(大藏經)을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장경을 받아 그해 귀국하였다.




4.2.2.2(고려 초의 대장경 수입) 한언공(韓彦恭): 본관은 단주(湍州). 광록소경(光祿少卿) 총례(聰禮)의 아들이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984년(성종 3)에 형관시랑이 되었고, 이어 병관시랑에 올랐다. 990년 송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갔다가 금자광록대부 검교병부상서 겸어사대부(金紫光祿大夫檢校兵部尙書兼御史大夫)를 제수받고 대장경 481함(函)2,500권과 송 태종이 지어 비장한 〈전소요연화심륜 詮逍遙蓮花心輪〉을 가지고 돌아왔다. 어사 예관시랑 판예빈성사(御事禮官侍郎判禮賓省事)가 되어 송나라의 제도를 본떠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실현되자 그 부사(副使)를 거쳐 중추원사가 되었다.(高麗史, 高麗史節要)




4.2.2.3(고려 초의 대장경 수입) 한인경(韓藺卿): 974년(광종 25) 왕융(王融)이 지공거(知貢擧)였던 과거에 장원, 998년(성종 8)에 시랑(侍郎)으로 병부낭중(兵部郎中) 위덕유(魏德柔)와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광록대부(光祿大夫)를 받았다. 《대장경》을 가지고 돌아온 뒤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高麗史, 高麗史節要.)




4.2.2.4(고려 초의 대장경 수입) 혜조(慧照): 예종의 칙명을 받고 서방에 가서 요본(遼本) 대장경 3부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정혜사(定惠寺), 해인사(海印寺), 허참정(許參政)의 집에 1부씩 보관하였다고 한다.




4.2.3(대장경의 인출) 결응(決凝): 성은 김씨, 자는 혜일(慧日). 명주(溟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광률(光律). 12세에 용흥사(龍興寺)로 출가하여, 복흥사(復興寺)에서 계를 받은 뒤 대장경을 열람하는 한편 선정(禪定)을 닦았다. 991년 선불장(選佛場)의 승시에 합격하여 대덕(大德)의 법계를 받았다. 목종·현종·덕종·정종의 큰 존경을 받았다. 현종초에는 수좌가 되었고, 정종초에는 승통(僧統)이 되었으며, 1041년에는 봉은사(奉恩寺)에서 정종의 왕사가 되었다. 1043년에는 문덕전(文德殿)에서 비를 빌면서 《화엄경》을 강의하였는데, 이때 단비와 천화(天花)가 내렸다. 1042년에 ‘소나무와 칡덩굴이 있는 곳이 몸을 버릴 곳’이라 하고, 왕의 허락을 얻어 부석사(浮石寺)에 머물렀다. 이 때 의상(義湘)의 덕을 사모하여 대장경을 인출하고 부석사와 안국사에 나누어서 봉안하였다. 현재 부석사에 전해지고 있는 화엄경판은 이때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047년에는 봉은사에서 국사로 책봉되었으며, 말년에 고향에다 절을 창건하자 문종은 화엄안국사(華嚴安國寺)라는 사액을 내렸다. (朝鮮金石總覽, 海東金石苑.)




4.2.4(대장경의 편찬) 의천(義天): 천태종(天台宗)을 창종한 고승. 성은 왕씨(王氏). 이름은 후(煦), 호는 우세(祐世),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 당시 송나라의 정원법사(淨源法師)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통하여 서로 교유하였다. 유학의 결심은 중단되었지만, 정원법사와의 교유만은 계속되어 그의 초상을 얻어 보기도 하고, 《화엄보현행원참의 華嚴普賢行願懺儀》 등 그의 저서를 모두 탐독할 정도로 두 사람 사이는 가까워졌다. 문종이 죽은 뒤 1085년(선종 2) 4월, 그는 왕과 어머니에게 편지를 남기고 송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수개(壽介) 등 2명의 제자를 데리고, 정주(貞州)에서 배를 타고 5월에 송나라 판교진(板橋鎭)에 도착하여 송나라 왕에게 입국하게 된 이유와 동기를 알렸다.

송나라의 철종은 7월에 수도 변경(汴京)의 계성사(啓聖寺)에 머물게 하고 그에게 유성법사(有誠法師)를 천거하여 교유하도록 하였다. 유성법사는 원래 화엄의 대가였으므로 서로가 걸맞은 상대였다. 두 사람은 화엄의 깊은 사상과 현수(賢首)의 천태교판(天台敎判)에 대하여 다르고 같은 문제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 뒤 상국사(相國寺)에서 운문종(雲門宗)의 종본(宗本)을 방문하였고, 또 흥국사(興國寺)에서 인도 승려 천길상(天吉祥)을 만나 인도에 대한 여러 가지 사정과 학문을 배웠다. 변경에서 여러 달을 보낸 뒤 항주(杭州)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의 정원법사에게로 가서 《화엄경》·《능엄경》·《원각경》·《기신론》 등의 사상과 천태와 현수의 교학에 대하여 토론을 하고, 또 여러 종파의 학승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다. 특히 자변대사(慈辨大師)와 영지사 원소율사(元炤律師)와의 교유가 깊어 천태교관과 계율과 정토교학에 관하여 폭넓은 담론을 나누기도 하였다.

의천이 출국할 때 많은 불교관계 전적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이곳 항주에 많은 학승들이 모여들었고, 그 전적을 중심으로 뜻 깊은 토론도 전개되었다. 그 당시 송나라 학계는 무종(武宗)의 불교탄압과 9대에 걸친 전쟁으로 인하여 불교관계 서적들이 거의 없어진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고려에서 지엄(智儼)의 《공목장 孔目章》·《화엄수현기 華嚴授玄記》·《무성섭론소 無性攝論疏》·《기신론의기 起信論義記》와 현수의 《화엄탐현기 華嚴探玄記》·《기신론별기 起信論別記》·《법계무차별론소 法界無差別論疏》·《십이문론소 十二門論疏》·《삼보제장문 三寶諸章門》 등과 청량(淸凉)의 《정원신역화엄경소 貞元新譯華嚴經疏》, 규봉(圭峯)의 《화엄론관 華嚴論貫》 등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그를 찾아온 여러 학승들을 만나 담론할 기회를 많이 가지게 된 것이다.

그때 본국에서는 선종이 모후의 간절한 뜻을 받들어 송나라 왕실에다 의천의 귀국을 청하는 글을 보냈다. 이에 1086년 2월 13일 항주에서 배편으로 변경에 오게 되었는데, 정원법사도 함께 배를 타고 전송하였다.

송나라의 서울에서 얼마 동안을 지낸 다음 수주의 진여사(眞如寺)에 가서 자예(子睿)의 사리탑을 참배하였고, 다시 천태산으로 가서 지의(智顗)의 탑을 참배하고 발원문을 지어 바쳤다. 이 발원문은 본국인 고려에 돌아가면 천태교학을 널리 선양하겠다는 서원이 중심내용이었다.

또, 명주(明州) 육왕광리사(育王廣利寺)에 가서 운문종의 회련(懷璉)을 만난 뒤, 1086년 5월 20일 출발하여 6월에 불교전적 3천 여 권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선종은 태후와 함께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하여 귀국을 환영하였다.

귀국한 뒤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송나라의 고승들과 서적·편지 등을 교환하면서 학문에 더욱 몰두하였다. 정원에게는 《화엄경》의 세 가지 번역본과 이 경을 봉안할 장경각 건립비로 금 2천 냥을 보냈다. 정원은 장경각을 건립하고 그 경을 봉안하였는데, 이 때문에 혜인원(惠因院)을 고려사(高麗寺)라 하였으며, 여기에는 의천의 소상(塑像)을 봉안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흥왕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그는 요나라·송나라·일본 등에서 불교서적 4천 여 권을 수집하고 국내의 고서도 모았으며,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이들 경서를 간행하였다. 간행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 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편집하였다. 이 교장총록의 안제목은 ‘해동유본현행록(海東有本現行錄)’이라 하였으며, 줄여서‘의천목록(義天目錄)’·‘의천록(義天錄)’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삼장(三藏)의 정본 외에 그 주석서인 장소(章疏)만을 수집하여 목록을 작성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일이다. 이 《신편제종교장총록》의 상권에는 경의 장소 561부 2, 586권, 중권에는 율의 장소 142부 467권, 하권에는 논의 장소 307부 1, 687권이 각각 수록되었는데, 모두 합쳐 1, 010부 4, 740권이 된다. 흥왕사 교장도감에서는 이 목록에 의하여 간행하였으며, 이를 《고려속장경 高麗續藏經》이라고 한다.




4.2.5(대장경도량) 지칭(智偁): 천태종(天台宗)의 승려. 성은 윤씨(尹氏). 남원출신.

어려서부터 불교를 좋아하여 천태종 홍원사(洪圓寺)의 주지로 있던 승통(僧統) 교웅(敎雄)을 은사로 삼아 득도(得度)하였다. 1139년(인종 17) 천태종의 승과(僧科)에 합격하였고, 그뒤 삼중대사(三重大師)를 거쳐 1179년(명종 9) 수좌(首座)가 되었으며, 1189년 승통이 되었다.

그는 왕으로부터 여러 차례 만수가사(滿繡袈裟)를 하사받았고, 국가에서 시설하는 백고좌회(百高座會)나 대장경도량(大藏經道場)의 법주(法主)가 되었으며 천태종의 승과를 주재하였다. 노년에는 모든 공직을 사임하고 삼각산 원각사(圓覺社)로 은거하여 지내다가 입적하였다.(朝鮮金石總覽)




4.2.6(고려 대장경 판각) 현종: 거란과의 충돌로 인한 외환이 있자 불력(佛力)으로 외침을 방어하고자 하여 착수, 6,000여권의 대장경을 제작했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4.2.7(대장경 열람) 보환(普幻): 호는 한암(閑庵). 마곡사(麻谷寺)의 승려. 1245년(고종 32) 12월 19일에 문신(文身)을 새기며 《능엄경 楞嚴經》을 널리 펴려는 서원(誓願)을 세웠고, 1264년(원종 5)〈구결도우문 求結道友文〉을 발표하여 스스로 깨달은 《능엄경》의 참뜻을 영원히 전법(傳法)할 결의를 보였다. 그뒤 영산현(靈山縣) 봉귀사(鳳歸寺)에 머물면서 대장경(大藏經)을 열람하다가, 1265년 영산현 귀로암(歸老庵)이 낙성(落成)되자 주지 각환(覺幻)의 청에 따라 《능엄경》을 강설하였다. 오늘날 《능엄경》이 우리나라 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된 것은 그의 노력에서부터 비롯된다. 저서 《능엄경신과》와 《능엄경산보기》는 현존하고 있다.(首楞嚴經環解刪補記)




4.2.8 (원 대장경의 사출) 혜영(惠永): 고려 충렬왕 때 국존(國尊), 유가종의 고승. 성은 강씨(康氏). 혜영(惠永)은 이름이다. 문경 출신. 한림원 자원(子元)의 아들이다. 11세에 출가하여 남백월산(南白月山)의 수좌(首座) 충연(冲淵)의 제자가 되었다. 1285년(충렬왕 11) 유가사(瑜伽寺)로 옮겼고, 1290년 사경승(寫經僧)100명을 데리고 원나라에 들어가 세조를 만나자 경주사(慶州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만안사(萬安寺) 당두(堂頭)의 청으로 《인왕경 仁王經》을 강의하여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이듬해 금니(金泥)로 대장경을 사(寫)하여 귀국하였다.(朝鮮金石總覽, 朝鮮佛敎通史)




4.2.9(고려 말의 대장경 인출) 설우(雪友): 나옹(瀨翁)의 제자가 되었다. 나옹이 대장경(大藏經)을 인출(印出)하여 신륵사(神勒寺)에 봉안할 때 함께 참여하였고, 대장경을 읽는 데에도 함께 하였다. 나옹의 제자들 중에서 청정행(淸淨行)이 완벽하여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색(李穡)은 그를 기려서 〈설우기 雪友記〉를 짓기도 하였다.(朝鮮禪敎史, 忽滑谷快天箸, 鄭湖鏡譯, 寶蓮閣 1978)




4.2.10(팔만대장경의 보완) 의선(義璇): 성은 조씨(趙氏), 본관은 평양(平壤). 호는 순암(順菴). 평양군(平壤君) 인규(仁規)의 넷째아들이다. 일찍이 출가하여 원혜(圓慧)의 법맥을 이었으며, 무외(無畏)의 유자(猶子)가 되어 원나라에 들어갔다. 원제(元帝)의 총애를 입어 정혜원통지견무애삼장법사의 법호를 받고 천원(天源) 연성사(延聖寺)주지로 있으면서 본국의 복국우세정명보조현오대사 삼중대광자은군(福國祐世靜明普照玄悟大師三重大匡慈恩君)에 봉하여져 영원사(瑩原寺)주지를 겸하였다. 1332년(충숙왕 복위 1) 왕명에 따라 경사의 보은 광교사(光敎寺)를 주창하는 한편, 연성사의 자금으로 금나라 왕자 성(成)이 지은 《예념미타도량참법 禮念彌陀道場懺法》을 중각(重刻) 유포하였으며, 뒤에 고려대장경에 넣게 하였다. 다시 원나라로 갔다가 1336년 본국에 돌아와 충숙왕에게 묘련사의 중수를 권하여 도량을 일신시켰다. 교분이 두터웠던 이제현(李齊賢)을 시켜 석지조기(石池글記)를 짓게 하였다. (益齋亂藁, 陽村集, 東文選, 朝鮮金石總覽)




4.2.11(고려말 대장경의 봉안) 정오(丁午): 충선왕 때의 국통(國統). 천태종(天台宗)의 고승(高僧). 1306년 백월낭공적조무애대선사(白月朗空寂照無㝵大禪師)라는 호를 제수 받았고, 이듬해 여름에는 왕사로 책봉, 불일보조정혜묘원진감대선사(佛日普照靜慧妙圓眞鑑大禪師)라는 호를 받았다. 1313년 11월에 충숙왕이 즉위하면서 국통에 책봉되고, 대천태종사쌍홍정혜광현원종무애국통(大天台宗師雙弘定慧光顯圓宗無㝵國統)의 법호를 제수 받았다. 1314년(충숙왕 1)에는 반성(班城)의 용암사(龍巖寺)를 하산소로 하여 옮겼다. 왕명에 의하여 1315년부터 1318년 11월까지 4년 동안 용암사를 중창하여 80여 칸은 새로 짓고, 20여 칸은 중수하였다. 또한 금당의 주불인 석가여래를 비롯하여 대장경 600여함을 봉안하였다. 문장에도 능하였는데, 《동문선》에는 그의 글 20여 편이 수록되어 있다.(東文選, 高麗後期 天台宗의 白蓮社 結社, 蔡尙植, 韓國史論 5, 1979).




4.2.12(조선 초의 대장경 불사) 자초(自超): 성은 박씨(朴氏). 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 삼기(三岐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출신.1344년(충혜왕 5) 출가하여 소지(小止)의 제자가 되었다. 1371년 나옹이 왕사(王師)로 책봉되어 송광사에 머무르면서 의발(衣鉢)을 그에게 전하였다. 1392년(태조 1) 겨울, 태조는 그를 왕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1393년 9월에 지공과 나옹의 사리탑을 회암사에 건립하였고, 나옹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불사(佛事)를 광명사(廣明寺)에서 베풀었으며, 10월에는 국가의 주관 아래 대장경을 읽는 전장불사(轉藏佛事)가 연복사(演福寺)에서 개최되었을 때 그 주석(主席)이 되었다.(東文選, 朝鮮金石總覽)




4.2.13(선초의 대장경 인출) 신미(信眉): 본명은 수성(守省). 본관은 영동(永同). 아버지는 옥구진(沃溝鎭)병사였던 김훈(金訓), 동생은 유생이면서도 숭불을 주장하였던 김수온(金守溫)이다. 세조 때는 왕사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그를 경애하였고, 왕위에 오르자 불교의 중흥을 주관하게 하였다. 1458년(세조 4)에 나라에서 해인사에 있던 대장경 50부를 인출하고자 하였을 때 이를 감독하였고, 1461년 6월에 왕명으로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을 널리 유통시키기 위하여 불전(佛典)을 번역, 간행하였을 때에도 이를 주관하였다. (東師列傳, 覺岸; 朝鮮佛敎通史)




4.2.14(선초의 대장경 인출) 학조(學祖):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등곡(燈谷)·황악산인(黃岳山人). 김영추(金永錘)의 형. 신미(信眉)·학열(學悅) 등과 함께 선종의 승려로서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여러 고승들과 함께 많은 불경을 국어로 번역, 간행하였다. 학덕이 뛰어난 당대의 명승이었으며 웅문거필(雄文巨筆)의 문호로 칭송되었다. 1500년(연산군 6) 왕비의 명으로 해인사의 대장경 3부를 간인(刊印)하고 그 발문을 지었으며, 1520년(중종 15) 왕명으로 다시 해인사 대장경 1부를 간인 하였다.




4.2.15(선초의 대장경 봉심) 박건(朴楗):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자계(子啓). 정난공신(靖難功臣) 중손(仲孫)의 아들. 1453년(단종 1)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부교리를 비롯한 삼사의 요직을 거쳐 예종이 즉위하자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478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해인사 소장의 대장경 판목을 봉심하였고,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榜目, 新增東國輿地勝覽, 國朝人物考)




5. 팔만대장경의 판각

5.1(경판의 제원) 8만 여 판에 8만 4000가지 번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실려 있다고 하여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경판 양끝에는 각목을 붙여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하고 네 귀퉁이에는 동으로 장식을 달았으며 방충과 내수를 위해 판 위에는 가볍게 옻칠을 했다. 경판의 길이는 68~78cm이고, 폭은 약 24cm, 두께는 2.7~3.3cm, 무게는 3~3.5kg 정도다. 한 면에 23행, 한 행에 14자로 앞뒤 양면에 644자이니, 전체 글자 수는 줄잡아 5200여 만 자를 헤아린다.

경판은 목판인쇄용으로 재질에 관해 이때까지 대체로 자작나무로 알고 있었는데, 최근 박상진 교수(임산공학)의 연구에 의하면, 장미과에 속하는 산벚나무류가 과반수로 가장 많고, 북부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자작나무는 1할에도 미치지못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밖에도 몇 가지 나무가 쓰였다. 물관이 골고루 흩어져 수분함유율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조각과 보관에 유리한 산벚나무류를 택하고, 여러 가지 과학적인 공정을 거쳐 경판을 준비하는 과정은 고려인들의 슬기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무를 베어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갔다가 나무의 진을 빼고 판자 내의 수분분포를 균일하게 하며 나뭇결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소금물에 다시 삶았다가 그늘에 말린 뒤 경판을 만든다. 그래서 750여 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판이 썩거나 좀 벌레가 갉아먹는 일이 없으며, 경판의 모양이 변함없이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5.2(판각과정) 글자를 새기는 과정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1자 1배’, 즉 글자 한자를 새기곤 절을 한번 하면서 열과 성을 다했기에 그 천문학적 숫자에 달하는 각자에 오자나 탈자가 거의 없다고 하니, 이것은 세계 인쇄사에 전무후무한 기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각자공 한 사람이 하루 평균 40자를 새긴다고 하면, 각자에만도 연인원 130만 명이 동원된 셈이다. 그밖에 필사공, 목공, 칠공, 운반부, 교정사, 기도승 등 인부도 매일 200명 이상이 함께했으니, 판각을 완성하는 데는 연인원 약 250만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산된다. 한 장의 무게를 3kg씩만 잡아도 240톤이나 되는 경판 전체를 지천사에서 해인사로 옮기는 데만 꼬박 2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 대장경은 주변 여러 나라에 산재했던 각종 대장경본을 가져다가 꼼꼼히 교감하고 하나하나 수정 보완하면서 1011년 초조를 시작한 때부터 1251년 재조를 완성할 때까지 24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세계 인쇄사상 유례없는 대역사를 마무리한 것이다. 급기야 피라미드가 세계 7대 기적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것처럼, <팔만대장경>도 가장 완벽한 대장경으로 지금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1995년 유네스코가 대장경과 더불어 해인사 장경판전을 ‘세계문화유산’(463호)에 등재함으로써 인류의 공동유산임이 확인되었다.




5.3(대장경에 대한 일본의 부러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일본은 여러 구실을 붙여 83회나 우리 대장경 인쇄를 요청했으며, 거절당하면 온갖 추태와 협박을 마다하지 않았다. 세종대왕 때는 요청이 거부되자 일본 사신이 3일간 항의 단식하는 희극이 벌어졌으며, 전함을 보내 약탈하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과 승병들이 해인사로 쳐들어오는 왜병들을 ‘왜구치’란 고개에서 막아 대장경을 지켜냈다. 일제는 총독부 시절에도 대장경 전부를 훔쳐갈 계략까지 꾸미고 몇 장씩을 빼돌렸다. 대장경의 소장처인 해인사는 7차례의 화재 등 형언 못할 삼재팔란(三災八難 불교에서 말하는 갖가지 재난)을 겪으면서도 겨레의 철석같은 수호정신과 대장경의 신력, 해인사의 불덕으로 말미암아 국보 32호인 <팔만대장경>을 지켜낼 수 있었다.

대장경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은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해인사쪽은 100여 명의 전문인력과 80여 억원의 예산을 들여 지난 2000년 9년 만에 대장경 전산화작업을 완료했다. 지난해부터는 200억원이 드는 경문 동판화작업에 착수했다. 천년 수명의 나무재질로 된 경판을 만년 수명의 동판재질로 갱신하는 뜻있는 역사다. 동판 복원에는 여러 종교단체가 물심양면 힘을 보태기로 했다. 모두 열린 마음으로 겨레의 유산을 빛내는 거사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다. 그뿐인가. 북한도 북한대로 1987년과 1991년 두 차례 <팔만대장경 해제>본을 출간했다.(5항은 정수일 교수의 글을 토대로 했다)




6. 경판전의 건축기술

6.1(미스터리) 정부는 1975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공중습도 조절시설을 갖춘 새 경판전을 신축하고 일부 경판을 옮겨 놓았다. 그러나 실내에 응축수가 생기면서 경판이 갈라지고 비틀어지는 등 7백 년이 넘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경판에 여러 가지 결함이 나타났다. 때문에 부랴부랴 경판을 옛 건물로 다시 옮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6.2(경판전의 위치) 경판전은 가야산 자락의 골바람이 들어오는 절묘한 위치에 지어져 있다. 1,430m의 가야산 중턱인 해발 655m에 서남향으로 앉아 있는데 북쪽이 높고 막혀 있으며 남쪽은 열려 있다. 따라서 남쪽 아래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바람이 자연스럽게 경판전 건물을 비스듬히 스쳐 지나가도록 되어 있다. 특히 건물이 서남향이라 습기가 많은 동남풍은 경판전을 따라 옆으로 흘러나간다. 이는 건물 내부의 습도를 적절하게 유지하고 통풍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6.3(경판전의 구조) 경판전 건물도 과학적, 기술적으로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경판전의 각 벽면에는 위아래로 두 개의 이중창이 나 있는데 위창과 아래창의 크기가 서로 다르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의 앞면 창은 위가 작고 아래가 크며 뒤쪽 창은 아래가 작고 위가 크다. 큰 창을 통해 공기가 건물 안으로 많이 흘러들어 오지만 나가는 창은 크기가 작아 공기가 천천히 빠져나간다. 이는 건조한 공기가 가능한 한 건물 내부에 골고루 퍼진 후에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해 준다. 또 판전 내부의 흙바닥에는 습기를 조절하도록 숯, 횟가루, 소금을 모래와 함께 차례로 깔아두었다. 경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설치한 마구리도 공기가 위아래로 통할 수 있도록 공간을 띄어두는 등 세심한 배려를 했다. (李泰寧 編, <<高麗大藏經 基礎 學術 硏究>>, 海印寺 1996)




6.4(습도조절 기능) 4Kg 경판 한 장의 중량변화는 기상 변화에 따라서 1일 80g 증감이 생기는 것은 보통이었다. 즉 경판 한 장이 나타내는 습기조절과 이에 따르는 온도 조절 효과는 무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이곳 외기(外氣)가 큰 일교차를 보여주는데 반하여 경판 주위에서는 5도 이내의 적은 값을 보여주는 두드러진 온도 완충 작용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거의 개방상태나 다름없는 장경각전 공간을 통해서 이것은 섭씨 2도를 벗어나지 않는 균일한 온도를 유지하는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개방 상태에 가까운 공간에서 보여주는 이만한 온도 균일화가 과연 밀폐된 공간에서라도 기계 공조 시설로 가능할 것인가 의심스럽다.

보통 70-80% 상의 상대 습도를 보여주며 몹시 건조한 계절에 있어서도 30-40% 이하로 내려가는 시간대는 길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목재의 변형을 막는 충분히 습한 환경은 한편 유해 미생물과 곤충의 서식의 장을 마련하게 된다. 이 이율배반적인 환경의 허점을 보완 극복한 기술이 옻칠처리였다.




6.5(보존상태) 1915년 일제 때 실시한 인경(印經)을 위해서 실시한 수리의 기록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1만 7천여 면에 가까운 경판면(面) 중에서 다만 18개의 경판을 새로 조각하였고 6,000 만자에 육박하는 조각된 총 글자 중 마멸 또는 탈락된 1,017개의 글자를 새로 조각해서 보충하였다는 것이다. 파란 많던 역사 시대를 거치면서도 그 보존 상태가 얼마나 양호한 상태였는지가 입증되었다.

그 후 50여 년이 지난 1960년대 후반에 조사한 서수생(徐首生) 교수에 의하면 1,500여 장에 걸쳐서 마모된 글자가 있다는 것이다. 박상국(朴相國)씨는 1970년초 인경된 동국대 소장 인경본을 조사해 선명치 않거나 잘 나타나지 않은 글자를 마모, 마멸이 그 원인이라고 가정한다면 총 2,100여 장에 이르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1915년 이후 1970년에 이르는 55여 년 간 진행된 경판의 손상은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충분할 뿐만 아니라 '기초 조사'에서 밝혀질 1970년 이후 현 시점까지 25년 동안 일어난 악화 현상의 진행을 감안하면 1915년 일본 사람에 의해서 손질이 된 이후 약 80년 동안에 진행되었다고 믿어지는 훼손과 열화 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도 경판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본격적인 과학적 조사의 계속은 시급한 문제이다. 또한 이미 장비가 마련된 분진 및 세균 채취 장치를 계속적으로 작동시켜 계절별 시간별 또는 관람객수에 따르는 분진, 세균 수의 모니터링과 공기 성분의 계속적인 측정을 실행하는 것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7. 팔만대장경의 민속 문화

7.1(정대불사) [뉴스타임] 팔만대장경 정대 불사 2006년4월7일 KBS: 국보 32호인 팔만대장경을 강화도에서 머리에 이고 옮긴 데서 유래한 ‘팔만대장경 정대불사’가 오늘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열렸습니다. --- 불도 3천여 명은 머리에 팔만대장경 모형을 이고 법성도를 돌면서 극락세계를 염원했습니다. 불자들은 미로와 같은 법성도를 밟으며, 어느새 세속의 번뇌를 씻고, 깨달음의 세계로 다가섰습니다.




부록(박상진 교수의 글)




1: 팔만대장경은 과연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겨왔는가?




이와 관련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종34년(1247)까지 대체적이 판각작업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정리를 한 후 고종 38년(1251) 드디어 고려국의 오랜 염원이었든 고려재조대장경은 햇빛을 보게 되었다. 위로는 임금과 문무백관, 아래로는 일반서민에 이르기 까지 불심으로 뭉쳐진 국민들은 장장 16년간에 걸친 고난과 희생의 결정체인 팔만장이 넘은 대장경판을 완성하고 얼마나 기뻐하고 가슴 뿌듯해 하였겠는 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조정에서는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어려운 시기지만 축하행사가 당연히 있었을 것이며 고려사에는 보이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幸城西門外 大藏經板堂 率百官行香 顯宗時板本 燃壬辰蒙兵王與君臣 更願立都監 十六年而功畢).

이후 1251년에서 이태조 7년(1399)에 이르는 150 여 년 동안 고려가 망하고 새로운 조선왕조가 들어서는 등 정치적인 격변기를 겪으면 서도 우리의 역사기록에는 대장경에 관한 내용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어디다가 어떻게 보관하였고 인쇄는 몇 번이나 하였는지 또 도장(道場)을 열어 대장경을 강의하고 토론하였다는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대장경판은 현 강화읍에 절터가 남아있는 선원사에 봉안되어 있어든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강화도에 있었든 것으로 추정되는 대장경판이 언제 해인사로 옮겨졌는지에 대해서는 증명할만한 자료가 매우 불충분하여 많은 논의가 있고 심지어 대장경판은 강화도에서 옮겨온 것이 아니라 남해나 거제도 등에서 새겨서 해인사로 가져왔다는 재래설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러면 몇 가지 대장경판을 새긴 장소와 옮겨온 과정 및 시기에 관한 기록을 검토해보자.




1.1 재래설(在來說)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된 천년 고찰 해인사에는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고문서가 있는데 몇 고문서의 기록을 근거로 경판을 새긴 당시부터 해인사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대장경판과 직접 관련을 지어 볼 수 있는 문헌은 해인사 유진 팔만대장경 개간 인유(留鎭 八萬大藏經 開刊 因由)와 해인사 사적비(事跡碑)가 있다.

먼저 팔만대장경 개간 인유를 보면 신라때 이거인(李居仁)이란 사람이 거제도에서 경판을 새기고 해인사로 운반한 것을 기념하여 축하 법회를 연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 있다.

(경상도 합천 땅에 이 거인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집안형편은 비록 가난하였으나 원래 성품이 온순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어서 이웃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좋아하는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서(里胥)라는 말단 관직을 가지고 있을 때 당대중(唐大中) 임술년 가을에 어느 마을을 순회하다가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오는 중 길바닥에서 희한하게도 눈을 셋씩이나 가진 강아지 한 마리를 얻어 집으로 데려가게 되었다. 이 강아지는 자라면서 모양은 마치 사자와 같았으나 성질이 온순하여 마치 착한 사람 같았으며 하루에 한 끼 밖에 먹지 않으면서도 주인에게는 한없이 충실하였다. 주인이 외출할 때나 귀가 할 때마다 오리쯤은 따라 나와서 전송하고 환영하므로 이 개를 거인은 자기 자식처럼 애지중지 길렀는데 3년 후인 갑자년 가을에 갑자기 병도 없이 앉아서 죽어버렸다. 거인은 그 개의 주검을 슬퍼하여 꼭 사람과 같이 관에 넣어 정중한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런데 다음해인 병인년 10월에 거인도 역시 갑자기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죽은 거인이 저승에 가니 난데없는 임금님이 있길래 쳐다보았더니 눈이 셋이고 머리에 쓴 관 모양이 다섯 봉우리 모양이고 손에 보홀(寶?)을 들고 붉은 비단옷을 입었으며 입술이 빨갛고 치아가 가지런한데 상아로 만든 의자에 높이 앉아 있었다. 좌우에 거느리고 있는 신하들은 모두 까만 모자에 붉은 도포를 입고 있었으며 두상이 소머리 모양이고 말 얼굴을 하였으며 삼엄하게 호위하고 있는 모양이 어마어마하여 인간세상의 어느 임금님보다 못지않았다.

그런데 세 눈을 가진 귀왕(鬼王)이 거인을 쳐다보더니 바로 옥좌에서 내려와 허리를 굽혀 절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주인님 어찌된 일이십니까? 저승에서 이렇게 주인님을 뵈오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일찍이 천상에서 죄를 진 바 있어 개의 몸으로 변하여 인간세상으로 귀양살이를 간 것인데 다행히 착한 주인님을 만나 편안히 잘 있다가 다시 돌아와 복직되어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참으로 고맙고 황송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니 이거인도 전에 집에 있던 눈이 셋 달린 개가 바로 지금의 저승 임금이라는 것을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거인도 역시 이 기이한 인연에 놀라 인사를 마치고 눈물로서 대답하였다.

"천한 이 몸이 본래 배우지 못하고 아는 것이 없는데 이제 곧 염라대왕을 찾아뵈면 묻는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귀왕께서는 저로 하여금 이롭게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였다.

귀왕이 말하기를

"착하고 어진 주인님이여! 이제 내가 상세히 알려드릴 테니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염라대왕한데 가면 인간 세상에 있을 때 무슨 좋은 일을 하였느냐고 틀림없이 물으실 것입니다. 몸이 천한 일에만 종사하여 좋은 일은 할 사이도 없었습니다. 항상 부처님 말씀의 귀중함을 받들고 대장경판을 만들어 널리 알리려 하였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저승으로 오게 되었습니다"고 대답하라 하였다.

그래서 거인은 귀왕의 말을 명심하여 듣고 나서 곧 사자들의 안내를 받아 저승에 들어가니 염왕이 묻기를 "너는 인간 세상에 있을 때 무슨 좋은 일을 하고 왔느냐?"고 하였다.

"저는 젊은 시절부터 말단 관직에 있었던 탓으로 착한 일을 할 사이가 없었기에 나이가 들면서 장차 큰 불사를 일으켜 부처님과 인연을 만들고자 하였는데 갑자기 저승사자의 부름을 받아 이렇게 죽어 왔사오니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거인의 대답을 들은 염라대왕은 부드러운 얼굴로 친절하게 앞으로 가까이 오라하기에 공손히 앞으로 나가니 염라대왕은

"그러면 네가 인간 세상에 있을 때 무슨 일을 하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말았느냐 사실대로 말하라" 하였다.

거인은 아까 귀왕이 미리 알려준 바와 같이 "이 천한 몸이 듣건대 부처님의 말씀은 지극히 귀하다 하옵기에 장차 경판을 새겨서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하다가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심히 유감입니다." 하였더니

이 말을 듣고 일부러 뜰로 나려온 염라대왕은 매우 친절한 태도로

"바라건대 잠시 올라와서 일시 쉬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나 거인이 계속 사양하자 염라대왕은 판정관에게 명령하여 거인을 귀신명부에서 제외하게 하였다. 이어서 염라대왕은 거인을 칭찬하여 마지않으면서 정해진 수명보다 더 보태어 인간세상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백배사례하고 돌아 나오다가 다시 귀왕의 거처를 찾아 작별인사를 하려하니 미리 자리를 만들어 두고 어가 가까이 오르게 하여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하기를 "주인님 큰일을 맡으셨나이다. 그러나 조금도 염려하시지 말고 집에 돌아가시면 권선문을 지어서 팔만대장경이라 제목을 쓰고 선행을 한 공로 이야기를 판으로 새겨 관청에 납본하여 도장을 받아 보관해 두십시오. 그리하여 내년 봄에 내가 인간세계를 순시할 때를 다시 만나기로 하지요."라 하였다.

거인은 안심하고 유유히 물러나와 크게 기지개를 켜고 잠을 깨치니 한바탕의 꿈이었다. 거인은 곧 공덕문을 지어서 관인을 받아두고 봄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더니 어느덧 다음해인 정유년 봄이 되었다.

이때 마침 신라의 공주자매가 동시에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워 있다가 어느 날 부왕에게

"바라건대 급히 대장경 화주(化主-중생을 교화 인도하는 학식 높은 스님)를 불러 주십시오. 아니면 여식들은 곧 죽어 버릴 것입니다."

하며 통곡하는지라 임금은 곧 바로 합천 태수에게 연락하여 거인을 서울로 보내게 하였다.

거인이 궐문에 이르니 연락을 받은 공주가 나와서 말하기를 "화주님이시여 잘 오셨습니다. 와 주셔서 아픔은 다 나았습니다. 내가 바로 저승에서 만난 귀왕입니다. 저승에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한다.

공주는 다시 임금님께 말씀드리기를 "이 사람 거인은 전에 저승으로 들어갔더니 염라대왕께서 다시 인간세계로 되돌려 보냈다하오며 이는 오로지 대장경판을 새겨서 온 누리에 널리 알리도록 하기 위함이니 원하옵건대 부왕께서는 대단(大檀-불교의 특별한 의식을 치르는데 필요한 단)을 만들어서 이 큰 일을 도모함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리하시면 저희 공주들도 무병할 것이고 나라의 행운이 영원할 것이며 부왕께서도 오래오래 복을 누리실 것입니다."함에 왕은 곧 허락하였다.

이에 임무를 다한 귀왕은 거인과 작별을 고하고 다시 현신하여 천상으로 돌아가 버렸다.

공주에게 있든 귀왕의 혼령이 떠나자 병이 완쾌되고 정신도 본 정신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공주는 다시 부왕과 모후에게 아뢰기를 "저승에서도 이처럼 착한 일만 하였는데 하물며 인간세계에서 어찌 등한히 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님께서는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니 왕이 감복하여 대장경 각판을 허락하였다. 왕은 곧 화주의 착한 마음씨를 칭찬하며 대각승통을 불러 대장도감으로 설치하였다. 사재를 들여 대장경 각판을 잘하는 사람을 불러 모우고 거제도에서 경판을 만들어 금으로 장식하여 옻칠을 하고 해인사에 옮긴 다음 십이경찬법회(十二慶讚法會)를 열었다.}

내용 중 “당대중 임술년”과 “신라”라는 말이 이 기록을 믿지 못하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대장경판에는 말미에는 “고려국대장도감 봉칙조조(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라 하여 고려 고종 때 각판하였다는 사실은 너무 명백하여 이론을 제기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해인사 사적비는 조선 영조45년(1769)에 새운 것인데 비문 중에 “....高麗文宗時藏大藏經板 我惠莊大王 戊寅歲 重修板閣又印其經文焉....”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고종보다 거의 200여년이나 앞선 고려문종(재위기간1046-1083)시대에 경판을 해인사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으로서 이 역시 같은 이유로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다.




1.2 강화출육설(江華出陸說)

언제쯤 해인사로 왔는지 시기에 대한 논란은 있으나 강화도에서 새겨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설이 가장 널리 인정되고 있고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몇 가지 주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1.2.1 고려말설(高麗末說)

이는 다카하시(高橋亨)라는 일본인 학자 등에 의하여 주장된 것으로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국왕이나 개인이 대장경을 인출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신라 때부터 이조 숙종조에 걸쳐 시문을 모아 엮은 동문선(東文選) 68권의 박전지가 지은 영봉산 용암사 중창기를 보면 충숙왕 5년(1313) 임금은 구 대장경이 부식되어있음을 보고 이 절의 주지에게 명하여 새로이 인출하여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내용중에 “就江華板堂印出闕函闕卷闕張而來”라는 구절이 있어 강화판당에서 인출하여 가져온 것을 알 수 있어서 이때까지도 대장경판은 강화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동문선 76권에 보면 이숭인이 지은 신륵사대장각기(神勒寺大藏閣記)가 있는데 이는 이색이 우왕 7년(1381)에 죽은 부친의 뜻을 따라 대장경을 인출하고 신륵사에 대장각을 세워 안치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또 이숭인의 도은집(陶隱集)에는 <睡庵長老印藏經于海印寺獻呈>이라는 시(詩)구절에서 수암장로가 해인사에서 대장경을 인경하여 바쳤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상의 자료를 근거로 대장경판을 해인사로 옮겨온 것은 고려 충숙왕 5년(1318)에서 우왕7년(1381)에 걸치는 63년간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유일한 근거라고 할 수 있는 수암장로 시구절의 “장경”이 지금도 해인사에는 고려 중기 및 말기에 새긴 삼본화엄경등 사간(寺刊)경판이 많이 있으므로 이것이 정장 고려대장경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거의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다.




1.2.2 정축년출육설(丁丑年出陸說)

태조3년에서 정조원년사이의 7년간에 옮겼다는 설이다. 해인사 사간장에서 발견된 석화엄교분기 원통초(釋華嚴敎分記圓通?)에는 제 10권 10장 판의 윤곽 바같 쪽에 <丁丑年出陸時 此?失 與知識道元同願開板入上 乙酉十月日 首座?玄>이라 음각되어 있다. 즉 “정축년에 강화도로부터 내올 때 이 경판을 잊어버렸으므로 수좌 충현이 지식 도원과 함께 불사를 일어키고 을유년 10월에 판을 새겨 넣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판이 대장경판을 옮긴 후 정리를 할 때에 원통초 10권10장판이 없어진 것을 알고 정축년에서 9년 후인 을유년에 판을 새겨 넣었는데 뒤에 인경작업등을 하다가 원본을 찾아내었으므로 새로 새긴 충현의 판은 잡판으로 돌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정축년(1398)에 출륙한 대장경판은 이후 을유년(1406)까지 9년에 걸쳐 해인사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정축년이 이조실록의 태조 7년(1399)조의 출륙 기록과는 1년의 차이가 있고 정장이 아닌 잡판에 있는 점을 들어 후세의 가짜 판각일수도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1.2.3 태조7년설(太祖七年說)

조선왕조 태조 7년 5월 10일과 정조 원년의 1월 9일 사이에 대장경판을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설이다. 이에 관하여는 이조실록 태조 7년(1399) 5월조에 “丙辰 幸龍山江 大藏經板 輸自江華 禪源寺 丁巳雨戊午雨 令隊長隊副二千人 輸經板于支天寺命檢參贊門下府使兪光祐 行香 五敎兩宗僧徒 誦經 儀仗鼓吹前導”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태조가 1399년 5월 10일 한강으로 행차하여 대장경판을 강화도 선원사로부터 가져오는 것을 참관하였다. 비는 10일부터 12일 까지 계속되었고 2천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지천사로 옮겼다. 검참찬문하부사 유광우에게 명하여 향을 피게 하고 오교양종의 승려가 경을 외우고 의장을 갖추어 나팔을 불며 인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지천사의 위치는 서울 서대문밖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는 강화도에서 옮겨온 대장경판이 전부 혹은 일부인지, 정장인지 속장인지 나아가서는 여기서 말하는 대장경판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대장경판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경판인지도 명확히 알 수 없다.

다시 이조실록의 정종조를 보면 정종원년(1540) 정월 9일에 경상감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太上王欲以 私財印成大藏經 納東北面 厥畜菽栗五百四十石于端吉兩州倉 換海印寺傍近 諸州米豆” 즉 "대장경 인쇄에 참가할 승려들을 공양하기 위하여 태상왕 이성계는 동북면에 저축한 콩과 밤 540석의 사재를 내어놓았는데 거리가 멀어 직접 가져 갈 수 없으니 단주와 길주 두 고을 창고에 납입하게 하고 해인사근방의 여러 고을에서 쌀과 콩을 대신 내주도록 하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기록을 비교해보면 1540년 정월에 대장경판은 벌써 해인사에 있었고 만약 강화도에 팔만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었다면 지천사로 옮긴 1539년의 5월 10일과는 불과 8개월의 기간밖에 없으며 이 사이에 대장경은 서울의 지천사에서 해인사로 옮겨온 셈이 된다. 이 주장은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출처가 분명한 자료의 기록이고 명확한 연대가 있는 점을 들어 가장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8개월 동안에 과연 그 많은 경판을 해인사로 옮겨올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논란의 여지가 많다.




1.3 대장경판 2벌 설

일본은 고려 말부터 조선왕조 효종에 이르는 2백 여 년 간 끝없이 대장경을 하사해 달라고 요구하였으며 그때마다 우리 조정에서는 처리에 골몰하였다. 적당한 핑계로 아예 주지 않거나 또 주더라도 정장이 아닌 밀교장경등을 대신 보내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정종 원년(1399) 7월 21일에 보면 일본 사신의 부관인 스님 10여명이 입궐하여 예를 올리니 모시·삼베 및 인삼과 호랑이가죽·표범가죽 등의 물건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대장군과 의홍이란 사람이 우리나라를 위하여 적을 멸한 뜻을 사례하고, 또 대장경판을 하사해 주십사고 청한 것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예전에 2벌이 있었는데, 1벌은 나라 사람들이 인쇄하는 것이고, 나머지 1벌은 바다 도적 떼가 불태워서 없어진 것이 많아 완전하지 못하다. 장차 유사를 시켜 완전히 보충하여 보낼 터이니, 배를 준비하여 와서 실어 가라." 라는 기록이 있다.

또 세종 5년 12월(임신)조에는 일본국왕의 사신 규주와 범령이 와서 국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중에 “귀국에는 장경판이 1벌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 1벌의 하사를 요청한다.(別有所請 聞貴國藏經板非一 要請一藏板)”

이상의 문헌을 보면 대장경판을 만들 때 2벌을 만들어 한 벌은 강화도에, 나머지 한벌은 해인사에 두었다는 내용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대장경판의 판각위치나 옮겨온 경로에 대한 문헌기록과 맞아떨어지므로 여러 가지 의문점은 말끔하게 풀어 버릴 수 있다. 즉 해인사 한 벌은 남해나 거제도의 경판을 새길 수 있는 나무가 많이 나오는 지역에서 만들어 수시로 해인사로 옮겨도 놓았고 강화도 경판은 서해안 및 남해안에서 나무를 실어다가 강화도에서 새긴 후 보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2벌설은 한 벌을 새기기에도 전 국력을 동원하여야 할 만큼 벅찬 국가적인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경판을 두벌 새겼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만약 정종 때 한 벌을 일본에 주어 버렸더라면 다시 대장경을 달라고 매달리지는 않았을 것인데 정종 이후에도 효종에 이르는 160연년 동안 끈질기고 집요하게 150여 차례에 걸쳐 일본인들이 우리 조선에 대장경을 요구한 것을 보면 2벌 설은 믿기 어렵다. 그러나 기록이 정확하기로 이름난 조선왕조실록에, 그것도 외교사신을 접견한 자리에서 임금이 하신 말씀을 그냥 흘려버리기에는 많은 여운이 남은 대목이다.




1.2 옮겨오는 과정에 일어나는 문제점은?

해인사에 있는 대적광전의 벽화를 보면 대장경판을 소달구지에 싣고 남자는 지게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옮겨가는 모양을 그려 놓았다. 그러나 이 그림이 반드시 강화도에 서 옮겨온 경판이라는 증거가 없는 이상 당시의 상황을 그려놓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거제도나 남해에서 만든 경판을 수시로 해인사로 옮겨오는 과정을 그린 그림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본다면 강화도 대장경판을 옮겨오는 길은 육상운반과 해상운반의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육상운반은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의 기록대로 강화도에서 서울의 지천사로 옮겨온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지천사에 얼마동안 보관되었든 경판은 남한강, 충주까지 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다음 육로로 문경새재를 넘어 점촌을 거쳐 낙동강변에 도착한다. 수로로 낙동강을 타고 내려와서 고령의 장경나루에 도착, 다시 육로로 해인사로 운반하는 과정이다.

해상운반은 강화도 선원사 혹은 서울의 지천사에서 조운선에 싣고 서해와 남해를 거쳐 낙동강을 거슬러 고령의 장경나루에 도착하는 길이다.

그러면 대장경판을 먼 산간오지인 해인사까지 운반하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우선 안전하게 이동하기 위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대장경판은 나무로 만들어 졌으므로 충격과 습기에 노출되면 파괴되거나 썩어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또 글자의 크기는 사방1.5cm정도의 정사각 형안에 굵기 2mm정도, 글자깊이 2mm정도이며 글자 끝의 빗침 부분은 가늘고 날카로워 조그만 충격에도 떨어져 나가 버릴 수 있다.

따라서 포장작업을 정교하게 하지 않으면 옮기는 과정에 경판은 대부분 각판부분이 서로 맞닿아 마멸되어 쓸모없게 되거나 비를 맞아 경판이 갈라지고 비틀어지는 등 막심한 피해가 생길 것이다. 각판 당시에도 마구리의 손잡이를 글자를 새긴 경판 보다 두껍게 하여 서로 맞닿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하였다.

준비로서 경판이 서로 맞닿지 않게 완충포장지를 넣어 고정하고 사람이나 우마차가 들거나 싣기에 적당한 크기로 튼튼한 포장을 해야 한다. 경판과 경판 사이에 쓰일 수 있는 완충지는 한지, 베, 짚 등을 생각할 수 있고 몇 개씩 단위로 포장하는 데는 외부충격을 감안하여 비교적 두꺼운 나무판자로 만든 궤짝이 아니면 안 된다.

이상과 같은 몇 가지 재료에 대한 가정을 해두고 재료의 양이 어느 정도일지 계산해보자. 경판 한 면의 넓이는, 대부분을 차지하는 68cm경판과 78cm경판의 평균으로서 길이 73cm를 잡고 폭을 24cm로 보아 약 1,752cm2가 된다. 이를 경판의 장수로 곱한 전체 경판의 한쪽 넓이는 자그마치 1억2천4백만m2, 우리가 요즘 사용하고 있는 한지 크기로 따져도 2500만장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지 한 장으로는 완충효과를 가져올 수가 없으므로 적어도 3-5장은 필요하였다면 어림잡아도 1억장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포장단위는 크게 잡아 한사람이 30-40kg을 짊어지고 옮길 수 있는 것으로 가정하여 경판 한 장의 무게가 3.5kg정도인데 포장판자의 무게를 포함하여야하므로 10장 이내로 생각된다. 경판10장을 쌓으면 높이는 대략50cm, 포장판자의 두께를 한치(2.5cm)로 본다면 한묶음을 포장하는 데 0.03m3 약 100사이의 판자가 필요하다. 기타 포장의 양옆에 들어가는 짚 등의 완충제를 생각해 보면 필요한 재료는 엄청난 양이 필요하다.

다음은 육상이든 해상이든 대장경판을 해인사로 가져오는 과정에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생각해 보자.

첫 번째는 태조7년 5월 10-12일에 걸쳐 지천사로 옮길 때 군사 2000명이 동원되었다 하였으나 이 숫자로 팔만대장경을 전부 옮겼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으며 옮기기 위해 적어도 수 만 명이 동원되어야 한다. 이 기록대로 라면 3일 동안에 전부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랫동안 옮기는 작업을 계속하다가 마지막 옮기는 날 태조가 격려 차 행차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두 번째는 당시의 동원 장정수와 대장경판의 무게와의 관련을 지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대장경판의 무게는 개략적으로 경판당 평균무게를 3.5kg으로 보아 8100여장의 무게는 약 28만kg, 여기에 포장을 포함하면 40-50만kg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장정 한사람이 최대 30-40kg을 진다면 연 인원 약 1만 4천 여 명의 인원이 필요하다.

세종실록 지리지(地理誌)에 의하면 태종6년의 경기도 및 충청도의 장정 수는 각각 38,138명과 44,476명이다. 따라서 경기충청 양도의 전체 장정의 17%가 동원되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물론 수운과 우마차를 겸용을 생각하면 동원 인원수는 훨씬 줄 수가 있으나 농번기가 포함되어 있고 당시의 교통상황 및 장정 동원에 따른 잠자리와 식사문제를 고려해 본다면 전혀 가능하지 않다. 만에 하나 이렇게 많은 장정이 단기간에 동원되었다면 국가적인 지원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고 이조초기의 사회분위기가 국고를 허비해 가면서 대장경 운반에 대대적인 지원을 할 수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세 번 째로 강화도 선원사에서 서울 지천사로 다시 새재를 넘어 낙동강을 내려와 장경나루를 거쳐 해인사의 장장 천리 길을 옮겨왔다면 아무리 포장을 철저히 하였더라도 마멸되거나 각자부가 떨어져 나간 부분이 상당수 있을 것이고 적어도 서로 마주 닿는 마구리에는 옮기는 동안의 흔들림에 의하여 마멸된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의 해인사 경판에는 물리적인 마찰에 의한 흔적은 전혀 관찰되지 않는다.

네 번째는 정조 원년 1월 11일 대장경판을 인경하기 위해 적어도 수개월 전에 해인사에 경판이 도착해 있어야만 경판을 정리하고 분류하여 인쇄할 수 가 있다. 1915년 일본인들이 카드를 작성해 가면서 과학적으로 인경작업을 수행하는데도 인쇄가 끝난 대장경의 정리에만 4개월이 소요되었다 한다. 무질서하게 옮겨온 경판의 권.차를 순서대로 정리하는 데 아무리 낮추어 잡아도 1-2개월은 소요되며 더욱이 그 사이에 한 겨울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이유를 감안한다면 정조실록의 기록대로 원년 정월 11일에 경판을 인쇄하기 위해 대장경판이 적어도 한해 전인 태조7년 10월까지 해인사에 도착하여야 할 것이다. 5월12일 지천사에 옮겼다 하였으니 얼마동안은 지천사에 보관하였다고 보아야 하며 설령 옮기자 말자 바로 해인사로 출발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약 5,6개월 동안에 해인사에 옮겨와야 한다는 결론이나 한 여름의 무더위와 장마철이 또 이 기간에 포함되어 있다.

다섯 번째는 당시로서는 그 엄청난 양의 대장경판을 옮기려면 적어도 범국가적인 경비지원과 수많은 인원을 이 사업에 동원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조초기의 기록들이 실록을 비롯하여 세세한 내용까지 상세히 기록에 남아있는데 반하여 대장경 이운에 관한 내용은 실록은 물론 어느 역사서에도 남아있지 않다.

이상과 같이 여러 가지 정황을 검토해 보면 대장경판은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학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태조실록과 정조실록에 의거하여 태조7년 5월12일에서 정조원년 정월 11일까지의 9개월의 기간동안에 대장경판이 강화도 선원사에서 합천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태조7년 설은 물리적으로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부록 2. 대장경은 어떻게 인쇄하였는가?




목판으로 만들어진 대장경은 그대로 두어서는 주옥같은 부처님 말씀을 중생에게 전달 할 수가 없다. 처음부터 인쇄하여 여러 권의 책으로 만들어 반포하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태종13년 3월11일 대장경을 개경사에 안치할 목적으로 해인사에서 인쇄한 기록 중에 풍해·경기·충청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그 도에서 만든 경판 인쇄용지 2백 60속(束)을 경상도에 보내게 하고, 또 경상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지금 수집한 인쇄용 종이를 해인사로 수레에 실어 보내니 대장경을 인쇄하고 여기에 관련된 여러 사람과 중 2백 명에게도 보수를 모두 지급토록 하라.”

등의 단편적인 기록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경판을 인쇄했는지 상세히 알 수 있는 기록이 없으므로 추정해 보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1915년 팔만대장경 전체를 인쇄하면서 <고려대장경 인쇄전말>이라는 보고서가 남아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2.1 인쇄용지

인쇄용지는 제본용지, 절본(折本)용지 철본(綴本)용지로 나누고 이중에 실제로 경을 인쇄하게 되는 절본용지의 제조에 가장 정성을 기울였다.

인쇄용지는 본래 황지(黃紙)를 사용하던 예에 따라 수십 종의 견본을 만들어 약 40일간 햇빛에 노출시키고 실험해본 결과 삽목(澁木)과 천궁을 끓인 즙을 섞고 닥나무를 원료로 종이를 뜬 것이 가장 변색이 덜되고 우수하였다. 제본의 크기는 약간의 여분을 포함하여 세로 35cm, 가로 58cm로 하고 16만5천 여 장을 제조하였다.

철본용지는 그냥 백지를 쓰기로 하고 세로 41cm, 가로 61cm의 크기로 하여 33만 여 장을 만들었다. 제본용지는 모두 황지를 사용하기로 하고 1만2천 여 장을 제조하였다. 종이의 원료는 모두 국산 닥나무껍질을 사용하였으며 1914년 10월에 종이를 만들기 시작하여 1915년 7월 초순에 끝마쳤다.




2.2 인쇄인원

이 당시에 벌써 활판인쇄가 보급되기 시작하여 목판인쇄공은 극소수이었으며 1년 전부터 22명을 시험을 통하여 선발하고 3개월간 고용계약을 맺었다.




2.3 카드작성

옛 대장경을 인쇄할 때는 판가에서 꺼내어 사용하고 바깥에다 그대로 쌓아두었다가 인쇄가 다 끝난 다음에 판가에 넣은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이 때문에 경판이 뒤섞여 다시 순서대로 찾아 넣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인쇄된 대장경은 200여명의 승려가 동원되어 한 달이 넘게 정리하였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이번의 대장경 인쇄는 대장경이름, 권, 차별로 색깔을 달리하여 카드를 작성하고 인쇄가 끝나면 바로 원래의 판가에 되돌려 넣어 혼란을 막고자 하였다. 카드매수는 20,415매이며 5명이 동원되어 14일이 걸렸다.




2.4 인쇄에 사용한 용품

여러 가지를 비교해본 결과 옛 먹이 우수하여 평안남도 양덕에서 생산되는 먹이 가장 우수하였다. 먹을 비롯한 기타 품목은 다음과 같다.

양덕산 송연묵(松煙墨)
17,450개


말털(마발,馬髮)
60개


풀뿌리 솔
60개


짚 솔
20개


황랍(黃蠟)
15개


화로
10개


벼루
20개


정목(定木)
20개


사침(沙針)
40개







2.5 인쇄과정

인쇄 시기는 작업이 편리하고 판목을 손상시킬 염려가 없는 3월 중순부터 시작하였다. 인쇄 장소는 처음에는 경판장의 가운데 통로를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춥고 작업공간이 좁아 불편하므로 가까이 있으면서 거의 사용하지 않은 불당을 쓰기로 하였다.

인쇄방법은 하루 전에 용지를 물에 적시고 먹물도 준비하였다가 인쇄공의 왼쪽에 용지를 순서대로 맞추어 그 옆에 물에 적신 솔과 밀랍을 놓고 오른쪽에는 먹물과 벼루 풀뿌리 솔 및 말털을 놓는다. 앞에는 판목을 놓고 2사람의 중간에 밀랍을 녹일 화로를 놓는다. 무릅 옆에 정목을 놓고 먼저 먹물을 벼루 위에 부어 풀뿌리 솔로 이를 개고 다음에 밀랍을 말털에 칠하여 인쇄할 판목에다 짚솔로서 물을 바르고 풀뿌리솔로서 몇 번씩 경판 표면을 닦아 먼지를 제거한다. 다음 풀뿌리 솔로서 먹물을 경판면에 칠하고 용지를 정목에 맞추어 경판 위에 펼쳐서 말털로 여러 차례 눌러서 인쇄한다.

6월2일까지로 작업이 끝났으므로 약 2개월 반이 걸린 셈이며 인쇄공의 연인원수는 총 1,306명이고 판목의 출납 및 인쇄용지 정리 등에 소요된 인부는 966명이었다.




2.6 결판(缺板) 및 결자(缺字)의 보충

판목을 정리한 결과 결판 18매가 있음을 발견하였으므로 월정사 등에 보관된 옛 인쇄본을 참조하여 보충할 경판의 원고를 확정하였다. 경판에 사용할 나무는 서울근처 여러 곳에서 수집한 배나무재를 제재하여 이용하였고 서유거의 임원경제지에 기록된 대로 소금물에 침수하고 쪄서 건조할 예정이었으나 건조에 2개월 이상이 소요되고 인쇄 작업에 차질이 우려되어 공업시험장에 의뢰하여 증기인공건조법으로 건조하였다. 판각이 끝난 경판은 전 표면에 옻칠을 하고 4귀퉁이에는 구리로 만든 금구(金具)를 밖아 넣어 옛날의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또한 대장경을 인쇄한 후 글자가 빠진 경판을 검사한 결과 136개소 1,017자가 있어서 결판의 예에서 마찬가지로 이미 인쇄되어 있는 대장경을 참고하여 다시 새겨서 경판에 붙여 넣었다.




2.7 제본 및 마무리

인쇄된 대장경은 서울로 옮겨와서 4월 8일부터 8월 30일까지 약 5개월이 걸렸고 인원은 감독 및 교정인원을 제외하고도 총 2,090명이 소요되었다. 인쇄된 대장경의 수는 목록을 포함하여 총 1,511종 6,805권이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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